12화. 어린 남주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5)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던 레오폴드의 풀빛 눈동자가 이지러졌다.
‘으, 누가 세기의 사랑을 하실 남주 아니랄까 봐.’
나는 속으로 부르르 떨었다.
종소리를 듣고서 첫눈에 반한 아멜리와 평생을 함께하리라 마음먹을 예비 로맨티시스트 어린이를 나는 흐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랑에는 필요 없을 수 있지. 하지만 사랑에는 역경이라는 게 있단다? 그때 가문이 얼마나 유용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도울 수 있어.”
“네에…?”
간만에 레오폴트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게 구는 소공자님께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가 어떤 사람이어도….”
“봐봐, 레오. 네가 성인이 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딱 보면 종소리 울리는 그런 사람.”
나는 레오폴트가 어떤 고민을 할 여지도 주지 않도록 재빨리 말했다.
오늘도 종소리 세뇌 한 스푼 첨가해서.
“그런데 그 사람에게 아우렌바흐 후계자만이 도울 수 있는 고난이 있을 수 있어. 아우렌바흐 아무개도 안 되고, 다른 가문 후계자도 안 돼. 너는 첫눈에 반해 그 사람을 마음 깊이 사랑하겠지만, 네 능력이 부족하면 그 사람을 못 돕고 잃을 수도 있다는 거야.”
나는 가문의 일 때문에 상경하여 이런저런 수난을 겪을 아멜리의 설정을 떠올리며 진심을 담아 당부했다.
아멜리의 고난 중에는 레오폴트가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마치 월하노인의 심정으로 늘어놓은 덕담을, 레오폴트는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어른 되고 아멜리 만나면 다 도움이 될 거야.’
…최애 소설 속 활자 남주를 3D 미니미 버전으로 만나게 된 그때부터 나는 그를 편애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는 그 애의 그 상냥한 품성이 내게 마음의 빚까지 지웠으니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그들의 절절한 사랑 때문에 레오폴트를 좋아했지만, 이제는 내 친구가 하게 될 사랑이 무탈하기를 바랄 정도로.
그래. ‘무탈’을 바라야만 할 정도로, ‘공제눈’의 고구마밭은 정말 절경이요 장관이었다.
둘의 마음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는 구실로 알차게도 굴렀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 오해도 하고 착각도 하는 곁다리 고구마도 아주 줄줄이었다.
‘분명 키워드에 신데렐라물이라고 해놓고서는.’
고구마 구간 끝나면 정주행하게 댓글 달아 달라는 리뷰에는 몇 달이 지나도록 공감만 찍혔다.
오죽하면 잠깐의 단비 같은 사이다가 나오더라도 ‘얘들아, 상대는 공제눈이야.’라는 댓글들이 달리곤 했었을까.
그 고난을 씩씩하게 극복하며 성장해 나가는 아멜리에게 ‘능력 여주’ ‘억척 여주’ 같은 키워드가 붙기도 했고, 그만큼 주인공 커플의 유대감이 날로 끈끈해져서 꽉 찬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있었지만….
결말을 보고 나면 그렇게까지 굴러야만 했을까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밌었던 거겠지만, 그건 진짜 소설 속일 때 이야기고. 이 천사 같은 아이가 그렇게 구를 거라니 너무 슬프잖아.’
내가 독자였던 세월보다 레오폴트의 친구인 세월이 더 길어지다 보니, 예견된 그의 미래에 가슴을 치게 되는 것이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권력이면 내게도 있지. 게다가 내게는….’
레오폴트에게는 없고, 내게는 있는 것.
바로 정보.
아멜리가 저와 진작부터 같은 마음이라는 것, 그래서 오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어떤 위기가 닥칠지, 어떤 오해가 생길지 같은 것들….
그 모든 정보를 아는 건 나뿐이었다.
‘이 정보들을 갖고 내 권력을 잘 활용하면…. 레오폴트의 사랑에 꽃길을 깔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방금 장래 희망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공제눈’에는 불필요한 고구마가 많았다.
몇 가지 굵직한 사건 줄기야 어쩔 수 없지만 정말 얼토당토않은 오해들이 쌓이는 건 황당할 정도였다.
굳이 둘의 애틋함을 키우겠답시고 같은 귀족인데 신분이 차이 난다며 여주가 남주를 피해 다녀야 할까?
굳이 남주의 더 멋있는 모습을 위해 여주가 추문에 휩싸여야 할까?
굳이 남주가 여주를 더 극적으로 구하기 위해 여주가 온갖 해코지를 당해야 할까?
그런 자잘한 고난이 없더라도 정말 사랑스러운 커플인데.
나는 해맑은 능력남과 현실주의자 여주인공의 관계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를 떠올렸다.
독자들이 그 고구마밭을 버텼던 것은 관계성 좋은 주인공 커플이 꽁냥대는, 가뭄에 단비 같은 장면들을 기다리는 마음에서였다.
‘그 고구마들만 정리해 준다면….’
열 번은 정주행해서였을까, 전생의 마지막까지 재주행하던 작품이어서였을까, 어릴 적 꿈속에서 몇 번이고 되새겨서였을까.
원작의 이야기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전생의 기억은 점점 어렴풋해져만 가는데도.
이번 생을 시작할 때 구원이리라던 그 메시지는, 어쩌면 내 사명을 알려준 게 아니었을까?
주인공들의 사랑을 구하라는.
‘그래서 꿈속에서 ‘공제눈’ 이야기가 반복된 거고 말이야….’
지금 우리 나이 열 살, ‘공제눈’의 무대에서 레오폴트는 스물둘.
그때 레오폴트를 도와주기 위해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완벽할 거였다.
“레오, 넌 꼭 행복한 사랑을 할 거야.”
“…네? 네에….”
