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수라마수라의 막내 황녀가 되었습니다 (5)
어른의 이성 덕분에 말이나 생활 습관을 빨리 익혔지만, 정말 갈 길이 멀었다.
발음도 절망적이었고, 연약한 유아의 신체로는 요의도 배고픔도 오래 참기가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편견이었다.
내가 아무리 조숙하게 굴어 봤자 두 돌도 안 된 아이의 언행은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나이 먹기만 해봐, 다들.’
내가 어리다고 무시했던 사람들 다 말로 이겨 먹을 거야! 그레이스 언니처럼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러고 보니 벌써 그레이스가 떠난 지 두 달이 됐구나.’
내가 태어난 해에 황태자로 책봉된 큰언니 그레이스는, 아버지의 정무를 나눠 받게 되어서 다른 형제들에 비해 나와 보낸 시간이 적은 편이었다.
와중에 이번에는 오랫동안 출정해야만 했고.
“이번 전장, 정말 살벌했다고 하지?”
“역사상 이렇게 중앙에서 추가 지원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던데.”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가시니 바로 진압됐잖아?”
그에 대해 내게 자세히 설명해주는 이는 없었지만, 이처럼 나를 앞에 두고 유모나 시녀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큰 전쟁이 났는데 예상외로 난전이어서 병력을 보태러 갔댔지.’
그레이스의 신성력은 역대 어느 황제들에 대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라 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 애는 괜찮으려나…?’
패티샤의 손길에 내 머리칼을 내맡긴 채, 나는 꿈에 보았던 그 아이를 떠올렸다.
기사인 제 엄마의 품에 안겨 있던 하얗고 까맣고 빨갰던 그 아이를.
그 아이는, 그 이후로 종종 내 꿈에 나왔다.
‘벌써 반년째네.’
그때마다 막사에서 제 어머니와 함께, 혹은 저 혼자서 누워 빨간 눈동자를 데로록 굴리고 있는 그 아이.
‘기이할 정도로 울지를 않았지.’
그 아기는 강보에 싸여 있으면 싸여 있는 대로, 제 어미가 멀리 기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두었다면 그리해둔 대로 늘 제자리에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레이스가 황성을 떠나기 전날이었어.’
꿈속의 풍경은 현격히 달라져 있었다.
막사 안에 병사들이 들락거리는 가운데, 침상에는 기사 혼자 누워 있었다.
가슴과 배, 허벅다리를 가로지른 서너 군데의 자상에서 피를 끊임없이 흘리고 있는 그녀는, 그래, 틀림없이 빈사 상태였다.
심지어 배에 난 상처 사이로는….
‘우욱.’
꿈속이었지만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기는 어딨지? 이런 거 보면 안 되는데….’
아기는, 책상으로 쓰이던 간이용 탁자 위에 뉘어 있었다.
‘이젠 다들 아기의 존재를 알게 됐구나.’
병사 하나가 아기를 지키듯이 서 있었지만, 막사 안의 그 누구도 아기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경,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남은 기사단이 모두 황성을 출발했다고 합니다.”
“신관들도 오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수하로 짐작되는 병사 몇몇이 그녀를 둘러싸고 안타까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도 다들 어디 한 군데씩 다쳐서 몸 성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비교적 멀쩡한 기사들이 저들의 신성력을 불어넣으려는 듯 그녀에게 손을 대고 있었지만, 그 피는 조금도 멎어들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목소리의 건조함에서… 나는 그 누구도 기사의 생존을 점치고 있지 않음을 확신했다.
“애앵….”
절망에 빠진 무거운 공기 아래서 아기가 처연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 빨간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막사 안의 그 누구도 아기를 돌아보지 않았다.
곁에 서 있던 병사가 아이를 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토닥일 뿐이었다.
