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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7화 (7/220)

7화. 아수라마수라의 막내 황녀가 되었습니다 (6)

“…세실?”

“안 된다고?”

모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포크를 쥔 손에 힘을 꾸욱 주며 떼로록, 눈동자를 굴렸다.

‘나도 모르게 그만.’

어린애가 내지른 감탄사로 오해받도록 놔둘까?

‘아냐, 그러면 앞으로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어.’

말귀 다 알아듣는 내 말이 아기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게, 어른의 이성으로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래, 이 김에 영재 콘셉트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나도 괜한 연기할 필요 없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해 보기로 했다.

같은 아기라도 똘똘한 아기가 더 사랑스럽지 않겠어?

그간 그들이 내게 보여준 애정과 신뢰에 기대어 모험을 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신성력이 없으니까, 뭐라도 셀링 포인트를 잡아야지.

“그거 타버리에오. 차! 벌!”

“…차별?”

그레이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내 말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기사 수가 마니 쭈렀자나오.”

“…그렇지, 이번 전장에서 성기사단의 반수 이상을 잃었다.”

여전히 멍한 듯한 그레이스의 얼굴…. 아기로만 여겼던 제 막냇동생이 생각다운 생각을 말하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할 터였다.

“…맙소사, 세실.”

어머니, 죄송해요. 저도 제가 이런 식으로 어른의 사고를 하는 걸 티 낼 생각은 없었답니다….

“미둠 해보캐아 대오.”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나는 말을 보태는 대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더 길게 말하고 싶지만, 이 둔한 말소리를 구체적으로 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수치스러웠다.

‘어른들이 알아서 이해하겠지.’

전생에서 현대를 살다 온 내겐 전사자를 귀족과 비귀족으로 나누는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물며 평민이나 천민에게는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전생에 서민이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귀족이 아닌 이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우가 안 도으먼 기다단 해복 안 대오.”

“대우가 안 좋으면… 기사단이 회복되지 않는다라.”

그레이스가 내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이번 격랑으로 성기사단의 반 이상을 잃은 만큼 충원해야 하는데…. 전사자 대우에 차별이 있으면 신성력이 있다 해도 기사단에 지원하지 않을 수 있겠네요.”

“…용병 일만 해도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을 테니까. 기사단에서 차별을 받느니 말이야.”

그제야 조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어머니가 그레이스의 말을 받았다.

휴우, 적당히 내 이야기가 통한 모양이다.

‘이 정도면, 쓸모 있는 세실로 여겨질 수 있을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긴 채, 유아의 외관에 걸맞게끔 내 앞의 과일 조각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런 내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그레이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세실이 많이 컸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맘때 아이들은 쑥쑥 크기는 하니까…. 그런데 정말….”

“예, 정말….”

두 사람의 눈동자가 내게 붙박이는 것이 느껴졌다.

오물대던 망고 조각을 삼킨 나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뒤집기 할 때부터 세실이 남다른 것은 알았지만….”

“그렇죠, 우리 세실은 옹알이부터 얼마나 논리적이었는데요….”

“역시, 세실이 특별한 건….”

“예, 다 신의 안배였나 봅니다.”

“그래, 이토록 영리한데 신성력까지 많았다면 이 작은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이었을 게야.”

“제 자리도 위태로웠으려나요.”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아무튼 성공했나 봐!’

이어지는 어머니와 그레이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안도감에 젖었다.

어른의 사고를 하는 걸 알리기도 하고, 쓸모 있는 세실로 보이기도 하고. 일석이조였다.

‘…그럼 그 기사의 시신은 어떻게 됐을까? 어쨌든 안식을 취하면 좋겠다. 아기도 키워줄 가족을 찾고….’

“세실, 오늘도 천사 같구나.”

“오야바니, 오셔쑴니까.”

“오늘 글공부는 재미있게 했니?”

“예, 오눌 넨틸 자작이 고대 앙국들에 대해 알러 두어써요.”

“재미는 있었고?”

“예, 고대부터 북대둑이랑 무억을 해 온 앙상이 흥미로어써요.”

“렌틸 자작이 너에게도 좋은 스승이라니 다행이구나.”

한껏 광대가 올라간 테오도르가 내 볼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나도 어느덧 네 살이 되었다.

