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어린 남주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1)
“이 악마의 자식 같으니!”
또, 그 꿈이다.
나는 익숙한 폭언에 진저리를 치며 눈을 깜빡여 어둠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쥐새끼같이 기어 나와서 무슨 불운을 묻히려고!”
“아, 아니에요…. 그냥 배고파서….”
“악마의 자식이라 역시 탐욕에 찌들었구나! 꼬박꼬박 챙겨주는 끼니로는 부족한 게지, 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남은 빵 쪼가리 버리듯 주는 것도 챙기는 거라면 챙기는 걸까….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어둠 속의 현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는 손에 쥐는 것을 아무거나 던지기 시작했다.
다만 그 방에는 세간이랄 것이 없어 마른 호밀빵, 썩은 지 한참인 사과, 언제 세탁되었는지 알 수 없는 베개, 낡은 책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날았다.
“저 더러운 것을 어쩌다 내 집에 들여서!”
제대로 맞지도 않는 물건들보다 남자가 내뱉는 말이, 무엇보다 아플 거였다.
아이는, 아기 때부터 칭얼대는 일이 없던 그 아이는 그저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서 발발 떨 뿐이었다.
씨익, 씩. 화풀이하듯 손에 쥐는 것은 모두 내던진 남자는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목소리로 들었을 때 30대 정도일까. 변변한 촛대조차 없어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촛대가 있었으면 그것도 집어 던졌을 테니 차라리 다행인가.’
“죄, 죄송합니다, 가주님….”
가주라 칭하는 것과 달리 이 아이가 하인으로 들어와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아이 혼자서 이 방을 쓰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그 방이라는 것이 창문도 매우 작아 달빛조차 희미하게 드는 아주 좁고 초라한 것이란 게 문제였다.
마치 내가 전생에 살던 반지하 방처럼….
“다시 또 함부로 밖에 나다니다가는 이 정도론 안 끝날 줄 알아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이는 계속 웅크린 채, 연신 죄송하단 말만 읊조렸다.
나는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 아이의 실루엣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쿵쿵, 남자가 화난 발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등신, 꼴좋다. 믿었냐, 아버지가 널 남들에게 소개한다고?”
남자가 나간 길로 그 문가에 들어선 소년이 비아냥댔다. 복도에서 들어오는 불빛을 등지고 있어서 그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외관으로 봐서는 한 열둘, 열셋…?
아카데미에 곧 들어가는 나이대의 아이들처럼 보였다.
“헛꿈 꾸지 마. 그 불길한 눈깔도 깔고.”
퉤, 저 어린놈이 어디서 배운 건지 침 뱉는 소리를 내더니, 나무로 된 방문을 한번 쾅 걷어찼다.
끼이익….
남자애가 떠나간 자리에서 나무로 된 문의 경첩이 아이를 대신해 우는 것 같았다.
‘이게 벌써 몇 번째야?’
꿈에서 아이를 만나게 될 때면, 그는 늘 고압적인 저 부자의 폭언을 듣고 있었다.
‘차라리 말 못하고 못 걸어 다닐 때 방치하던 게 나아 보일 정도야.’
에리나 경이 전사하고 얼마 뒤, 아기는 이 저택으로 옮겨져 있었다.
유아 시절에는 늘 혼자였는데, 작년쯤부터는 계속 이 모양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멍하니 아이를 쳐다보았다.
문이 어렴풋이 닫히는 소리에 아이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그 빨간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후두둑, 뺨을 타고 눈물이 방울졌지만, 아이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자작.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뭘까요, 전하?”
벌써 3년이 넘도록 진행되고 있는 렌틸 자작과의 수업.
렌틸 자작은 내가 통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안 사람처럼, 탁, 소리 내어 양장으로 된 교재를 덮었다.
내 호기심에 굴할 수밖에 없다는 양 도리질하는 걸 보며, 나는 렌틸 자작이 내 질문을 기대하고 있음을 읽었다.
“붉은색 눈동자는 좀 특이한 건가요?”
“빨간 눈…. 말씀이신가요?”
