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아수라마수라의 막내 황녀가 되었습니다 (4)
마치 수순인 것처럼 나는 가벼운 감기를 앓았다.
“세례식 날에 꽃샘추위가 찾아왔었지요. 처음 바깥 걸음 하신 날이 하필 또 그래서 적응하기 어려우셨던 모양입니다.”
궁의는 그렇게 진단했지만, 한편으로 가족들을 실망시켰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이기도 한 것 같았다.
‘아기의 몸이라 같은 감기도 더 힘든가….’
몸이 단련되지 않아서인지 미열조차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나는 자꾸만 울었다.
고맙게도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다.
세례식이 끝난 직후여서 다양한 ‘세실 과보호 아이디어’가 실현되기도 전이었는데,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내가 앓아누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아직 대체로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제가 몸을 식혀줘도 그때뿐이고, 열이 내리지를 않아요.”
“이건 세실의 신성력이…. 아니다. 신성력이 있어도 세실처럼 어린 아기가 알아서 체력을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아가, 괜찮아. 곧 나을 거야. 이게 널 지켜줄 거야.”
오빠 테오도르가 제가 오랫동안 끼고 살았던 듯한 봉제 인형을 내 품에 안겨주었다. 당연히, 레베카가 신성력으로 간단한 정화를 마치고서였다.
“아가, 세실. 이 환을 한 입만 삼켜 보자. 우리 수련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보약이란다.”
“흐아앙…!”
“언니, 세실에겐 너무 쓴가 봐요.”
“누님, 이 초콜릿과 함께 녹여서 주면 어떨까요?”
로젤리아는 급기야 아기의 미뢰에는 신경 마비급인 무언가를 내게 먹이려고까지 했다.
신성력이 없다는 것도 충격인데 곧이어 내가 앓아눕기까지 하니, 가족들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정무를 보시는 틈틈이 아기방에 들러 내 상태를 살폈고, 형제들도 식사 시간을 쪼개어 나를 보러 왔다.
특히 레베카는 내 방에 상주하며 열을 내리기 위해 애썼다.
‘아플 때 누가 걱정해주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전생에 독립하고서 혼자 앓아누웠을 때의 서러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하긴, 독립하기 전에도 나보다 막내가 늘 더 아팠으니, 어렸을 때라고 다를 건 없었구나.’
이따금 애인이 있을 때면 그들이 종합 감기약이나 죽 따위를 사다 주었던 기억도 스쳤다.
그것이 애정보다는 의무가 될 때쯤이면 그들은 떠났지만, 그런 정이라도 필요해서였을까. 나는 어차피 실패할 연애를 자꾸 했었다.
그러고는 끝내….
‘아프니까 별생각이 다 나네. 이제는 다 지난 일인데.’
나도 모르게 또르르, 눈초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덕에 눈가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고, 세실….”
그걸 보는 가족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흩어졌다.
며칠 내내 나는 갓 태어난 때만큼 많이 자며, 혼몽한 시간을 보냈다. 잠에서 깨어도 아파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는 점이 그때와 달랐다.
잠에서 깨면 전생의 슬픈 추억이 스며들고, 잠들면 암전에 빠져 지내는 나날이 며칠을 반복됐을 때였다.
낯선 곳이었다.
사방이 천으로 둘러싸인 공간.
한쪽에는 간이 책상과 의자가, 또 한쪽에는 갑옷과 검 등 무구가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막사 같은 곳으로 보였다.
‘…뭐지? 꿈인가?’
내가 갑작스레 처한 상황에 당황할 때였다.
“그 소문이 진짤까?”
“뭐, 에리나 경?”
“쉬이, 들려.”
“뭐 어때. 지금도 틀어박혀 있으려나?”
수군수군. 막사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 중 하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크게 울렸다.
“어이, 에리나 경이 안에 있어?”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지시십니다.”
그에 답하는 목소리는 이 막사 바로 입구에서 났다. 보초병이 답한 모양이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목소리 낮춰.”
“에헤이, 뭐 어때. 아니면 아니라고 하겠지. 여기서 애를 낳은 게 말이나 돼?”
그렇게 멀어지는 목소리.
아, 그러면 여기가 에리나라는 기사의 막사 안인 건가?
꿈은 꿈인 듯한데, 기가 막히게도 생생했다.
