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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4화 (4/220)

4화. 아수라마수라의 막내 황녀가 되었습니다 (3)

그날은 세실리아로 태어나고서 처음으로 아기방을 나서는 날이었다.

첫돌을 맞아 세례를 받을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아듣는단 기대도 없으면서, 유모는 나를 단장해주는 내내 세례식에서 있을 일들을 주워섬겼다.

나야 고마운 일이었지만.

“오늘 세례를 받으시면 어엿한 황실의 일원이 되시겠지요. 전하께서 얼마나 큰 그릇을 갖고 계실까요? 아마 다들 깜짝 놀랄 거예요.”

유모가 화룡점정을 찍듯이, 머리띠를 조심스레 끼웠다.

한 걸음 물러나 난생처음 머리띠를 한 내 차림새를 살피는 유모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깃들었다.

“폐하, 정말 아기 천사가 강림하신 것 같아요.”

“자네도 참, 별말을 다 하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가 핀잔주듯 말했지만, 그 말끝에는 흐뭇함이 배어났다.

마흔이 넘고 자식이 나까지 다섯이지만 여전히 청초한 매력을 자랑하시는 우리 어머니.

예식용 드레스를 차려입으신 모습이 정말 고혹적이고 눈부셨다.

정말, 이런 것들이 판타지 아닐까….

“세실, 아가야. 네가 거대한 신성력을 가졌어도 아무도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네가 우리의 사랑스러운 막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란다.”

나를 안아 든 어머니가 내게 사랑을 담아 조곤조곤 속삭였다.

입술연지를 바르셔서 내게 뽀뽀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내 코에 와닿는 어머니의 뾰족한 코. 아, 향기 좋아.

‘말씀은 그리하셔도 자식에게 실망하는 건 한순간이니까.’

네가 그럼 그렇지, 그리 말하듯 싸늘하게 빛나던 전생 부모님의 시선….

‘기왕이면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

아수라마수… 음…. 아무튼 이 나라는 일종의 신성 국가여서, 강력한 신성력은 후계자의 중요한 자질로 점쳐졌다.

따라서 선황의 차남이셨던 아버지도, 올해 성인이 되어 황태자로 책봉될 큰언니 그레이스도 거대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어릴 때 하나 봐. 아멜리는 성인이 다 돼서 측정했는데.’

막장극의 필수 조건인 ‘출생의 비밀’에 대한 떡밥이 되었던 그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나는 유모의 품에 안겨 방을 나섰다.

나와 어머니를 비롯해 황실의 모두가 성장(盛裝)하긴 했지만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세례식이 열린 곳은 황궁 안에 위치한 예배당에, 참관객도 황실 가족을 빼면 유모 등 소수의 측근뿐이었으니까.

아기방을 나서기야 했지만, 여전히 황궁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는 것이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궁 밖에 나가기는커녕 공식 석상에도 참석하지 못한댔지.’

황실 직계를 보호하기 위한 전통 때문이라고 했다.

“주신의 광휘를 뵙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바로 근처인 것을요. 황제께서도 신수가 더 훤해지셨습니다. 막내 황녀님을 보시고 황실이 더 화목해졌다더니 사실인가 보군요.”

“하하,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요?”

안쪽에서 아버지와 손을 맞잡고 인사를 주고받는 저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교황 성하인가 보다.

대신전이 황성 바로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멀리서 왔다고 감사를 전할 만큼 교황 성하는 꽤나 연로해 보였다.

“네가 세실리아로구나.”

“세실, 네 막내 할아버지시란다. 교황 성하셔.”

…그래. 신성력이 가장 강한 게 황실이다 보니 교황도 대부분 황실에서 나왔다.

그래서 레베카가 차기 교황으로 점쳐지는 건 퍽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주 가끔 신탁의 아이라도 태어나지 않는 이상, 황실 밖에서 교황급의 신성력을 타고나는 경우가 없댔지. 대신관도 고위 귀족 중에서 나오고.’

