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수라마수라의 막내 황녀가 되었습니다 (2)
“어머, 황녀 전하께서 새 모빌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아우, 바!”
좋지, 안 좋겠어?
전생에 고생한 보람이 있는지, 특등석에서 내 최애 소설을 관람하게 생긴 건데!
그러니까, 다이아 수저를 문 엑스트라. 그게 내 이번 생의 설정이었다.
같은 엑스트라라도 전생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다시금 내가 환생할 때 들려온 말소리를 떠올렸다.
‘구원받은 게 나인가 봐!’
막내 황녀 세실리아로 살아가는 건 정말… 행복하고 따사로운 날의 연속이었다.
그저 숨 쉬고, 목 가누고, 뒤집고, 기는 것만으로도 찬사와 애정 어린 눈길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전하들 오셨습니까?”
“응, 아가는 깨어 있는가?”
“아가가 뭐니, 테오. 세실리아라는 예쁜 이름이 있는데.”
“지금까진 제가 계속 아가였잖아요. 저도 아가라고 불러보고 싶었다고요.”
“그래, 우리 테오 아가.”
“아이, 누님!”
요람에 누워서 알록달록한 모빌을 눈으로 좇으며 시력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안녕, 아가?”
“세실, 셋째 언니랑 오빠 왔어.”
요람 위로 두 개의 동그란 얼굴이 튀어나왔다. 바로 위의 오빠인 테오도르, 그리고 그보다 한 살 위의 레베카였다.
바로 위라고 해봤자 나보다 열두 살 많지만.
“우, 꺄하!”
“우리가 와서 좋아?”
그럼, 좋지!
정말이지…. 불혹을 넘긴 아버지도, 어머니도 미인이었지만 그 슬하의 내 형제들도 하나같이 미소녀, 미소년이었다.
저마다의 매력으로 오밀조밀 예쁘게 생긴 애들이 내 시야에 들어올 때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옛다, 아기 웃음 서비스, 까르륵!
“아, 정말 아가들은 다 귀여운 걸까….”
그건 내가 할 말이란다, 오라버니야.
시력이 차츰 발달하면서 인물들의 얼굴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된 나는… 황실이 화목한 데 그들의 수려한 외모가 한몫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테오, 너는 그렇게 귀엽지 않았던 것 같아.”
“누님은 저랑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으시면서 뭐가 그리 기억나신다고요.”
단정하게 빗어 내린 앞머리 아래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는 테오도르와 구름처럼 구불구불한 머리칼만큼 포근해 보이는 인상의 레베카.
아직 열둘, 열셋의 아이들이었지만 이 아이들이 머잖아 어마어마한 미남, 미녀가 되리란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만 봐도 미인 유전자 어디 안 갈 테고 말이야.’
나는 합리적인 추측에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원작에서 역대 사교계 미남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훗날 남주 레오폴트를 두고 그의 뒤를 잇는 꽃미남이라고들 얘기할 정도였으니까.
‘후후. 그럼 나도 이번 생에는 기대해볼 만하겠어.’
까르륵, 흡족해진 내가 나도 모르게 소리 내서 웃자, 투덕대던 테오도르와 레베카가 내게 반짝이는 눈빛을 던졌다.
“아아, 정말 사랑스럽다.”
“아가만 온종일 봐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요….”
“테오, 베키! 너희들 씻고는 온 거니?”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왔다. 단호한 어조로 보니 분명 둘째 언니 로젤리아였다.
“이크.”
테오도르는 옷깃에 코를 박아 땀 냄새를 맡고는 뒤로 슬금슬금 멀어졌다.
“부우….”
얼굴 감상하느라 모르고 있었던 구리구리한 냄새가 그제야 풍겨오는 것도 같았다.
너 그래도 네 세대 최고 꽃미남 되실 몸인데….
“베키, 신성력 그런 데 쓰지 말고.”
“방에서 필사만 하다가 왔다고요, 언니.”
“아기들은 우리보다 훨씬 약하니 더 신경 써야지.”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위생 관념이 꽤나 발달했단 말이지. 역시 K로판이어서일까?
테오도르와 레베카는 별수 없이 시녀들을 따라 곁방으로 떠났다.
“세실, 잘 있었느냐? 둘째 언니 왔단다.”
