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어린 남주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4)
“언니, 오셨어요?”
“응, 숙제하고 있었구나, 우리 세실.”
나는 우다다다 달려가, 레베카에게 폭 안겼다.
“메리. 언니께….”
“오래 있을 건 아니니까 괜찮아. 바로 신전 나가 봐야 해.”
타고난 신성력이 후계 구도에 잡음을 낼 수 있을 정도로 큰 레베카는, 결국 지난해 성인식을 치르면서 정식으로 교단에 귀의했다.
보통 귀의하면 신전에서 지내야 한다는데, 레베카는 황족 특혜로 황궁에서 출퇴근하고 있었다.
그게 고단할 텐데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 정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레베카가 출가했다는 실감이 아무래도 잘 안 나.’
나는 내 건강을 위해 언제나 발 벗고 나서 주는 고마운 언니를 쳐다보았다.
‘레베카가 그렇게까지 내게 헌신해주는 게, 세실리아의 사랑스러운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가….’
소파에 나란히 앉은 뒤, 레베카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곧 네 여덟 번째 생일이잖니? 언니가 이번 돌아올 수 없는 바다 파견에 나가게 돼서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생일 선물을 미리 주려고.”
아, 그놈의 돌아올 수 없는 바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는 격랑이 일어나는 이중 일식 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1년에 한 번꼴로 두 개의 달이 동시에 그믐이 되면, 그 입구가 열리지는 않아도 마계의 기운이 강해져 그 지대를 황폐하게 했다.
그래서 교단의 사제들이 성기사단과 함께 파견 나가 대지를 정화해야만 했다.
황족인지라 여러 편의를 받아온 레베카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차출엔 도리가 없었다.
‘위험한 곳이라지만…. 레베카라면 무사하겠지?’
나는 아주 오래전 꿈속에서 봤던 빈사 상태의 기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파견이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바뀌었던 원작의 클라이맥스도….
레오폴트가 파견되었을 때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갑작스레 열리는 바람에, 그를 따라갔던 아멜리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서브 남주는 죽고, 조력자들도 죽고, 병사들은 중독되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 에피소드.’
그 위급한 상황에서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감동적이어서 몇 번을 돌려 봤는지.
‘그 장면에서 로젤리아 활약도 멋있었는데. 그래서 로젤리아 처음 봤을 때 설레기도 했었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무사히 돌아오시는 게 제 생일 선물인걸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철렁이는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등장인물의 활약이고 뭐고, 이제는 그 공간이 내 형제들을 위협하는 곳으로만 여겨지게 되었으니까….
‘무사한 게 최우선이야.’
십여 년 뒤 ‘공제눈’의 무대에 레베카도 등장하니 이번에도 별일 없겠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별수 없었다.
세실로 산 지 벌써 8년이 다 되어서일까. 이제는 황실의 가족들이 ‘공제눈’ 속 세실리아의 가족이 아닌, 정말 내 부모님과 형제일 때도 된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레베카의 낯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세실, 이 언니가 우리 형제 중에 신성력이 가장 강한 것 알고 있잖니?”
“그래도요….”
레베카는 내 얼굴을 다정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언니는 네가 더 걱정이야. 프리지어궁에서만 지내니 별일 없겠지만,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레베카가 그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어른들 엄지손톱만 한 수정이 달린 레이스 초커였다.
세밀하게 조직된 레이스 끈이 꽤 고급스러웠지만 수정이 다소 투박하게 세공돼 있어서 단순한 액세서리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게 뭐예요, 언니?”
“내 신성력을 담은 거야. 만에 하나 정말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네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을 거란다. 신성력 발현시키는 연습은 했었으니 기억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며, 성하의 최측근인 고위 신관이 찾아와 몇 번 훈련을 해주었더랬다.
별 소용은 없었지만.
‘그동안 내가 잔병치레하지 않도록 신성력으로 치유해주던 레베카니까….’
형제들 중 유독 나를 살뜰히 돌보는 레베카와 이리 오래 떨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구, 우리 세실은 울보구나.”
“히잉, 언니.”
아직 몸이 어려서인가, 눈물이 안 참아졌다.
