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어린 남주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2)
“전하, 떨리시죠?”
“오늘 저희가 특별히 더 예쁘게 꾸며 드릴게요.”
“아우렌바흐 소공자님이 그렇게 귀여우시다는데, 우리 전하께서 더 예쁘셔야 하니까요.”
“남자애랑 외모 경쟁을 해서 뭐 해?”
“어머, 전하도 참. 혹시 미래의 부군이 될지도 모르는데 단단히 휘어잡아 놓아야지요.”
“맞아, 맞아. 전하야 거적을 뒤집어쓰셔도 요정 같으시지만, 낼 패가 있는데 안 내는 것만큼 바보짓은 없다고요.”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주접을 떨어대는 것을 거울을 통해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얘들이 뭘 몰라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지.’
어차피 세기의 사랑을 하게 될 레오폴트는 내게 연예인 친구에 불과할 예정인데.
나를 치장할 때마다 직업 만족도가 대폭 상승하는 듯한 그녀들의 호들갑에, 나는 가자미눈을 했다.
정말이지, 세실리아가 이렇게 안 예뻤으면 어떡하려고.
“전하, 머리 하나로 묶어 드릴까요? 아니면 양 갈래로 땋을까요?”
“병아리색 원피스 입으시겠어요, 벚꽃색 원피스 입으시겠어요?”
“양말은 레이스로 된 걸 신으시겠어요, 벨벳으로 된 걸 신으시겠어요?”
“머리 리본은 이 빨간색 레이스로 하시겠어요, 검은색 슈슈로 하시겠어요?”
이 질문에서 내가 답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저들이 하고 싶은 대로 꾸미곤 했으니까.
‘마음대로 해라들. 어차피 나는 천사 같을 거니까.’
내 관심사는 오로지 곧 최애 소설 남주를 본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레오폴트는 할머니인 아우렌바흐 공작 부인과 함께 내 거처가 있는 프리지어궁에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우렌바흐의 조손이 궁내를 운행하는 마차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프리지어궁 앞마당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설레는 마음에 응접실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꺄, 말씀은 그렇게 하셨어도.”
“역시 기대되시는 거지.”
그런 나를 보고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오두방정을 떨었다.
‘기대되는 건 맞지만, 너희들이 짐작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란다.’
내가 막 정원으로 이어지는 포석에 발을 디딘 순간, 저 멀리서 뚜껑 없는 작은 마차가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시절에는 연갈색이었을 머리가 반백이 된 중년의 부인 옆으로 금발의 고수머리 하나가 바람에 몽실대고 있었다.
뚜껑 없는 마차를 처음 타 긴장했는지 제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쥔 헤링본 재킷과 반바지 차림의 꼬마 신사님.
‘아기 천사 같아!’
레오폴트의 페리도트 같은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내가 수년을 버틴 끝에 계를 타고야 말았다는 것을!
나는 떨리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마차가 프리지어궁 입구에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마차를 몰고 온 시종이 레오폴트의 양 겨드랑이를 안아서 내려주었다.
번쩍 들어 올려진 모양새가 정말 천사 같아서, 나는 수런대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느라 애써야만 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4황녀 전하. 일전에 한번 황후 폐하의 다과회에서 인사드렸사온데, 기억하실까요?”
시종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공작 부인은, 제 손자에게 시범을 보이려는 듯 아주 정중한 몸짓으로 내게 인사해 보였다.
나는 최애 소설 속 남주의 할머니에게 내 조숙함을 과시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마음 놓고 손주를 맡겨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서 오게, 부인. 무탈하였지? 그때 부인이 권한 딸기 파이가 내 입에 맞아서 어머니의 파티시에가 프리지어궁으로 옮겨 왔지.”
“전하께서 영명하심은 황후 폐하께서 늘 자랑하시던 것인데, 그것이 참이었군요? 그 옛날에 뵈었던 걸 기억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은 그리 한껏 낮춰도, 황제파의 수장인 아우렌바흐의 큰 마님에게서는 기품과 너그러움이 듬뿍 배어 나왔다.