한산해진 내 요람 앞으로 다가온 로젤리아가 나를 안아 들었다.
‘안락해….’
내 위로도 동생이 둘이나 있기 때문인지 로젤리아는 제법 익숙한 손길로 나를 다뤘다. 훗날 성기사단장이 되실 재목에게 0세 유아의 몸무게 정도는 거뜬한 모양이기도 했다.
“오늘 유모랑 잘 지냈느냐? 맘마도 많이 먹었고?”
“아우, 바!”
나는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저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부인, 우리 세실은 매번 이렇게 웃기만 하는데 괜찮은 것인가? 테오는 정말 많이 울었는데.”
“4황녀 전하께서 순하신 게지요. 전하들을 알아보시는 것도 같고요.”
“역시 우리 세실은 영특하구먼.”
유모의 살가운 대답에 뿌듯한 표정을 그려낸 로젤리아가 나를 둥개둥개 어르며 벽에 달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귀 언저리에서 칼 같이 잘린 단발머리의 로젤리아. 그리고 바로 그 옆, 뽀얀 볼살 위로 왕방울만 한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고 있는 아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세실 얼굴이다!’
이 시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나 혼자서는 볼 수 없는 이번 생의 내 얼굴, 아기 세실의 얼굴을 보는 것….
“세실, 여기 아가가 있네? 누굴까? 네가 봐도 사랑스럽지?”
로젤리아가 내 몸을 기울여 거울 쪽에 대어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거울에 비친 아기의 얼굴에 손을 짚었다.
‘봐도 봐도 짜릿해.’
솜털 같은 은색 머리칼 아래로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존재감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홍채에 금빛 반점이 아롱대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했다.
은발과 더불어 눈동자에 금색이 섞여 나타나는 것이 황실의 특징 중 하나라고 했다.
‘이 정도면 이 세계 사람들 눈에도 엄청 예쁜 거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예뻐할 리 없으니까.
나는 이 탄탄한 논리에 만족해 까르륵 웃었다. 아, 침 흐르네.
“아이고, 우리 세실은 웃음도 많구나.”
로젤리아가 소맷부리로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훈련을 마치고서 씻고 바로 온 것인지, 뽀송뽀송한 실내용 드레스에서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킁킁, 나는 참을성 없이 로젤리아의 품에 코를 박았다.
“어이구, 세실은 언니가 너무 좋구나, 그치?”
응, 좋지!
‘로젤리아는 우리 형제 중에 가장 비중 높은 인물이니까!’
열일곱 살인 로젤리아는 성기사단에서 수련생으로 훈련하며 두각을 나타내는 중이었다.
훗날 성기사단장이 될 재목이셨으니까.
남주인공 레오폴트가 성기사가 될 예정이기에, 로젤리아는 레오폴트의 일상 에피소드나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 그리고 최후의 전투 등에서 그의 상관으로 쏠쏠히 등장했다.
‘여주인공이 서브 남주에게 납치됐을 때 레오폴트가 정신 못 차리니까 기꺼이 휴가 내주고. 쿨한 상사라며 인기 많았지.’
그러고 보면 원작의 20년 전쯤의 시점인 만큼, 원작에 등장할 이들이 대부분 이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단 이야기렷다.
‘레오폴트가 어렸을 때 내 말동무였다는 설정이 있으니, 지금쯤 태어나 있겠지? 아멜리가 연상이었으니까 그 애도 태어나 있을 거고….’
순간적으로 나는 내가 ‘공제눈’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실감이 훅 났다.
‘나이 먹으면 다 볼 수 있겠지. 기대된다.’
히힛, 나만 아는 생각에 빠져 헤실헤실 웃으려니… 스읍, 또 침이 흐른다.
‘아, 인간 존엄성.’
로젤리아가 다른 쪽 소맷부리로 내 입가를 닦으며 창가로 향했다.
“세실, 창밖에 뭐가 있는지 구경해볼까?”
본궁의 후원이 넓게 보이는 이 창가는 돌이 될 때까지 아기방을 나갈 수 없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형제들이 찾아오는 늦은 오후면 기울어진 햇살이 따사롭게 들어와 노곤한 오후를 물들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베키, 세실 좀 받아보렴. 창문 좀 열게.”
