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마신(魔神). 완결. >
93, 마신(魔神).
신마는 이훤을 향해 양 손을 뻗었다.
“나와 함께 지옥에 가서 영겁의 세월 동안 함께 하자. 그러다 보면 정이 들어서 비밀을 이야기하고 싶어 질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 새끼가 너무 오랫동안 숨어 지내서 친근함이 고팠냐? 왜 이렇게 질척거려?”
이훤은 혈륜을 끌어내 신마의 기운을 튕겨내려 했다.
하나 손 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신마의 심득이었다면 혈륜은 금세 차올랐을 게다.
그러나 축융노도의 진생일선(盡生一線)은 신마의 심득에 소우주경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훤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진생일선의 의미처럼 생의 기운을 다하여 하나의 선을 그렸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어차피 회귀 전을 보면 지옥에 가도 몇 번은 갔으니까.’
애써 아쉬움을 달래볼 뿐이다.
그 때 누군가 이훤의 등에 손을 가져다댔다.
“네가 죽으면 낙안봉의 술은 누가 관리하겠느냐?”
망아취자였다.
“스승님?”
이훤이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전신에 활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훤의 두 눈은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진생일선은 돌이킬 수 없다.
생기를 소모한 이에게 남은 건 죽음 뿐이다.
한데 이것은 단순히 단전을 채우거나, 혈맥에 기운을 휘돌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
“노도가 그러더라.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있듯 진생이 있다면 재생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훤은 그 순간 형산부터 마교까지 두 노인이 한 몸처럼 붙어 다녔던 것을 떠올렸다.
“하, 저는 기껏해야 진생일선을 배우시는 걸로 생각했는데요?”
“나는 네 삶의 모든 시간을 합친 것보다 오래 살아왔다. 그러니 너도, 신마도 모르는 비기 정도는 갖춰야 어른 대접을 받지 않겠느냐?”
“으으으으으.”
이훤은 눈을 부릅떴다.
마치 회귀 전 자신의 정수리를 통해 누군가 혼백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면 이번에는 정수리를 통해 혼백을 쑤셔 넣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 사이 신마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살아 있는 채로 같이 지옥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훤은 진저리를 치며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하나 죽었다가 살아나는 몸뚱이는 제아무리 혈륜이라고 해도 곧장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때 이훤의 귓가에 망아취자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재생을 알고 아니니 진생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오더구나.”
망아취자는 검을 들었다.
“안 됩니다. 그걸 펼치면 죽어요.”
이훤이 이를 악문 채로 힘겹게 한 마디를 읊조렸다.
망아취자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촤악!
신마의 신형이 반으로 갈렸다.
그 순간 땅 속에서 솟구치던 악취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신마의 신형은 서서히 소멸되기 시작했다.
“어, 어! 이게 무슨 조화더냐?”
등선이 막히고, 지옥에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자다. 망아취자는 갑작스런 신마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을 건넸다.
“그대는 참으로 오만하구려.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등선보다 고통스럽더라도 의념이 살아 있는 지옥을 택하지 않았소이까? 그걸 알면서도 그냥 보낼 수는 없더이다.”
망아취자는 손을 흔들었다.
“이제 사라지구려.”
신마는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온갖 저주와 원념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했다. 하나 먼지 한 톨까지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순간 어디에서도 신마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망아취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훤은 아직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무릎걸음으로 움직였다. 망아취자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유언을 남길 뿐이다.
“옥주가 죽었다. 화산은 네게 맡기마.”
“아.”
이훤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한데 탈마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탄성을 흘렸다.
“어, 어, 어!”
이훤은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마가 사라졌음에도 허공에서 다시금 빛무리가 뭉쳐드는 것이 아닌가.
“설마?”
이훤은 이를 악 물고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야 말로 갈가리 찢어발겨서 영겁의 시간이 흘러도 머리통을 내밀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자 했다.
한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움직이는 태양의 빛이 한데 뭉쳐들었다. 그 빛이 망아취자에게 닿는 순간 그의 신형은 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몸뚱이가 녹아내리는 광경은 흉측할 터였다.
솨아아아아아-
한데 망아취자가 사라지는 광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사람을 경건하게 만들었다.
“스승님이······.”
이훤조차 힘겹게 겨우 한 마디를 읊조렸을 뿐이다.
망아취자의 육신은 가루로 변한 후 돌개바람을 타고 하늘로 서서히 솟구쳤다. 그 흔적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하늘에 단 한 점의 구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 곳만을 비추던 햇빛이 다시금 천하를 비추기 시작했을 때였다.
“일전에 노도께서 망아취자께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맹주가 다가와 공손히 말을 건넸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등선 또한 그렇다고요.”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하늘의 조화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직접 그 이적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등선하지 않으려고 했으면 끝까지 하지 말지.”
그저 망아취자에 대한 아쉬움을 투정부리듯 내뱉는 것이 전부였다.
이훤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망아취자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맹주에게 물었다.
“여기에 매화를 심어도 되겠어?”
맹주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아취자의 의기가 오랫동안 전해지도록 제 쪽에서 먼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훤은 옅은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맹주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관주는 이제 영세제일인이 되셨으니 맹에서 함께 만민을 위해 힘써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이훤은 술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마교가 없어졌으니 정파도 썩어가겠지.”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관주가······.”