그런 내 눈가를 쓸며 웃어 보인 레베카는, 내 목 뒤로 초커를 둘러 채워주었다.
“어때, 드레스랑도 잘 어울리지?”
레베카가 응접실 한쪽에 걸려 있는 거울로 나를 데려가 비춰 보게 했다.
“네 유모도 내가 몇 달간 떠난다니 걱정이 정말 큰 모양이더라. 부디 이 언니랑 유모를 생각해서라도 약 잘 먹고, 감기 조심하고, 응? 물론 세실은 알아서 잘하겠지만 말이야.”
거울 속에는 오래간 못 볼 동생을 벌써부터 걱정하는 언니와 그 언니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동생이 있었다.
‘공제눈’ 속 아름다운 등장인물과 특등석 관객이라며 우쭐대던 독자 하나가 아니라.
지금 레베카와 나누는 이 마음은 분명 내가 인형처럼 생긴 막냇동생이어서라기엔… 너무도 깊었다.
‘내가 전생에 사랑받는다 느낀 적은 없어도, 마음속 깊이 사랑한 적은 많으니까. 그 차이를 모를 리가 없잖아.’
나는 이러다가 펑펑 울 것 같아서 레베카의 품에 파고들었다.
“언니,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돌아오시면 제가 더….”
제대로 사랑할게요.
나는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그 단어를 입 안에 삼켰다.
‘레오폴트가 맞았어.’
나는 더 이상 최애 소설 속 남주만은 아닌 내 친구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레오폴트는 정말 천진하고 순수한 도련님이었다.
귀한 가문에서 금이야 옥이야 자란 외동아들에, 외모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으니 그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그런 도련님에게는 일말의 어두움도, 거기서 비롯된 예민함도 깃들 새가 없었으리라.
‘그래서 ‘공제눈’ 남주 설정에 꽃밭…이 있었지.’
그렇게 내가 레오폴트에게 마음의 빚을 진 지도 어언 2년.
레오폴트는 어느새 프리지어궁에서 인기 많은 꼬마 손님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햇살 어린이 레오폴트는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전하, 아우렌바흐 소공자님 오실 때 놀이방에만 계시지 마시고 정원에도 나오시고 좀 그러세요.”
“나갈 때마다 너희들이 그 난리를 피우는데 정신 사납게 무슨 정원이야?”
“그쯤은 새소리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두 분이 노니시는 모습으로 저희 안구 복지 좀 시켜주세요.”
…이 주책바가지들이 진짜. 아홉 살짜리 애들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다.
레오폴트가 올 때마다 사랑스러운 소공자를 구경하기 위해 궁인들이 괜히 프리지어궁 앞마당을 서성대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누구에게나 생글생글 웃고 말 한마디를 해도 예쁘게 하는데 누군들 안 좋아하겠어?’
게다가 내 유일한 벗이기까지 했으니, 나를 사랑하는 이는 모두 레오폴트를 좋아했다.
‘…그래, 레오폴트가 사랑받는 것도 단순히 그 애의 외모 때문만은 아닌 거야.’
천사 같은 외모의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레오폴트의 매력은 여기서 그칠 게 아니었다.
‘이 상냥한 아이가 사랑에 빠지면 또 얼마나 더 달달하다고? 아, 그거 구경하게 얼른 시간이 흘렀으면….’
어쨌든 내가 기대하는 건 ‘공제눈’ 속 멋진 공자님이 연애하는 모습이었다.
레오폴트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친구로 함께하는 것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본편이 있어야 프리퀄도 있는 것 아니던가.
그것이 기대되는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
나는 레오폴트가 그 공자님으로 잘 성장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상상의 동물 말이야. 동대륙 세란티 부족 신화에 있는.”
“세란, 뭐요?”
“아직도 동대륙 교류사 안 배웠어? 그럼 즐루파 왕국에 대해서도 아직 몰라?”
“즐…루파요?”
“그럼 중세 동대륙사는 배웠어?”
레오폴트의 얼굴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문제는 내 관심사가 영재 콘셉트의 막둥이로서 학문을 성취하는 데 쏠려 있다 보니, 레오폴트에게 자꾸 공부로 다그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슐렌 경이 원시 대륙사를 다 마쳐야 할 수 있다고…. 아니,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 매번 저를 앞서시나요?”