나는, 세실의 고사리손이라도 뻗어서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물리적으로 닿을 수도, 실제로 아기의 머리칼을 쓸어 넘길 수도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아기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풍경이 필시 그레이스가 이번에 다녀온 그 전장과 연관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도대체 왜 내가 그 아이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꿈을 꾸고 바로 이튿날 그레이스가 교단의 사제들과 함께 출정했으니 말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면 곧 격랑을 잠재울 수 있겠지?”
“고위급 신관들도 많이 온댔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무엇보다 꿈속에서 병사들끼리 주고받던 말들이, 현실의 상황과 흡사했고.
‘그 기사가 결국 죽었다면, 그 아기는 어떻게 될까.’
나는 눈물에 이지러지던 아이의 빨간 눈동자를 종종 떠올렸다.
내가 그레이스를 만나게 된 것은 그날 밤 어머니의 응접실에서였다.
그레이스의 출정 전까지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지만, 승전은 승전이어서인지 작은 개선 연회가 치러지고 난 뒤의 늦은 밤이었다.
‘남은 자들은 나름대로 서로서로 북돋워서 살아가긴 해야 하니까, 격려 차원의 연회였겠지….’
열 살이 되기까지 공식 석상에 나가지 못하는 황실의 보호 조치 때문에 나는 연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연회가 마치고서야 그레이스와 오랜만에 상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실, 이 언니를 알아보겠니?”
“쿤언니! 오댄만이에오.”
“아이고, 말도 부쩍 늘고. 역시 우리 세실은 영특하구나.”
내가 양팔을 벌리며 하는 말에, 그레이스는 기꺼운 듯 팔을 뻗어 번쩍 나를 들어 올려주었다.
다른 형제들만큼 자주 보지 못해서인지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스무 살의 황태자, 큰언니 그레이스.
가르마를 치우치게 타 한쪽으로 늘어뜨린 매끈한 머리칼 아래로, 아버지를 닮아 시원하게 뻗은 콧대와 진한 눈썹이 그녀의 얼굴에 위엄을 돋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큰 고생을 하고 와서인지, 그 눈빛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한껏 깊어져 있었다.
원작에서 등장할 때마다 장면을 휘어잡았던 존재감이 인상적이어서, 나는 어린 시절의 그녀를 만나는 것을 퍽 좋아했다.
‘아직 여물지 않은 권력자를 보는 느낌이랄까, 히히.’
그레이스는 내 뺨에 깊이 입을 맞추고는,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응접탁자에 어머니와 그레이스를 위한 주안상이, 한쪽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내 앞 간이 탁자에 모듬 과일이 올라왔을 때였다.
“네게 고민되는 바가 있구나.”
막냇동생인 나를 보러 왔다지만, 가라앉은 낯으로 와인 잔만 만지작거리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어머니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격랑을 잠재우고 승전보를 올렸는데, 무엇이 그리 걱정인 것이니?”
“무고한 피를 너무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레이스는 승전 연회에서는 내보일 수 없었을 음울한 낯을 가리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어머니 앞이어서 가능했을 거였다.
‘아무리 후계자로 자라왔대도, 전장을 직접 겪은 건 꽤나 충격일 거니까.’
아직 스물하나고, 전생으로 쳐도 스물셋…. 나는 잘게 잘린 멜론을 포크째로 빨아 먹으며 그레이스의 낯을 살폈다.
“제가 조금이라도 더 판단이 빨랐더라면.”
“그레이스.”
어머니께서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너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네 아버지인 것을 잊었니?”
“그래도 아버지께서 제게 일정 권한을 이양해 주셨으니 말입니다.”
“네가 신관들과 함께 빠르게 움직인 덕에 추가 피해 없이 격랑을 잠재울 수 있었잖니.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뿐이야. 역사서에 기록하여 후세가 대비할 수 있게끔 하면 그저 비극만은 아닐 거다.”
“…….”
어머니의 단언에도 그레이스는 침통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우리 언니는 책임감도 크지.’
그레이스가 다녀온 전장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참전이 승기를 끌어왔다는 사실은 여기저기서 귀동냥하여 알 수 있었다.
