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수라마수라의 막내 황녀가 되었습니다 (1)
태초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의 초입에서 나는 내 역할을 기억해냈다.
눈을 떴는지도 감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망막에 쏟아지던 그 새하얀 빛의 향연 속.
‘그건 구원일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건져낸 말이었다.
나는 유독 밤이면 자주 칭얼댔다. 그때마다 내가 잠에서 깨는 것도, 정말로 우는 것도 아니었지만.
매일 밤, 빠짐없이, 뒤죽박죽, 똑같은 이야기가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던 탓이다.
‘괜찮으신가요, 레이디?’
‘혹시 제가 외롭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저에 대해 알지도 못하시면서 그리 말하지 마세요.’
‘영애의 어머니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안 돼…! 정신 차려요, 밀리!’
마치, 그 편린 하나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듯이.
그래서 내 감각이 차츰 어른의 이성을 받아들일 만큼 발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필시 아수라마수라에 큰 축복이 내린 것입니다.”
…저 이상한 나라 이름하며.
“옵티무스 3세 폐하께옵서 덕이 많으셔서….”
거대 로봇 같기도 하고 현대인의 생필품을 떠올리게도 하는 저 이름.
그리고 혼몽했던 내 밤에 끊임없이 재생되었던, 옵티무스 3세 치하의 아수라마수라에서 벌어질 이야기들.
그래, 이 상황은 N년 차 로판 독자에게는 정말로 익숙한 일이었다.
들어본 나라명, 들어본 이름, 그리고 갓 태어난 내가 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러니까, 나는 내가 읽었던 책에 빙의한 것이었다. 아니 환생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까?
전생의 마지막 기억이라면….
나는 마포 대교를 걷고 있었다.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많이 힘들었구나’ 따위의 문구들이 내 시야에 걸려들었지만, 결단코 나는 그 다리가 유명한 이유와 전혀 무관한 마음으로 그곳에 있었다.
마음이 헛헛한 날이어서 한강 공원에서 맥주를 안주 삼아 소주 한 병을 해치우고 집에 가려던 길이었다.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졌을 테니, 강바람 좀 쐬다가 술 깨고 지하철 타려고.
나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 목록에서 가장 맨 위의 번호를 눌렀다. 며칠간 저녁에 한두 번씩, 오늘도 강변에서 몇 번을 했던 일이었다.
[♡내사랑♡] ↗ (13)
- Rrrrrrr….
요 며칠 수십 번은 들은 듯한 그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나는 그 찰나에도 수많은 생각을 했다.
제발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이대로 또 연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연결이 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는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나는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오늘만 몇 번을 들은 건지 모를 자동 응답 멘트는, 차들이 내 곁을 스치며 빚어내는 소음 속에서도 선명히 귓가에 박혔다.
‘그럴 줄 알았지만….’
나는 핸드폰을 그러쥐고서 우뚝 멈춰 섰다.
또 이별.
최선을 다한 연애는, 늘 내가 원하지 않은 데서 끝났다.
자동차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먹먹하게 울렸다.
오늘은 혼자 있기 싫은데. 본가로 갈까?
“네 동생 시험이 코앞인데 뭘 번잡스럽게 왔어?”
“치킨 같은 거 먹어봤자 속만 더부룩하다고!”
“쓸데없는 데 돈 쓰고, 이럴 바엔 막내 보약이라도 지을 것이지. 어쩌다 저런 미련퉁이를 낳았는지….”
…아니다. 그럼 이 시간에 연락할 친구가….
“네 전 남친 인별 봤어? 환승한 거던데? 환승할 만하더라. 너보다 훨씬….”
“네가 너무 잘해줘서 부담스러웠던 거 아냐? 원래 남자는 쫓아가면 도망간다잖아.”
가족이며 친구며 가까운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지만, 언젠가 들었던 야멸찬 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소설 속에선 그렇게 굴러도 운명의 연인이라도 있지. 부럽다….”
강변에서 재주행하던 소설 내용을 떠올리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쳐들었을 때였다.
갑작스레 시야가 핑 돌았다.
주홍빛 가로등, 거리를 스치는 붉은 후미등, 그리고 비구름을 머금어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암전.
그게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마지막이었다.
내가 죽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면 전생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느냐고?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부터 시작될 삶이 진짜 내 삶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구원일 것이다.’
내 뇌리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그 한마디가, 내 생의 분기점 아니었을까?
아흠, 졸려….
‘오늘치 생각 다 했나 보다.’
내 비록 전생에서 스물 몇 해를 산 어른이지만, 몸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서인지 의식을 유지하는 시간도 짧고 주변을 인식하기도 힘들었다.
“아기님 하품하시는 것 좀 보세요.”
“아, 정말 아기 새 같지 않느냐.”
“너무 사랑스러우셔요.”
하암, 어떤 때엔 나를 두고 하는 소리라기엔 좀 낯간지러운 소리들이 웅웅대었고.
“아가는 오늘도 자고 있네.”
“원래 이맘때는 많이 자는 거란다.”
“너도 아가만 할 때 그랬어.”
어떤 때엔 내 가족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내 요람 근처에서 서성대는 느낌도 났다.
그런데 가족들이 나를 이렇게 살뜰히 들여다본다고?
‘아기 때는 그럴 수도 있나….’
까무룩, 나는 또 잠들었다.
그렇게 도대체 몇 번을 잤다가 깼다가 반복했을까. 뭘 물리면 먹고 씻으면 씻기며 내 몸인지 네 몸인지 혼몽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간만에 분위기가 소란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설은 잠을 깨기 위해 눈을 천천히 끔벅였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어머니와 유모, 그리고 시녀들로 추정되는 이들 정도만 오가던 방에 족히 열은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났구나.”