“그래, 그쪽이.”
“예, 이 아이가 제 손주인 레오폴트입니다. 전하께서 탄신하신 해에 태어났지요. 아이가 미욱하오니 전하께서 부디 많이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이름까지 듣고 나니…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이 감격을 외치고 싶었다.
‘여러분, 저 인생작 남주 실물로 영접했어요!’
7년 차 황녀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며 속으로만 외쳐 보았지만.
“오히려 귀한 손주를 말동무로 붙여주어서 내가 감사해야지. 궁에 또래의 벗이 없어 적적했는데 퍽 고마운 일이야.”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황송할 따름이죠. 얘, 레오. 인사드리려무나.”
공작 부인이 길을 내주듯 비켜서며 하는 말에, 그녀의 치맛자락을 슬며시 쥐고 있던 레오폴트의 눈동자가 이지러졌다.
‘…우나?’
애가 모자랄 리는 없고. 낯을 심하게 가리나?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살피니, 그 시선이 내 뒤편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차. 앤디랑 제이크인가, 오늘.’
이제 내게는 너무 공기 같은 일이라서 그만.
내 뒤에 서 있을 호위 기사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니 일곱 살 어린이에게 위압감을 안 주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에고, 나야 알맹이가 어른이라 괜찮아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최선을 다해 방긋 웃어주었다.
“아, 저….”
내 미소를 어찌 해석했는지, 레오폴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활자 남주가 3D, 아니 4D로 움직이는 것에 나는 숨을 죽였다.
“아우렌바흐의 레오폴트가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레오폴트가 짤따란 팔을 굽혀서 조막만 한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이자, 내 눈에 들어오는 솜사탕 같은 머리통.
‘아, 너무 귀여워!’
가슴이 벅차오르고 광대가 움찔움찔했다.
‘내가 예법 연습할 때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꺅꺅대던 게, 바로 이런 마음에서였을까? 유난이라고 타박했던 게 미안해지네.’
나는 그런 마음은 황녀의 위엄으로 잘 감춰두고서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여, 영광입니다….”
기어들어 가는 레오폴트의 목소리에, 공작 부인이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래, 전생에도 저 나이 때 기죽어 있는 애들 많이 봤지.
뭐, 인생은 사춘기 이후부터니 잘 커서 ‘공제눈’ 속 멋진 공자님 되면 그만인 것.
“그럼, 저는 황후 폐하를 뵈러 가 보겠습니다. 레오, 전하께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해 드리려무나.”
“네, 할머니.”
“걱정 말고 가 보게.”
레오폴트가 제 할머니에게 배꼽 인사를 하고는, 처분을 기다리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여전히 초점 없이 흔들리는 게, 퍽 긴장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재미있는 얘기는 내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따라오렴.”
나는 팬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며 앞장섰다.
“전하, 무슨 일 있으시면 꼭 설렁줄 당기셔야 해요?”
“얼음 모자라면 이야기하시고요.”
“주전자 뜨거우니까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하고요.”
“이따 저녁에 식사하셔야 하니 쿠키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어. 얼른 나가들 봐.”
부산 떠는 메리제인과 패티샤에게 나는 눈을 흘겼다.
그녀들은 그것마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입을 틀어막으며 뒷걸음쳐 놀이방을 빠져나갔다.
‘아, 저 주책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서 티 테이블 쪽을 돌아보니, 레오폴트가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침 흐를 것 같은데. 그마저도 사랑스럽겠지만.’
뽀얀 살결에 고슬고슬한 금발, 그리고 봄날의 풀잎처럼 따뜻한 녹색의 눈동자.
‘보기 좋다, 온미남의 어린 시절.’
나는 마음속으로 아까 시녀들이 나가며 짓던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차, 이러면 안 되지.’
나는 황녀 전하의 위엄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표정을 수습하고 목을 길게 뺐다.
…그 위엄이 내 몸으로 잘 살지는 않았지만.