타닥, 타닥, 모닥불에서 불꽃 튀는 소리가 났다.
“…후엥.”
“쉬이, 아가….”
어디선가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너무도 쉽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실리아의 몸으로 태어난 뒤로 아직 해보지 못한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막사에서 가장 어두운 쪽에 자리한 침대 위에 면직 튜닉을 입은 여성이 누워 있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에리나 경….’
아무렇게나 묶인 적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어깨며 몸에 근육이 탄탄했다. 그것만으로도 한눈에 그녀가 무예를 수련한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는, 강보에 싸인 아기가 안겨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밑으로 밀가루처럼 뽀얀 피부를 지닌 그 아기는, 햇살 아래 건강하게 그은 여자의 품 안에서 유독 하얗게 보였다.
막사 밖 사내들의 수군거림이 틀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거울로 처음 세실을 봤을 때보다도 더 작아 보이네.’
여자의 손길이 가볍게 아기의 머리칼을 쓸었다. 땀에 자잘하게 젖어 있던 아기의 머리카락은 손쉽게 동그란 이마를 내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곧 나을 거야.”
그녀의 손이 한동안 아기의 이마에 머물러 있었다. 아기의 칭얼거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신성력인가?’
에리나 경이 이 세계의 기사라면, 신성력을 운용할 수 있는 성기사일 거니까.
그런데, 무슨 꿈이 이렇게 생생하지? 남 엿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의아해하며 꿈에서 깨어나야겠다고 생각할 때, 슬며시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아기의 눈동자가 보였다.
‘예쁜 빨간색이네.’
엄마로 짐작되는 저 기사는 눈동자가 흔한 파란색인데. 아빠 유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꿈에서 빠져나왔다.
여명 속에서, 나는 근래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다는 느낌이 들었다.
꼬박 일주일을 앓고서야 나는 완치를 판정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보름 뒤부터 나를 돌볼 이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전하, 오늘부터 전하를 전담하게 될 시녀들이에요. 얘들아, 인사하렴.”
“전하, 영광이에요! 그래넘 후작의 둘째 메리제인입니다. 열세 살이지만 동생이 아래로 둘이 더 있으니 제가 잘 놀아드릴 수 있어요! 근데 정말 영롱하시네요….”
“영롱이라니, 말이 심하네. 전하께서는 박물관 아기 천사상 그 자체시거든요? 전하, 저는 뷰케인 백작의 다섯째예요. 딸로는 둘째지만요. 저도 다음 달이면 열세 살이 된답니다. 저는 머리 손질을 잘해요!”
‘얘네 왜 이래?’
그리고 나는… 타인이 보이는 밑도 끝도 없는 호감에 당황하고 말았다.
검은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메리제인과, 굽이치는 갈색 머리칼을 맵시 있게 반묶음 한 패티샤.
두 소녀는 뼈대 있는 황실파 가문의 어린 영애들 중에서 유모가 엄선한 시녀들이라고 했다. 신성력이 없는 내 체질을 황실의 기밀로 부쳤기에 신중을 기한 거였다.
‘귀족파가 반황실 세력은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그만큼 사안이 워낙에 심각하다는 거겠지…. 원작 빌런들이 모두 귀족파긴 해도, 20년은 뒤의 일인데.’
맘껏 나동그라질 수 있도록 마련된 너른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잉차, 내려서서 그녀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 브타헤.”
부서지는 근엄함…. 우이씨. 이라도 빨리 다 나야 할 텐데.
내가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다고는 상상도 못 한 소녀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잘 부탁하신다는 거죠? 어쩜 이리 영명하신지. 황송해요, 전하. 제가 더 잘 부탁드려요!”
“아니, 제가 더! 와, 저 악수 태어나서 처음 해봐요.”
아, 여기 여성들은 악수를 안 하나?
얼른 예법을 배워야 이 세계에도 세실의 지위에도 잘 적응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소녀가 무릎을 꿇고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나를 보려는 모양이었다.
“전하를 너무 불편하시게 하면 안 돼. 전하께서는 존체가 미령하시니까.”
“황실의 보석을 이리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서요….”
“녹금안, 정말 신비하네요….”
내가 신성력이 없다는 시녀들에게도 비밀이 되어, 그냥 허약하다는 정도로 포장되어 있었다.