“응.”
“빨간 눈을 한 자를 마주치셨나요?”
“…그건 아닌데.”
거짓말은 아니지, 실제로 마주친 건 아니니까.
자작의 긴장한 듯한 반응에 나는 고개를 한번 갸웃해 보였다. 양 갈래로 묶은 짤따란 머리칼이 어깨 즈음에서 대롱거렸다.
“책에서 보셨어요?”
“아니, 그냥…. 얼핏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서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은 건 아니고 본 거지만. 꿈속에서.’
내가 황궁을 벗어날 수 없는 탓에 그 표본이 적었지만, 나는 지금껏 그 아이처럼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메리는 푸른색, 패티샤는 검은색, 유모는 갈색의 눈동자.
가끔 오는 손님들을 봐도 보라색 눈동자까지는 있었지만, 붉은색 눈동자는 보지 못했다.
“황궁에서도 그런 발언을 하는 이들이 있나….”
한숨 같은 말을 내뱉은 자작은, 손에 들고 있던 교재를 내려두고는 안경을 벗었다.
자작의 호박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오늘은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볼까요? 제가 황태자 전하께 올린 수업 계획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거여서 전하와 저 둘만의 비밀로 하면 좋겠는데요.”
“당연한 소리를요!”
나는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내 책을 덮었다.
레베카 때부터 황실 직계들의 교육을 담당해온 렌틸 자작은 학자의 탑에서 평생을 공부한 이였다.
와중에 어디 고위 귀족가 출신이라는지, 예법과 사교계의 지형에 관해서도 굉장히 식견이 넓었다.
그건 글로 배워서 알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나는 자작이 스쳐 지나가듯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이 세계의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했다.
“아수라마수라에는 해묵은 편견이 몇 가지 있어요. 본(本)대륙의 패권을 쥔 나라가 고작 이런 수준이라는 게 부끄러운 일이지만요.”
그리고… 이런 파격적인 언사가 민주주의 사회를 살다 온 내게 즐겁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자작이 말하는 ‘아수라마수라’는 제국과 이 세계를 일컫는 것일 터.
황실 직계 앞에서 아낌없이 제국을 비판하는 걸 듣다 보면 인류와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걸로는 황실파와 귀족파의 반목. 제국이 성립된 게 벌써 500년이 다 돼가는데 그때의 파벌이 지금까지 내려오며 서로를 배척하는 게 참 우습지 않나요?”
“…그러네요.”
나는 ‘공제눈’의 주요 갈등 축이 되었던 황실파와 귀족파 간의 갈등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자 주인공 레오폴트가 황실파의 수장 가문의 후계자인 반면, 서브 남주이자 여주에게 집착하는 흑막 루시페우스는 귀족파의 해결사였다.
그래서 루시페우스의 협잡질이 ‘공제눈’에 치밀하게 깔릴 고구마밭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악녀’ 스칼렛은 귀족파의 일원인지라 연모하는 레오폴트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대신, 여자 주인공 아멜리만 괴롭힌다.
그리고 레오폴트의 가문이 대대로 황실에 깊이 충성해온 덕에….
‘그러고 보니 레오폴트랑 나는 언제쯤 말동무가 되려나?’
그 덕에, 내가 그를 친구로 영접할 기회도 있을 예정이었다.
‘황실파가 아니었으면 이 과보호 황실이 내 말벗으로 들일 리도 없으니까.’
남주랑 친구라니…! 나는 갑작스레 설레는 마음을 진정하고서, 이어지는 렌틸 자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방 귀족과 중앙 귀족에 대한 차별도 있고, 아무리 신성력이 강대해도 귀족 출신이 아니면 대신관이 되기 힘든 병폐도 있고요.”
그렇지. 아멜리가 산간벽지 출신이어서 같은 귀족인데도 따돌림당하니까.
“역대 황제 중 여성이 세 분 계시고 그레이스 전하께서 황태자로 책봉되시면서 분위기가 또 바뀌었지만, 여자는 가주 후보조차 못 되는 가문도 많고…. 빨간 눈에 관한 것도 이런 차별 중 하나랍니다.”