아기의 시간은 어른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른다지만, 전생 현생 도합 서른 언저리인 내게는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날 나의 모험은 예상외의 수확을 거뒀다.

세 번째 생일도 되기 전에 그레이스의 주청으로 내게 교사가 붙은 것이었다.

“제가 밤마다 책을 읽어 주었는데 어려운 내용도 곧잘 이해하더군요. 세실은 장차 제 정권에서 일할 인재이니 어려서부터 잘 키우고 싶습니다.”

“허허, 황태자 네가 벌써 이 아비를 상황으로 추대하는구나?”

말은 그리해도 아버지는 꽤나 기꺼워하며, 곧바로 레베카와 테오도르를 가르쳤던 학자의 탑 출신 학자, 렌틸 자작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나와 처음 대면했을 때 렌틸 자작이 얼마나 황당한 표정이었는지.’

나는 1세 유아의 문지기를 맡게 된 내 여덟 명의 호위 기사들에게 느꼈던 것과 꼭 같은 마음을 렌틸 자작에게 느꼈다.

그러니까, 황실의 팔불출에 휘말린 그들에 대한 미안함 말이다.

레베카와 테오도르는 다섯 살은 되어서야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나랑 대화가 통한다는 걸 알고는 곧 적극적으로 나오긴 했어.’

렌틸 자작은 대륙 최고의 상아탑인 학자의 탑 출신답게도, 편견 없이 나를 제자로 대했다.

내가 신성력이 없는 대신 정말로 다른 건 다 잘하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하기까지 했으니 날로 렌틸 자작의 보람은 늘어만 갔다.

‘이제는 황실 예법도 익히기 시작했고….’

내가 환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어른의 사고를 한다는 것은 황녀로 사는 데 명백히 도움이 되었다.

그토록 많은 공부를 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 할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전생에서 내 나이 또래였다면 ‘만화로 읽는’ 뭐시깽이조차 몇 분도 집중 못 했을 건데 말이야.’

그러니까, 황녀로서의 삶에 걸맞게도 나는 벌써부터 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황실의 우월한 유전자 덕에 세실리아의 지능이 좋은 것도 한몫했지.’

덕분에 나는 신성력은 없어도 황실의 사랑을 담뿍 받는, 의젓하고 똘똘한 네 살 어린이로 자라났다.

엄마 밉고 언니 밉고 다 미울 나이에 과보호의 상징인 쓰디쓴 보약도 꼬박꼬박 잘 먹고 말이다.

“테오, 넌 세실 나이 때 문자도 다 못 뗐어. 묻어가려고 하지 마.”

“세실이 너무 영특한 것 아니겠습니까. 누님은 매번 제게만.”

“쉬이, 세실 낮잠 잘 시간이란다.”

여느 때처럼 레베카와 테오도르가 투덕대고 있을 때. 내 눈에 졸음이 차오르는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나를 침대로 안아 옮겼다.

내가 물려받은 것과 닮은 풀빛의 눈동자에서는 오늘도 사랑이 넘쳐흘렀다.

“세실,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 폭 자고 일어나면 주방장이 네가 좋아하는 오리 다리 콩피를 해둘 거란다.”

“와아, 오니 꽁피….”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어지며 눈을 빛낸 모양이다.

어머니가 만곡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나를 당신 팔을 베게 하여 누인 뒤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 효율 낮은 유아의 신체로 열심히 머리 쓰며 공부했더니 눕자마자 잠이 솔솔 쏟아졌다.

“잘 자거라, 나의 사랑하는 아가….”

귓가에 나긋나긋 맴도는 어머니의 자장가.

부드럽게 내 어깨를 도닥이는 규칙적인 흔들림에 나는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엄마 손길 이런 거였구나. 따뜻해….

황실 식구들이 세실리아를 사랑한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긴 뉴턴 없지만.

‘나중에 내가 주창해볼까.’

부모님은 물론이요, 형제들도 시녀들도 모두 내가 뭐만 해도 어화둥둥이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세실리아가 ‘공제눈’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요, 요정… 같은 외모를 지닌 게 결정적이었을 거다.

‘굳이 영재 콘셉트를 잡지 않아도 됐던 것 아닐까?’