두둥실, 어머니로 추정되는 품에 늘어져 있던 내 몸이 돌연 이동했다.
이 두툼한 품은…. 그래, 아버지일 거다.
깜빡깜빡, 잘 맞지 않는 시력을 집중해 나를 안아 든 이를 살폈다. 잘 빗어 넘긴 은발 아래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중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이 옵티무스 3세….’
이름만 듣던 황제의 얼굴을 드디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목소리를 잠결에 들었던 것도 같고.
“우쭈쭈, 아가, 이 아비 좀 보거라.”
그는 나를 안고 있는 팔을 살곰살곰 흔들어 나를 얼렀다. 으으, 초점이 흔들리는데…. 계속 나 보고 웃고 있는 건가?
‘예뻐 죽겠다는 표정 같기도 한데…. 하긴, 아기는 다 귀여우니까.’
전생의 나도 아기 때엔 저런 눈빛을 받았으려나. 같은 아기라도 황실 직계와 현대 소시민은 또 다를는지도.
이윽고 그가 몸을 돌리는지 풍경의 빛이 변했다.
“이제 아기를 정식으로 아수라마수라의 계보에 올릴 것이다.”
하하, 다시 들어도 낯간지러운 저 이름. 손 가는 대로 아무거나 갖다 적은 것 아니냐는 말들이 많았지.
“그리고 그 이름은….”
꿀꺽, 나는 마음속으로나마 마른침을 삼켰다. 내 머릿속에 옵티무스 3세 슬하의 황실 직계들 이름이 스쳤다.
‘내가 첫째는 아닌 것 같으니 황태자는 아니겠고. 성기사단장이 될 로젤리아? 진짜 멋있었지만, 기사 수련은 힘들 것 같은데. 아니면 레베카일까? 구원일 거라고 했으니까 막대한 신성력을 지닌 레베카랑 어울리기는 해. 내가 황녀라는 걸 보니까 테오도르는 아닐 테고.’
그렇게 내가 황실 직계들의 설정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아기의 이름은 세실리아로 할 것이다.”
‘4황녀 세실리아!’
아, 얘를 왜 잊고 있었지?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시각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내 주변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그저 빛과 그림자의 덩어리로만 느껴지던 주변의 풍광이 그제야 구체적으로 인식되었다.
침대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귀부인과 그 곁에서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년, 소녀들.
‘하긴, 매일 들려오던 목소리들이 엄청 다양했던 것 같아. 막내라서 그랬구나.’
그리고 이번 생의 내 아버지와 형제들의 머리에는 하나같이 황가의 상징인 은빛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너울대고 있었다.
‘나한테도 저런 머리칼이 송송 나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아수라… 어쩌구의 막내 황녀, 세실리아로 태어난 것이었다!
“아우아.”
“아이코, 벌써 웃는단 말이냐.”
“황녀님께서 영민하십니다.”
“아수라마수라의 큰 축복입니다.”
감출 수 없는 쾌감이 생후 두 달 차의 얼굴 근육으로나마 어찌어찌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건데!
내가 태어난 곳은 〈공작가의 제비꽃은 눈물로 자란다〉, 줄여서 ‘공제눈’.
길티 플레저와도 같았던 내 최애 소설 속 세계였다.
‘공제눈’은 만인의 선망을 받는 공작가 후계자와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상경한 캔디형 여주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로, 연재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왜 길티 플레저였느냐고? 그토록 인기가 있었던 만큼 막장성을 두루 갖췄으니까!
출생의 비밀, 예비 시가의 반대는 기본에, 찻물 샤워와 금화 주머니도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남주와 여주가 운명적인 관계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들의 사랑에는 역경이 심하게 많았다.
‘그 고구마가 차지기는 정말 차졌지. 그렇게 전개가 답답한데도 ‘공제눈’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편만 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시대를 풍미한 막장 고구마밭에 빙의한 게 어떻게 생후 두 달 차의 안면 근육도 움직일 만큼 행복한 일이냐고?
말했다시피 나는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까!
제국은 태평성대였고, 내 부모님이 된 황제 부부는 금슬이 좋다 못해 손주 볼 나이에 나를 생산했다.
최소 열두 살은 많은 형제들은 또 얼마나 우애가 깊은지, 까마득한 막둥이인 내가 목숨의 위협 같은 건 모르고 자랄 예정이었다.
게다가 내 언니들과 달리 대단한 요직을 맡았던 것 같지도 않다.
‘큰 의무 안 지고 사랑만 받으면 되는 막내 황녀님. 달다, 달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작에 내 분량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막내 황녀 전하께서 벌써 정무 회의에 배석하신다죠?”
“어찌나 영명하신지 조만간 중책을 맡으실 것 같다고들 하더라고요.”」
이처럼 단역들이 수군대는 말에 언급된다거나.
「“경께서는 4황녀 전하와 정말 막역하신가 봐요. 애칭으로 부르시는 것을 보면….”」
여주의 질투를 사 두 사람의 마음을 깊어지게 하는 장치로 등장하는 정도였달까.
그 막장 고구마밭에서 내 분량이 개코딱지만 했다는 것은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내 삶은 이야기의 흐름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 인생에는 데드 플래그도 없고, 남주와 여주의 사랑에 시련을 선사하는 서사 폭풍도 남의 일일 예정이었다.
작중에서 고구마밭을 뒹구는 건 주인공 커플뿐이지, 거기에는 황실도 나도 아무런 지분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저 태평성대 황실의 막내로 즐겁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까르륵, 절로 웃음이 나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