“빨간 눈이라고 하나요?”
“예전엔 악마의 눈이니, 저주의 눈동자라느니 했던 게 순화된 거랍니다. 전하께서 10세 연을 치르시고 황궁 밖에 다니시면서 더 많은 이들을 만나셔도… 빨간 눈은 보실 수 없으실 거예요.”
“그 정도예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관해 말씀드린 것은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수년 전, 그곳에 주둔했던 성기사단이 참패하여 그레이스가 교단의 사제들과 남은 성기사단을 이끌고 지원 가야만 했던 바로 그 전장.
그 아이가 기사였던 엄마를 잃었을 바로 그곳….
이는 진짜 바다가 아니라 마계의 입구를 칭하는 말이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초대 황제가 마계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경계는 온전히 봉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세기에 두어 번씩 그 입구가 열리는 때가 생겼다.
두 개의 달이 이 행성과 태양과 일직선이 되어 이중 일식이 생기는 때 일어나는 그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이라고 불렀다.
격랑 때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통해 마수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몇 년 전의 그 전장이 바로 그 일이었다.
“사람들은 거기를 통해 마족이 드나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족과 사통한 이들에게서 빨간 눈이 난다고요.”
아, 그래서…. 나는 꿈속에서 아이를 두고 그 부자가 악마의 자식이라 부르던 것을 떠올렸다.
“마족의 출입이 확인된 바도 없고, 학자의 탑에서는 붉은색의 눈동자를 일종의 돌연변이로 판단하지만…. 아무래도 희귀한 것은 신성시되거나 멸시받으니까요. 무엇이 되었건 인간 취급과는 거리가 멀죠.”
그 아이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주둔지에서 태어났으니 더더욱 그리 취급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어른의 사고로도 쫓아가기 힘든 자작의 이야기를 열심히 머릿속에 쑤셔 박으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황실의 유전자가 열심히 일한 세실리아의 두뇌.’
덕분에 이 무거운 이야기도 여섯 살배기의 머리가 지끈거릴 일 없이 소화할 수 있었으리라.
‘빨간 눈에 대한 이야기는 원작에 전혀 나와 있지 않아서 몰랐어.’
나는 원작의 ‘TMI’를 알게 된 것만 같은 뿌듯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렌틸 자작도 혹시 가문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 학자의 탑에 간 걸까?’
렌틸 자작은 그 작위를 황실 직계 전담 교사가 되면서 받았다고 했으니까….
내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는 것을 본 렌틸 자작이 안경 너머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 급진적인 사고를 쏟아내는 그녀는, 나를 제자로서 아낄 수밖에 없었다.
“세실, 내일 네게 손님이 찾아올 거란다.”
어느덧 미운 일곱 살이 아닌 사랑스러운 일곱 살이 된 어느 날.
나는 기다리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제 손님요?”
“그래. 이 어미가 세실에게 또래 친구를 만들어 주기로 했거든.”
“제게도 친구가 생기는 건가요?”
친구라면,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인가…!
그간 만난 외부 손님이라 봐야 어머니의 손님 정도였던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서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세실의 친구라면, 그렇다면!
“황성 바로 북쪽에 영지를 가진 아우렌바흐 공작의 손자인데, 마침 세실과 동갑이라지 뭐니.”
그래, 이거였어!
바로 ‘공제눈’의 남자 주인공인 레오폴트를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드디어 ‘공제눈’의 세계가 슬슬 시동을 거는구나.’
최애 소설 속 남주를 만날 날을 내가 얼마나 기다렸던가.
물론 나도, 내 가족들도, 심지어 레오폴트의 상관으로 종종 등장하던 내 둘째 언니 로젤리아도 모두 원작의 등장인물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주인공을 만나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니까.
‘언젠가 친구가 되리라 믿고 기다리던 세월이 얼마야, 정말.’
세실리아로서 7년 산 나는 본심을 한껏 담아 눈을 반짝였다.
“너무 기대되어요!”
드디어 내일, 나는 계 탄 덕후가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