말이야 말이지, 정말…. 내가 봐도 ‘어린이’의 범주에 들어선 세실리아의 외모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부모님의 아름다운 구석들만 쏙 빼닮아, 정말이지 세상 그 누구도 두 번은 뒤돌아볼 미모였다.

쏟아질 것 같은 녹금안과 새우 맛 과자도 아닌데 자꾸만 손이 간다는 말랑말랑한 볼살은 요즘 황궁의 특산물 수준이었다.

‘전생에서 이 얼굴로 태어났으면 관찰 예능 찍어서 전 국민 랜선 조카 됐을 거야.’

그러니까 나는 그냥 조숙하고, 예쁜 막둥이로 무해하게 자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이따금 전생에서부터 비롯된 불안함이 치밀 때면, 나는 어려운 책을 꾸역꾸역 읽고 더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역변하지 않고 다른 거 다 잘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세실은 나중에 크면 뭐가 되고 싶으니?”

그레이스의 주재로 펼쳐진 형제들의 만찬. 상석에 앉은 그레이스가 내게 물었다.

그레이스는 지난해 혼인하면서 남편인 에델 공과 함께 황태자의 가족을 위한 석류궁으로 옮겼다. 그 뒤로 한 달에 한 번씩 우리들을 석류궁 만찬에 초대해 형제들과의 시간을 챙겼다.

스물셋의 그레이스는 이제 누가 봐도 황제가 될 상이었다.

청금색 눈동자는 늘 날카롭게 빛났고, 이제는 쉬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 얼굴에는 근엄함마저 자리하고 있었다.

기품을 인간으로 표현한다면 저런 느낌이리라.

그레이스가 내게 보이는 기대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아기 의자에 앉은 나는 괜히 다리를 대롱거리며 답했다.

“북해의 해적두룰 소탕하눈 데독이 대고 싶어요.”

그저, 오늘 렌틸 자작과의 수업 시간에 북대륙과의 무역에 대해 들었기에 아무렇게나 한 대답이었건만.

그걸 들은 내 형제들은 잠시 고장 난 듯,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이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을까.

“그, 군인이 되겠다고?”

그레이스가 간신히 침묵을 깼다.

“세실은 영특하니 이 언니의 재상이 되면 좋을 텐데.”

“군에 들어오지 않아도 해적을 소탕할 방법은 많다.”

“해적들에게 피해를 입은 북해 영지민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방법도 있어.”

“아니면 오라비랑 북해 지방을 위한 자선 재단을 꾸리면 어떨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의 희망 진로에 숟가락을 얹기 시작한 내 형제들.

아, 신성력 없는 내겐 전투력 또한 없는 것이니 이 난리였다.

레베카가 잘게 잘라준 고기 조각을 꼭꼭 씹던 나는 눈을 데로록 굴렸다.

“저눈 구낭 언니 던하께 도움이 대고 시퍼서….”

내가 울망울망한 눈으로 입술과 손가락을 꿈지럭대며 말하자, 내 형제들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마치 내가 애교로 조련이라도 한 것 같은걸? 그런 걸 하지 않아도 내 가족들은 이미 세실리아에게 빠져 있었지만.

근본 없는 귀여운 척을 해도 다 받아준다는 것은 꽤나 중독적이어서, 이따금 나는 마음껏 아이처럼 굴었다.

역시 이건 다 세실리아가 요정같이 생긴 덕분이다.

사랑스러운 외모가 이렇게 편리한 거였나.

그리고 나는 이걸 전생 이십여 년 동안 모르고 살았나.

‘그래서 내가….’

음, 해묵은 우울함이 올라오는군.

이곳엔 나의 슬픔을 집어삼킬 것 같던 넓디넓은 강도, 나를 뺀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떠들던 강변 공원도 없는데.

왠지 디저트 맛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세실, 오늘 디저트는 특별히 네가 좋아하는 브라우니로 주문했단다.”

“와! 부다우니!”

스읍, 디저트 맛이 떨어질 리가.

“위에 시럽이 뜨거우니 조심해서 먹거라.”

“예!”

이럴 땐 현생 가족 테라피가 약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고개를 들어 활짝 웃어 보이자, 마주 웃어주는 그레이스의 미소가 참 멋있었다.

‘그래. 영재 콘셉트 꽉 잡아서 절대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이 과분한 사랑, 놓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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