“너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지.”
“저도 매일 많이 공부하는데….”
슬슬 나에 대한 존경심도 잊어 가는 레오폴트가 억울하다는 듯이 꿍얼거렸다.
저도 나름 영재라고 칭송받는데, 늘 나보다 뒤처지니 배알이 상할 때도 되었다.
레오폴트도 친구라곤 나밖에 없는데.
‘헷, 나는 어른의 끈기를 가졌다고.’
입술을 빼죽대던 레오폴트는 제 나름의 답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역시 전하께서 신성력 수련을 안 받으셔서 그런가 봅니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
“한 시간 수업받고 나면 정말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진이 빠져요.”
신성력은 이 세계에서 마력만큼 다양한 효용성을 지닌 힘이었다.
검기처럼 무기에 두를 수도 있었고, 몸을 보호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귀족가 자제들은 타고난 것 이상으로 신성력을 다루기 위해 별도의 수련을 했다.
다만 배울 것 많은 공작가 후계자에게 익힐 것이 하나라도 더 있는 것은 고단한 일이어서, 레오폴트는 늘 나를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신성력 수련만 안 받으면 제가 지금 동대륙사 정복했을 텐데요.”
대외적으로 나는 여느 황족들만큼 신성력을 갖고 있어서 따로 수련할 필요가 없다고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내 목에 걸려 있는 레베카의 초커를 만지작대며 의젓한 황녀 전하의 목소리로 레오폴트를 다독였다.
“나중에 성기사단에 들어가려면 신성력 수련 열심히 해야지.”
“전하께서는 또 뭔가를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저희 부모님보다 전하께서 더 엄하세요, 정말.”
레오폴트가 입을 다시 삐죽거렸다. 토라진 낯도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러는 전하께서는 나중에 무엇이 되실 건데요?”
“글쎄. 황태자 전하께서 주시는 대로 받아야지.”
세실리아의 장래는 원작에 설정된 바가 없었다. 어차피 딱 두 번 언급되는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니까.
내가 생각했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전생 한국인답게 그냥 눈앞에 닥친 공부만 꾸역꾸역 하다 보니 그만.
‘그레이스가 렌틸 자작을 일찍 내게 붙일 땐, 뭔가 생각해둔 바가 있어서 아니었을까?’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대신, 나는 따끈한 모과꿀차나 홀짝 마셨다.
“제 미래 말고 전하 미래도 생각하셔야죠.”
“나야 은사를 졌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너는 성기사단에 딱이라니까?”
은사를 진 자.
황실의 외형 특징 중 하나가 은색 머리칼인 것에 빗대 황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공제눈’에서 내 언니들이 권위를 세울 때마다 쓰이던 이 단어를 내 입으로 읊을 때마다 조금 간질거렸다.
“제가 전하께 신관이 딱이시라면 교단에 귀의하실 건가요?”
“내가 왜 네 말을 들어…?”
“…아무튼 저는 황실 기사단 들어갈 거예요. 신성력 안 많아도 되는.”
레오폴트의 입술은 뾰족 튀어나와서 들어갈 줄을 몰랐다.
‘반항 모드인가 보네.’
말은 이렇게 해도 결국 성기사단에 들어갈 테니, 조금이라도 빨리 정 붙이게 잘 다독여야겠다.
“혹시 아니? 나중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위기에 처했는데 네 신성력이 부족해서 못 구할 수도 있어.”
‘공제눈’의 클라이맥스에서 아멜리는 레오폴트의 눈앞에서 죽음의 위기에 빠지게 되니까.
그것 말고도 레오폴트가 맞닥뜨릴 고난이 하고많았다.
고품격 막장이니 고구마가 찰지니 포장한대도 결국 ‘공제눈’은 ‘고구마 답답물’이었던 것이다.
‘제목에 ‘눈물’ 들어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후계자 수업도 잘 받아. 공작가 후계자라는 후광이 나중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얼마나 유용한데.”
“사랑을… 제 가문으로 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