만 1세인 내가 눈만 끔벅이며 이 세계의 설정을 곱씹는 동안, 성하께서 아주 인자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세실. 이 할아비가 너를 위해 기도해주마.”

결국 가족 행사여서 그런지, 별다른 절차도 없이 속행이었다.

세례식을 위한 인원이라 봐야 성하를 모시고 온 듯한 신관 몇과 이 장면을 기록하기 위해 온 궁중 화가가 다였다.

아버지가 나를 유모의 품에서 건네받아, 어머니와 함께 단상 앞으로 나아갔다.

“자, 아기를 높이 들어주시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릎을 꿇은 뒤 내 겨드랑이를 붙잡아 성하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니까, 나는 마치 전생의 한 애니메이션에서 후계자로 추대되던 순간의 아기 사자처럼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게 되었다.

‘아버지 힘이 약하셨다면 겨드랑이가 꽤나 아팠겠는걸….’

내가 아버지의 악력을 걱정하는 사이, 성하께서 신관이 든 성배에서 성수를 손에 묻힌 뒤 내 이마에 바르고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아수마라수라의 황실에 새로운 기쁨을 안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대륙의 주인으로서 주신의 자애를 실천하길 바라며….”

따뜻한 느낌이 들더니, 시야가 환해졌다.

‘신성력이 이렇게 빛나기도 하는구나.’

레베카가 내 체온을 조절해줄 때는 따뜻하거나 차가운 감각만 있었는데.

축복이라 시각적 효과가 나는 건가?

“세실리아 자매의 일생에 주신의 찬란한 볕이 함께하기를. 달의 신의 온화함으로 세계를 이롭게 하기를.”

성하의 나지막한 기도 말에 공명하듯, 그 빛이 웅웅대며 깜빡이더니 내 머리에 흡수되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신비로운 광경을 쳐다보았다.

‘이게 바로 판타지의 맛.’

성하께서 합장하며 고개를 숙이자, 지켜보던 이들이 그를 따라 했다.

“자, 그럼.”

뒤이어 신관들이 트롤리를 밀고 왔다. 그 위에는 삐죽빼죽한 육각기둥 여러 개가 한데서 솟아난 모양의 수정 원석이 있었다.

‘저게 신성력 측정기겠지…!’

언젠가 내가 ‘공제눈’에서 읽었던 그대로였다.

‘아멜리는 대신전에서 했었는데. 여기로 가져온 거구나.’

산간벽지 출신인 여주인공 아멜리는 영지 근처에 신전이 없어서 세례도 못 받고 성인이 되었다.

작중에서 상경하고 나서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때 측정된 신성력이 웬만한 신관 수준이어서 사교계를 깜짝 놀라게 했었다.

일개 남작가에서 나오기 힘든 수준이었으니까.

‘역시 주인공이라서 능력 하나쯤은 있는 거야.’

그토록 뒤늦게 발현된 신성력을 손쉽게 갈고닦아, 나중에는 전투에서 다친 제 연인을 치유해 주기도 하니까.

수정석에 손을 올렸더니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런 식으로 묘사된 그 장면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생각하니, 내가 뭐라도 된 느낌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성공한 덕후? 블록버스터 영화 콘셉트의 놀이 기구 타는 마음?’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상상일 뿐이긴 하지만.

신관들이 수정석을 제단 위에 올리자, 아버지가 나를 그쪽으로 데려갔다.

‘이게 뭐라고 떨리네.’

작년 가을에 큰언니 그레이스가 성인식을 치르면서 황태자 책봉도 받았으니 내 신성력은 후계 구도와는 무관했다.

하지만, 테스트는 테스트!

무한 경쟁 사회에서 전생을 보낸 나는 학습된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신성력이 높을수록 빛이 더 세다고 했지. 부디 적당하게 나와야 할 텐데. 그레이스가 결혼해서 자식 낳으면 내 또래니까 걔들하고 괜히 갈등 일으킬 수도 있고…. 그러면 나도 레베카 따라 귀의해야 하나?’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을 담은 내 자그마한 손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차가운 감촉의 수정 기둥에 가 닿았다.