‘세례식에 참석했던 신관들이랑 궁정 화가한테도 비밀 유지 맹세를 받아 놨대고 말이야.’
신성력이 충만한 이가 허약할 수는 없으니 이도 비밀이라면 비밀이었다. 이중 비밀이랄까….
‘더 큰 비밀은 없겠거니 하는 전략일까?’
그래서 다소 이른 시기에 둘이나 되는 전담 시녀를 들인 것은, 대외적으로는 막둥이를 위한 황실의 과보호로 포장돼 있었다.
아니, 시녀를 들인 정도는 사실 큰일도 아니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거구의 청년 둘이 들어왔다.
“란셀 경, 브랜든 경.”
“인수인계하고, 퇴청하려 합니다.”
“그래요, 고생했어요.”
로젤리아가 낸 ‘세실 과보호 아이디어’로 내 전담 기사가 된 란셀과 브랜든이었다.
그들은 총 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성기사단 산하 소대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까 성기사단 산하 4황녀 호위 소대 말이다.
2인 1조로 총 4개 조가 3교대 근무를 하는 이 소대는 로젤리아가 미리 눈여겨봐둔 젊은 기사들로 이뤄져 있었다.
말인즉슨, 아직 아기방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만 1세 유아를 위해 배정된 성기사단의 젊은 피가 무려 여덟….
손위 오빠 테오도르의 호위가 총 세 명인 걸 생각하면 확실히 과했다.
막내 황녀에 대한 황실의 팔불출 핑계,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전하, 저희 이만 퇴청해 보겠습니다.”
“내일 야간에 뵙겠습니다.”
“다 가아.”
나는 유모보다 머리 하나는 큰 엄숙한 표정의 청년들을 향해 세실리아의 작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에 두 청년 기사의 표정이 경미하게 굳었다.
‘그래, 너희들도 청운의 꿈을 안고 기사가 됐는데 아기방 문지기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좀이 쑤시겠니.’
훠이, 훠이. 얼른 가서 개인 수련 하려무나. 그런 마음을 담아 나는 손을 내저었다.
메리제인과 패티샤는 서로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지, 서로를 조금 경계하는 듯했다.
하지만….
“패티, 전하 머리카락 오늘은 이 리본으로 묶어봐.”
“아무래도 이 진녹색이 전하 눈동자 색깔이랑 어울려서 통일감을 주지 않겠어?”
“아냐. 붉은색이 보색 대비 효과로 포인트가 될 거야.”
“크으, 영애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그러면 양말도 같은 색으로 할까?”
서로를 경계한 게 언제였냐는 듯, 두 사람은 이내 죽이 잘 맞아 절친이 되었다. 문제는 그 죽이 세실리아 꾸미기에 맛을 들이면서 맞기 시작했다는 거였지만….
‘이런 걸 보면 역시, 내가 신성력이 없는데도 황실에서 사랑해주는 게 세실리아의 사랑스러운 외모 때문인 거야.’
황실과 주변인의 넘치는 사랑은 전생을 기억하는 내게 다소 쑥스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대체로 유용했다.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이토록 유난을 부릴 때면 번거롭게도 느껴졌지만….
“대퉁 해!”
“대충은요, 전하. 오늘 얼마나 오랜만에 황태자 전하를 뵙는 건 줄 아세요?”
“한…. 두 달?”
“…맞긴 한데요. 전하 인생의 10분의 1이나 되는 시간 만에 보시는 거니까 말이에요.”
“그애드 갠타나! 그이고 나 곧 두 타리야!”
곧 두 번째 생일을 맞는다고!
“네에, 네. 전하도 괜찮으시고, 황태자 전하도, 두 분 폐하도, 다른 황자, 황녀 전하들도 다 괜찮으시겠지만, 저희가 안 괜찮아요.”
“맞아요, 전하. 오늘도 전하를 사랑스럽게 꾸며드리고 싶은걸요.”
“피.”
어차피 저들 인형 놀이에 나를 이용하는 거면서. 세실리아가 이렇게 안 이뻤으면, 어? 너희들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했을 것 같아?
나는 온 얼굴을 활용해 불만스럽다는 기색을 풀풀 풍겼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그 어떤 위엄도 살아 있지 않아, 두 소녀들의 눈웃음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얼른 자라야지,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