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또, 전하시군요.”
내심 기다리기라도 했던 걸까.
낮게 울린 목소리에 반가움이 이는 것을 눌러 내리며, 나는 내 앞에 나타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피부,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무기질적인 다갈색 눈동자, 깔끔히 빗어 넘겨서 낮게 묶어 내린 칠흑 같은 머리칼.
언제나처럼 검은색 일색인 연미복에, 목울대 바로 아래서 바투 여민 목깃까지.
그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오늘따라 왜 얄미워 보이는 걸까.
그러니까, 그가 결국 이곳에 등장하고 말았다는 것은….
나는 부러 못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또 나야. 경은 아쉽겠지만.”
“…….”
그는 갈증이라도 난다는 듯, 넥타이를 긁듯이 당겨 느슨하게 했다.
덩달아 풀어지는 목깃. 금욕적으로 보이던 그의 인상은 슬며시 퇴폐적이 되었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하께서 이곳에 계신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그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창을 등진 그의 실루엣을 타고 달빛이 흘렀다.
나는 그러니까, 이런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에도 열의 없는 목소리,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는 다갈색 눈동자.
하지만 그 내면에 억눌린 격정이 그를 이 자리로 이끌었을 터….
‘역시 그녀를 사랑해서….’
그런 그를 잠시나마 반가워했다고 생각하니 조금,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그 기색을 들킬세라,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이 내 얼굴을 비추지 않도록.
“왜 모르겠어? 경이 로즈버리 영애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저지됐다는 거지.”
“…….”
“미안하게 됐어.”
나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어 보였다. 로브의 후드를 바싹 여며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내 손안에는 작은 스위치가 있다. 손짓 한 번이면 바깥에서 대기 중인 암조의 기사들이 쳐들어오게 할 수 있는 마도구.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용한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앞의 이 남자는 마법사.
그것도 거대한 마력을 지녔음에도 마탑에서 수학하지 못하고 스스로 개발한 술식을 쓰는 마법사였다.
그의 변칙적이고 가벼운 술식 하나마저도 기사들은 파훼하기 힘들 거였다.
‘그가 현세대에 가장 강력한 마력을 지녔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가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아니,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여기에 나타난 걸 보면…. 역시 모두 내 착각이었던 거야.’
가라앉는 마음의 연유를 알려고도 않고, 나는 위악적인 미소를 입에 걸었다.
잔잔한 수면에 돌멩이를 던지는 마음으로.
“그거참, 실망스럽겠어?”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것이 불쾌한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복잡해지는 마음의 겹겹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 지는 사실 꽤나 오래되었다.
애초에 그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로즈버리 영애, 아멜리. 이 세계의 여주인공.
내 앞의 남자, 루시페우스는 그녀에게 돌아버린 나머지 납치까지 불사하는 집착 서브 남주의 운명을 진 인물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주인공들의 연애 전선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을 이번 생의 목표로 삼은 빙의자.
그런 내가 그의 계획을 번번이 방해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여주인공을 납치하려고 판 함정에 내가 대신 빠졌을 정도로.
주인공 커플의 연애에 시련이 될 수작들을 막아내면서 몇 번이고 으르렁댄 얼굴인데, 오늘은 뭔가… 다른 기색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낙담일까, 또는 짜증일까.
어쩌면 분노일까.
그 궁금증에 표정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나는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노려보았다.
“어쩌나, 그래도 날 원망하진 마. 경이 연정에 미쳐서 작전이 좀 허술했던가 보지. 이번에도 헛수고하게 되었어.”
“확실히 그건 아쉬운 일이군요.”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가 아멜리를 향한 제 연심을 내비칠 때마다 속절없이 마음이 내려앉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그런데.”
나를 내려다보던 루시페우스의 눈빛이 짙어졌다.
“전하께 번번이 틀어 막히니, 제 체면이 말이 아니어서 말입니다.”
루시페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소리에는 아쉬우리만치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래, 아쉬우리만치….
“그러게 좀 더 건강한 사랑을 하지 그랬어? 짝이 있는 이가 아니라.”
“짝이 있는 이, 말씀이십니까.”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에서 선득하게 빛났다.
아, 그가 아멜리에게 반한 게 그녀가 남주와 맺어지기 전의 일이다 이건가.
“그게 가장 큰 문제잖아. 물론 그 짝이 경의 정적인 레오폴트 경인 것도 문제지만 말이야.”
“…전하께서는 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더군요.”
저벅,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나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내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한층 짙어졌다.
그의 시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내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황성 저잣거리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번 비밀 경매에 어떤 물품이 나오는지, 그것을 왜 귀족파에서 탐하는지.”
“그거야….”
“심지어는 게이블스 후작가의 후계 싸움이나 귀족파에서 힐베르크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답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나는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면서….”
말꼬리를 흐린 루시페우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불필요하리만치 정적이 길어지던 그때.
불쑥,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언제나처럼 검은색 장갑이 끼워진 그의 손.
내 쪽으로 움직이려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느릿하게 물어 장갑을 벗겨냈다.