레오폴트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기색이었지만.
그 첫 발걸음은 드디어 열 살이 된 내가 처음으로 참석하는 황실 행사, 신년 하례식이었다.
‘드디어 외출 제한 해금!’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혼자 프리지어궁에서 공부나 하다가 일찍 자는 게 얼마나 쓸쓸했는데.
그 감격에, 나는 하례식 준비를 하는 내내 들떠 있었다.
“세실, 드디어 신년 하례에 참석하게 된 소감이 어떠하니?”
하례식 당일, 테오도르는 내 에스코트를 위해 내 방으로 찾아왔다.
현세대 사교계의 최고 꽃미남답게 테오도르는 오늘도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은빛 머리칼 밑으로 다정하게 빛나는 벽금안, 거기에 제 몸처럼 잘 어울리는 군청색의 예복까지.
“이제 저도 당당히 황실의 일원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답니다.”
“…조금 더 응석 부려 주면 좋을 텐데.”
테오도르는 오늘도 어김없이 안타까워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거기에마저도 세실에 대한 사랑이 배어났지만.
그의 나이 열두 살에 내가 태어날 때까지 막내였던 테오도르는 특히 나를 아기처럼 여겼다.
하지만 나는 한 떨기 조숙한 환생자…. 그의 투정을 들어주고 싶어도, 열 살처럼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유아 퇴행하는 느낌이 나는걸.
‘애초에 열 살다운 말투가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테오도르가 나를 두고 요정… 같은 외모와 달리 냉정한 구석이 있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며 팔불출의 면모를 뽐내고 다니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첫 예복이라니, 이제 완연한 황녀 전하로구나.”
테오도르의 얼굴에 감격이 차올랐다.
황실 가족들이 나를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속절없이 쑥스러워지곤 했다.
아무래도 면역력이 없어서. 그래서 나는….
“메리와 패티도 감격스러운지, 오늘따라 작정하고 인형 놀이를 하더라고요.”
습관처럼 내 시녀들을 발고하고 말았다.
오늘 온 귀족 사회에 정식으로 첫선을 보이는 날이라며 꼭두새벽부터 나를 어찌나 들들 볶던지.
전생이었으면 새벽부터 이 난리 부리는 거, 아동 학대라 해도 할 말 없을걸.
“전하, 인형 놀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전하께서 인형처럼 아름다우시긴 하지만, 저희 욕심만 채운 것도 아니고요.”
“저희가 작정하고 했더라면 이 정도로 안 끝났을 텐데….”
그래,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물론 이건 다 세실리아가 요정같이 예뻐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들이 나의 공식 석상 데뷔를 준비하며 다른 의미로 감격해서임을 나는 안다.
‘내 평생을 함께한 셈이니까, 우리 사이에 가족만큼의 애정이 생길 때도 됐지.’
나는 거울에 비친 메리제인과 패티샤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레베카 언니가 준….’
거기에 오늘도 내 목에 자리하고 있는 수정 초커까지.
손재주가 좋은 패티샤가 내 와인색 비로드 드레스와 같은 천으로 초커를 만들어, 레베카의 신성력이 담긴 수정을 옮겨 단 것이었다.
설렘만큼 긴장도 컸지만, 내 아군들의 사랑으로 완전무장하고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 잘할 수 있어!’
오늘 나의 목표는 귀족 사회에 무사히 눈도장을 찍는 것.
그와 더불어, 내 비밀 임무도 무사히 수행하는 것!
나는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나의 비밀 임무, 등장인물 관찰하기! 특히 두 악역, 스칼렛이랑 루시페우스 미니어처 버전 확인하기!’
신년 하례식에는 아수라…마…. 아, 아직도 입에 안 붙네. 아무튼, 제국의 귀족 대부분이 참석했다.
이런 자리라면, 원작의 등장인물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을 터.
‘아직 10년 전의 모습일 테지만 미리미리 알아두면 작전을 세우기도 좋을 거야.’
원작이 시작돼야 황성에 올라올 아멜리를 제외하면, 다른 귀족 등장인물 대부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날 거였다.
레오폴트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이 진한 ‘심쿵’이었다면, 오늘의 만남들은 잔잔하게 이어질 반가움의 향연이리라.
‘공제눈’은 기본적으로 주인공 커플의 로맨스에 치중한 작품이기는 했지만, 황실파와 귀족파의 대립도 갈등의 한 축으로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래서 가문들 간의 알력이 흥미진진하게 묘사되는 것 또한 매력 중 하나였다.
‘그도 고구마라면 고구마였지만.’
다만 아버지의 치세가 워낙에 평화로운지라, 황실까지 위협할 정쟁 거리는 없다는 설정일 뿐.
아, 다시 생각해도 환생 정말 잘했다.
새우 등 터지는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어쩔 뻔했어?
“테오도르 1황자 전하와 세실리아 4황녀 전하 드십니다!”
내가 테오도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본궁의 알현실 문 앞에 도착하자, 시종이 우리의 입장을 고했다.
이윽고 육중한 문이 열렸고…. 알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악, 관심이 쏟아진다…!’
세실로 태어나고서 처음 보는 이 수많은 눈동자에, 나는 순간 기가 질렸다.
꼬옥, 테오도르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서 올려다보니, 테오도르가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긴장할 것 없어. 너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막둥이니까.
테오도르가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어서 진짜로 입을 열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 쫄 것 없어! 내가 열 살이 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황궁 안도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귀족들도 마음껏 구경할 수 있기를 말이다.
그러니까, ‘공제눈’의 인물들과 마주치고 교류할 수 있기를.
‘무대 위 배우는 쫄아도 관객은 안 쫄지!’
정작 지금 주목받고 있는 게 나라는 사실도 잊고, 나는 알현실 한가운데 깔린 카펫 위로 첫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