내가 티 테이블 쪽으로 돌아와 제 맞은편에 앉자 레오폴트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시녀들과 사이가 좋으시네요.”
“뭐, 그런 셈이지.”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속에 든 게 나지만 몸뚱이가 일곱 살짜리여서야, 한숨도 참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우리 시녀들이 나 갖고 인형 놀이 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차, 혹시 황녀가 하기엔 부적절한 언사이려나?
걱정스러워 맞은편의 꼬마 신사를 보니, 레오폴트는 여전히 입을 헤벌린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보 같은 표정만 짓는데도 애가 예쁘니 답답하지를 않았다.
‘하긴, 남주인데 어린 시절부터 저렇게 예뻐야겠지.’
레오폴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나는 어색한 마음에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뭘 그렇게 쳐다보니?”
“소, 송구합니다.”
“오는 길은 괜찮았니?”
“네, 마차를 타고 이렇게 멀리 온 건 처음이었지만요.”
“얼마나 걸렸어?”
“한 시간 정도요….”
“멀미 안 했어?”
“네, 다행히도요.”
…자꾸 질문만 하자니 왠지 망한 소개팅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느낌이 들었다.
레오폴트가 아직 어려서 말주변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공부는 어떤 걸 배우고 있니?”
“요즘은….”
자포자기하듯 던진 질문에, 레오폴트의 낯빛이 달라졌다. 눈동자도 초롱초롱.
“초기 신성 시대의 군주론을 읽고 있어요. 알티스의 기하학을 읽고 싶었는데, 부모님께서 수학만 공부하면 안 되고 골고루 익혀야 한다고….”
히익, 레오폴트가 주워섬기는 책 제목을 들으며 나는 목덜미가 쭈뼛해지는 것 같았다.
‘아카데미에서 쓰는 책들인데.’
어리숙해 보여서 아직인 줄 알았더니 벌써 공부는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훗날 문재로도 칭송받을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동시대인이 되고 나니 그의 비범함이 새삼 실감이 났다.
‘와중에 신성력도 많고 무술에도 재능이 있어서 나중에 성기사단에 입단하고 말이야.’
물론 나보다는 학습 진도가 느렸지만, 나야 전생의 기억도 있고 어른의 끈기가 있지 않던가.
그런 걸 생각하면 인생 1회차일 레오폴트는 애초에 카테고리가 다른 주인공감이었던 것이다.
‘조금 얄밉네.’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앞의 레오폴트를 쳐다보니, 고개를 갸웃하며 헤실헤실 웃는다.
사랑스럽긴 한데…. 아무리 일곱 살이라지만 공작가의 후계자가 저렇게 맹해도 되는 걸까.
“무슨 과목을 제일 좋아해? 역시 수학?”
“네. 숫자는 배신하지 않아서 좋아요.”
나는 평범한 ‘수포자’의 경력을 반영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레오폴트가 급하게 덧붙였다.
“저, 전하께서는요?”
그래. 자고로 사람은 질문을 잘 던져야 한단다. 네 첫 대사도 ‘괜찮으신가요?’일 예정이거든.
“나는 역사가 제일 좋아. 언젠가 돌아오지 않는 바다에 답사 가는 게 꿈이야.”
“돌아오지 않는 바다요? 그럼 전하께서도 성기사단에….”
“굳이 그럴 필요 있니? 내 언니가 성기사단장이 될 건데.”
“그렇죠. 대단하세요, 전하께서는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발갛게 물든다.
‘설마, 나한테 반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냥 당황한 거겠지?’
네 첫사랑은 아멜리로 정해져 있는데 말이야.
순간 전생에서 읽었던, 빙의자로 인해 러브 라인이 바뀐 수많은 소설이 떠올랐다.
‘곤란한데.’
나는 그냥 최애 소설 속 커플이 꽁냥대는 모습을 특등석에서 관람하고 싶을 뿐이니까.
미미한 불안함을 걷어내고자, 보들보들한 미간을 좁히며 나는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내 얼굴에 반한 거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