“너는 어쨌든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거고, 네 동생들은 네 치세에 이바지하기 위해 각자의 길을 가고 있잖니.”
나는 어머니의 그 말에서 성기사단장이 될 로젤리아와, 사제가 되고 훗날 교황이 될 레베카를 떠올렸다.
황실의 마스코트로서 어린 나이부터 빈민 구휼 사업에 앞장서고 있는 테오도르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나름의 역할을 해야 할 텐데.’
신성력도 없는 내가 황실의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면, 뭔가 방안을 세워야 할 거였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는 굳은 결심을 내렸다.
“너는 너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황제가 무결한 자리라고 하지만 정말로 실책도, 흠결도 없는 사람은 아니야. 황실이 신의 선택을 받았대서 신인 건 아니잖니? 이 어미 같은 인간의 피도 섞이는 것을.”
성인인 그레이스와 거침없이 대화하는 어머니의 말소리에 내 어머니나 황후가 아닌 인간 테레지아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인기 여배우의 오프 더 레코드 인터뷰를 보는 듯한 마음으로 모녀를 바라보았다.
“이 어미 앞이니까 네가 그런 이야기도 하는 것을 안다. 폐하 앞에서 약한 소릴 낼 순 없을 테니까.”
“…….”
어머니의 그 말은, 짐작이라기보다 당부에 가까웠다.
나는 여전히 전장에서의 일을 곱씹는 듯한 그레이스의 얼굴을 흘끗대었다.
그레이스의 낯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조금 후련한 듯도 했다.
‘거기서 있었던 얘기 궁금한데. 정말로 그런 아기가 있었는지….’
하지만 그런 내 시선을 그레이스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줄곧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와인 잔에 슬쩍 입을 묻은 그레이스는, 뒤이어 다른 용건을 꺼냈다.
“제가 또 걱정하는 것은….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입니다.”
음, 이것 역시 기밀일 텐데.
어머니도 그렇고 형제들 모두 내가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해서인지, 이처럼 외부에 새어 나가면 곤란할 이야기들을 내 앞에서 곧잘 나누곤 했다.
“왜, 영광의 홀이 모자랄까 봐서?”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오래 열려 있었기 때문인지 전사자들의 시신이….”
그레이스의 눈빛이 슬쩍, 내 편을 향했다.
그걸 주의 깊게 듣고 있던 나는 야트막한 고민에 빠졌다.
알아들은 척을 해도 될지, 그렇다면 전사자의 시신이라는 구절에서 빽빽 울어야 할지….
‘꿈속에서 그 기사를 보긴 했지만, 그건 징그럽다기보다 숭고한 희생이었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 나의 표정을 두고 아직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그레이스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알아들어서 집중하는 건데. 그렇게 믿긴 어려운가 봐.’
내가 아기치고 한곳에 집중을 잘해서 다들 놀라곤 했으니까.
그레이스는 내처 말을 이었다.
“영광의 홀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한참 초과한 것도 문제는 문제지만…. 사실 시신을 다 수습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랬구나.”
“생존자보다 전사자가 더 많으니 어쩔 수 없었죠. 우선 귀족 출신인 기사들의 시신만 수습해 대신전으로 옮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전사자니….”
“네, 반드시 축성을 해야만 하니까요. 일찍 전사한 자들은 그… 마기에 오염돼서 축성하지 못하고 그곳에 매장했지만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는 원작에서 클라이맥스의 배경으로 쓰이는 곳이었다.
‘막연히 마물들과 뒤엉켜 싸우는 전장 정도로만 서술돼 있었는데, 이 세계에 자주 일어나는 일인 모양이지.’
어머니와 그레이스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사자의 시신을 대신전으로 옮겨와 축성하고 화장한 뒤에 일종의 납골당인 영광의 홀에 안치하는 게 전사자에 대한 최고 예우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은 불가피하게 평민, 천민 출신의 전사자는 수습하지 않고….”
“아 대!”
이야기를 듣던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