결벽적으로 온몸을 감싸는 그는 이따금 내게만 맨손을 내보이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 때문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에 가슴이 떨릴 무렵이었다.
“…전하께서 친히 행차하실 것도 없으셨지 않습니까.”
그의 손끝이 내 턱 끝에서, 또 뺨 언저리에서 어정대더니, 이윽고 엄지가 내 입술을 꾸욱 눌렀다.
나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고 있던 입술이 잇새에서 빠져나왔다.
언제나처럼 조금 찌릿한 듯도 하고, 뜨거운 듯도 한 그의 손길….
나는 흐무러지는 낯을 들킬 수가 없어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드리운 그늘로 숨어들듯이.
내 얼굴에 닿았던 그의 하얀 손이 우리 사이 어딘가에 멈춰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조금 쓸쓸한 듯 보이기도 했다.
아니, 모든 건 내 착각일 거였다.
‘어쩌면 정중한 동정심인지도….’
나는 자조적인 마음을 추슬러,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글쎄,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친히 알려주고 싶었달까? 나라고 경을 만나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그러셨다면 무의미한 일을 하셨군요.”
그의 낯이 그늘 속에서 미묘하게 굳었다.
그래, 아멜리를 손에 다 넣은 줄 알았는데 실패했으니 내가 밉겠지.
나는 더 뾰족한 말을 입에 물었다.
“경에게나 무의미하겠지. 그리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했으니까.”
루시페우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기만 한 낯에, 나는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 착각을 하게 만들어서.
왜 결국에는, 끝의 끝까지 여주인공에게 향한 마음을 거두지 못해서.
“그런다고 로즈버리 영애가 그대에게 마음 한 조각이라도 줄 것 같아?”
“…….”
“그거 사랑 아냐. 그냥 비뚤어진 마음이야, 경. 정신 차려.”
여전히 묵묵부답인 그의 눈동자 한편에 어떤 열기가 배어났다.
내 말들이 그의 신경을 긁는 데 성공한 걸까. 어쩌면 악담을 퍼붓는 내게 마음이 상한 걸까.
“설령 그게 사랑이어도, 경의 표현 방식도 틀려먹었어.”
그래, 나는 불쾌했다.
대꾸하지 않는,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그의 침묵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왜일까. 나는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그리고 왜, 그의 연심이 사랑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은 걸까.
여전히 내 입술이 있던 자리쯤에 머물러 있던 손을, 그는 천천히 말아 쥐었다.
그 느릿한 손짓이 내키지 않는 것으로 느껴져서…. 그러니까, 이런 게 문제였다.
자꾸만 그의 행동에서 다른 의도를 읽게 되는 게.
퍽.
나는 그의 가슴팍을 냅다 갈겼다.
거기에는, 그래, 필시 원망이 담겨 있었다.
“왜 안 피해?”
담담한 낯으로 맞고 있는 그를 보니 또 속이 끓어올랐다.
“애먼 데 매달리지 말고…!”
“뭘 모르는 건.”
한 번 더 팔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내 손목이 그에게 덥석 잡혔다.
빼내려고 비틀어 보았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심도 않는 이 커다란 손에서 빠져나갈 방도란 전무했으니까.
“이거 놔!”
반대쪽 팔을 들어 휘둘렀지만 곧 같은 신세였다.
그의 맨손으로부터도, 장갑을 낀 쪽으로부터도 조금 뜨거운 듯한 온기가 배어났다.
“놓으라고!”
악에 받친 내가 비명처럼 소리쳤음에도,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그의 눈동자.
오기가 동해 온 힘을 다해 양팔을 비틀어 보았지만, 내 손목을 옭아맨 그의 손에는 미동도 없었다.
“뭘 모르는 건 제가 아니라.”
갑작스레, 그가 내 손목을 틀어쥔 채로 양팔을 당겼다. 중심을 잃은 내 눈앞에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들어왔다.
“…전하 아니십니까.”
“내가 뭘? 경보다는 뭐든 잘 알아. 지금 경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도….”
“그런 걸!”
바로 머리 위에서 갑작스레 울린 말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가 내지른 목소리가 커서가 아니라,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내 말을 끊겠다고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숨죽였음이 선연했다.
…이런 신뢰가 쌓인 게 문제 아니었을까.
“그런 걸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그의 다갈색 눈동자를 보며 나는 늘 무감정하다고만 생각했건만…. 그의 눈동자에는 명백히 어떤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어?”
“전하께서… 위험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에 만들어 넣었던 표정을 잃어버렸다.
“혹여 이렇게라도 뵐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정말로 오실 줄은….”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낯을 살폈다.
그의 낯에는 미묘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고통, 안타까움, 안도감, 걱정, 그런 감정들이 희미하게 범벅된 채로.
이런 걸 기다렸던 걸까. 마음에 얹힌 듯했던 무엇인가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천천히 그의 이마가 내게로 떨구어지고…. 나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이는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자리에 내가 오고, 그것을 알고 그가 온 것처럼.
그래 어쩌면, 내가 이 세계에 태어난 것으로 인해 정말 구원할 이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