어느새 옆에 다가온 레베카에게 나를 넘겨준 로젤리아가 길쭉한 팔로 창문을 열었다. 음, 가을 냄새.
“언니, 오늘 대련 이기셨어요? 내년에 정식 기사 되는 수련생들하고 대련한다고 하셨잖아요.”
“박빙이었는데 진짜 아쉽게 졌다. 장차 황실을 수호할 기사들이니 내게 지면 안 되는 거지만, 막상 그리되니 오기가 생기더구나.”
오오, 역시 재능은 승부욕과 함께 오는 거라던가.
일과를 마친 뒤, 내 방에 나를 보러 와서는 하루의 일들을 이야기 나누는 것이 어느새 내 형제들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내가 있는 아기방이 본궁에 있는 어머니의 방에 붙어 있는 것과 달리, 내 형제들은 황제의 자녀를 위한 프리지어궁에서 지내는데도 그랬다.
역시 우애 좋다는 설정 어디 안 가나 보다.
‘예쁜 애들이라 사이 나쁠 것도 없나 봐.’
적막하기 그지없었던 전생의 형제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지.
‘내 동생들은 용돈이라도 줘야 친한 척이나마 해줬는데….’
전생의 암울한 추억에 씁쓸한 마음이 들 때였다.
휘잉, 열린 창문을 타고 초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실내로 흘러들어 왔다. 바르르,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아코, 춥지, 세실?”
“브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침만 주륵 흐른다. 이놈의 혀는 언제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그래도 말 벌써 배운 거나 마찬가지니까. 조음기관만 발달하면 청산유수일 거야.’
그렇게 내가 달변가의 꿈을 꿀 무렵이었다.
내 등을 덮은 레베카의 손을 중심으로 뭔가 따뜻한 느낌이 느껴졌다.
“따뜻하지?”
헤에, 나는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고개를 들어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아, 또 침이 주륵.
“그래, 베키. 신성력을 쓰려면 차라리 세실을 위해 쓰도록 해라.”
“이런 정도는 저한테 무리도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아하, 신성력이었구나.
‘하긴, 여름에도 나 시원하게 해준다고 레베카가 자주 들락거렸었지.’
거대한 신성력을 타고난 레베카는 20년 뒤 원작 무대에서 유력 교황 후보로 점쳐지게 될 예정이었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 수련사도 못 되니, 몸의 정화하거나 체온 조절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친 정도인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신성력은 이 세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고난다고 했는데.
‘나도 나중엔 무더위도 문제없겠네? 전생에선 전기세 걱정하느라 에어컨도 못 틀었는데…!’
나는 레베카의 도움이 없어도 여름에 더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다시금 헤벌쭉 웃었다.
‘환생 잘했어, 정말!’
“4황녀 전하께서도 강대한 신성력을 갖고 계시겠지요?”
“황실이 다복한 것은 신께서 제국을 보우하시기 위해 더 많은 천사를 보내신 셈이니까요.”
“폐하의 치세가 참 부강하긴 합니다.”
신성력에 대한 관심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해서인지, 유모와 시녀들이 내 앞에서 무방비하게 떠드는 이야기들 덕분이었다.
‘‘공제눈’에서도 신성력이 진짜 중요한 소재로 사용됐으니까.’
사람들은 이 시대를 ‘신성 시대’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이 크든 작든 신성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대륙의 고대 문명이 갑작스레 마계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신성력이 있는 자들만 그 나날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리고 500년 전, 신에게 선택받은 초대 황제가 강력한 신성력으로 마계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세워진 게 아수라… 아무튼 이 제국. 아무리 영웅이어도 작명 센스는 엉망인가 봐.’
그 때문에 황실 직계들에게 발현되는 뛰어난 신성력은 강력한 황권의 상징이자 정당성이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성력은 중요했다.
신분이 높을수록 타고난 신성력이 컸고, 신성력이 많을수록 교단에 들어가서든 성기사가 되어서든 출세할 가능성이 컸으니 말이다.
이런 분위기니 나를 두고 벌써 막내 천사의 강림이라며 즐거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히히, 외모도 천사인데 말이야.’
그렇게 내가 첫돌을 맞았을 때였다.
“전하,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랍니다.”
“우오(중요)?”
유모의 말에 나는 입과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물었다.
그걸 유모가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