“……?”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대신 게 맞습니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순 예배당은 정적에 묻혔다.

성하도, 신관들도, 황실 사람들도, 그 누구도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궁중 화가의 손놀림도 멈췄다.

“이, 이상합니다만.”

신관 하나가 다가와 살피려는 듯 수정석을 잡자마자 화앗, 수정석이 새하얗게 물들며 눈 부신 빛이 쏟아졌다.

다시 정적.

“다시 한번 해봅시다.”

성하께서 여유로운 목소리로 손짓했다.

하지만 나는 느끼고야 말았다. 성하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린 것을.

그리고 조심스레 내 손이 다시 수정석에 닿았을 때.

“조금 오래 대어 보실까요.”

이미 내 손은 충분히 오랫동안 수정석에 닿아 있었지만, 수정석에서는 그 어떤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신관은 잠깐 잡기만 해도 빛이 났는데.

이거 뭐야, 창피해!

“우, 우애앵….”

말 그대로 쪽이 팔려 버린 나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기라서 눈물샘이 한 박자 늦은 걸까? 내 창피함을 담아 표정과 목소리로 울음을 짜내다 보니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던 그 순간.

당황한 어머니께서 나를 넘겨받아, 등을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

“쉬이, 세실. 괜찮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기는.

난 봤다. 내 등을 토닥이던 어머니의 손길이 잠시 멈춘 그 순간에, 그 수정구가 희미한 빛으로 빛나는 것을.

확인해 보셨어야 했나요….

그랬다. 놀랍게도 나는 교단 역사상 전례 없는, 신성력 제로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신성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미미한 신성력이라도 타고난다는데, 하물며 황실에서…. 나 저번 생에 사랑 못 받고 살아서 구원받은 거 아니었어?’

믿을 수 없다며 교황 성하와 신관들이 내게 제 신성력을 불어넣어 이런저런 검사를 해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 영혼이 다른 세계에서 와서일까?’

창피함을 추스른 나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황실 식구들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머니, 제가 기사단에서 세실의 호위 기사감을 좀 골라볼까요? 세실의 안전은 제가 책임져야죠!”

“그래, 좋은 생각이다. 한 다섯, 아니 열은 뽑자꾸나. 전담 시녀도 빨리 들여야겠어.”

“제가 믿을 만한 가문의 영애들을 물색해 보겠습니다.”

“부디 그래 주게.”

세례식이 마치자마자 저마다 나를 과보호할 아이디어를 하나씩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전담 신관을 붙이자느니, 후원에 약초 온실을 만들어둬야 한다느니, 아기방 결계를 배로 강화하자느니, 공격용 마도구를 상비해 두자느니….

‘말만 들어도 너무 과한데.’

이해가 가기는 했다.

신성력은 마기를 정화하거나 타인을 치유할 때만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소소하게는 아플 때 체력을 회복하고 다쳤을 때 상처가 빨리 아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일종의 면역력 같은 거랄까? 그래서 지금 나를 톡 치면 바스러지는 과자 취급인 것이렷다.

‘나한테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유 없이도 차별하는데, 황권의 정당성이 되는 신성력 문제라면 차별할 합리적인 사유가 되고도 남을 거였다.

‘전생에서는 첫째라고 집안일을 도맡아도, 혼자 힘으로 대학 나와서 취직해도, 친구로서 애인으로서 아무리 잘해도 다들….’

모두에게 뒷전이었던 전생을 떠올리니 우울해질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모자란데도 무시하지 않는 가족들에게 슬며시 고마워졌다.

그런 쑥스러운 마음으로 요람에 앉아 눈만 굴리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그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래, 일단 그 정도로 이야기해 보자꾸나.”

어머니께서 대화에 마침표를 찍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약속한 것처럼 나를 돌아보았다.

“히끅.”

머리로는 그 시선에 걱정의 빛이 깃든 것을 알겠지만….

열 몇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니, 나는 별수 없이 잘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우, 우아앙….”

‘비록 신성력은 없지만, 다른 건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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