맹주의 말이 끝나기 전 이훤이 돌아섰다.
“화산으로 갈 거야. 거기라면 모든 걸 지켜볼 수 있으니까.”
이훤을 따라 괴마들이 움직였다.
맹주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그가 화산에서 내려온다면 강호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신마의 심득을 만천하에 퍼트렸으니 지금껏 강호를 유지하고 있던 법과 예는 힘을 잃었다. 하나 그 또한 강자들이 만들어낸 법과 예가 아니던가.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무인들은 다시금 법과 예를 이뤘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누군가 인간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도와 의를 저버린다면 여지없이 그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괴마(怪魔).
정파의 세상이라면서 마(魔)라는 호칭을 거리낌 없이 쓰는 자들이다. 그들의 머릿수가 몇 명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소속된 이가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두 가지만이 전해졌다.
그들의 근거지는 화산이다.
그들의 수장은 마의 신, 마신(魔神)이라 불렸다.
그렇다.
새로운 강호에서는 정파의 상징이었던 화산에 마신이 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신은 술을 좋아했다.
아주 많이, 광적으로, 지치지 않고 매순간 말이다.
“아, 오늘도 너무 마셨어.”
화산의 낙안봉에 터를 잡은 마신은 오늘도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고, 오랜만에 꿈을 꾸는 중이다.
그것도 회귀 전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꿈이었다.
*
아마 야림(野林)이라고 불리는 곳이리라.
중원의 남쪽, 복주의 외곽 해안가에 펼쳐진 작은 숲이다.
본래 낭인과 유민들이 바닷바람을 피해 쉬어가는 장소였지만, 오늘따라 고즈넉하기 짝이 없다. 하나 돈 없는 이들과 상관없는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진동을 했다.
“경치 죽이네요.”
탈마(奪魔)가 엉덩이를 긁적이며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엉덩이를 긁던 손으로 떡 진 머리카락을 헤집었고, 잠시 후에는 코를 팠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할 때 나오는 녀석의 버릇이다.
이훤은 회귀 전과 후가 똑같은 탈마를 보며 웃고 싶었다.
하나 그는 꿈속에서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증거로 이제는 낯설기만 한 회귀 전의 자신, 취마(醉魔)가 욕을 퍼부었다.
“무식하고 더러운 놈.”
그가 괴마들을 향해 일장연설을 했다.
“경치라고 해봤자 다 거기서 거기야. 중요한 건 뭘 할 건지, 뭘 할 수 있는지가 아니겠냐?”
한쪽에서 묵빛의 패검을 만지작거리던 검마(劍魔)가 유달리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훤은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이번 생에서는 검마를 만나지 못했다.
아마 자신의 행적으로 인해 검마의 삶도 바뀐 것이 아닐가 싶다. 잠시 아쉽기는 했으나, 녀석의 비릿한 한 마디를 듣는 순간 그리움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한 판 하실라우?”
“갑자기?”
검마는 모래와 흙이 반씩 섞인 땅을 발로 파헤쳤다.
“보쇼. 걸을 때마다 푹푹 들어가네. 이런 곳에서 싸우는 경험은 흔치 않잖아. 그러니 대형, 오랜만에 나와 한 번 겨뤄봅시다.”
“반 시진 전에 싸웠잖아. 너, 나한테 맞고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거냐?”
취마가 헛웃음을 짓자, 탈마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싸워라! 싸워라! 아! 싸움구경을 공짜로 할 수는 없지. 자! 이기는 쪽에게 내가 이걸 선물로 주겠어.”
탈마는 호기롭게 외치더니 낡은 책자를 땅에 던졌다.
전능팔번도(全能捌飜刀).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힌 제목만 봐도 오래된 비급이 분명했다.
취마가 눈을 끔뻑였다.
“뭔데?”
탈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 고기 사러 갔을 때 엄청 부자처럼 보이는 노인네가 있어서······.”
슬쩍 했다는 뜻이다.
길가에서 슬쩍 했으니 물건의 주인을 알 리 없고, 까막눈이니 훔친 물건의 진위 또한 알 길이 없다. 그저 탈마라는 별칭답게 본능적으로 귀해 보이는 걸 훔쳤으리라.
하지만 궁금한 걸 해결하는 방법은 참 쉽다.
탈마는 생사대적을 대하듯 고기를 굽고 있는 색마에게 물었다.
“야! 이거 뭐냐?”
하나 색마(色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탈마가 입술을 삐죽이며 취마에게 턱짓을 했다.
결국 그가 한 숨을 내쉬며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흐음, 저기 색······.”
색마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형님, 저건 전능팔번도라고 합니다. 비급이지요. 하오문에서 무공의 경지를 나눌 때 전능팔번도라면 갑 급 비급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니 전능팔번도가 강호에 반출되면 아마 꽤 많이 죽어나갈 겁니다.”
툭 치니까 전능팔번도에 대한 모든 정보가 쏟아졌다.
“전능팔번도는 대력도제의 진신무공입니다. 이 또한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열 명의 피해야 할 자와 열 명의 경계해야 할 자. 대력도제는 후자입니다. 고로 저 비급을 형님이 챙기셔도 별 위험은 없을 겁니다.”
“어, 고마워.”
취마의 한 마디에 색마는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형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제가 뭐든 다 알아오겠습니다. 형님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드세요.”
“저 새끼는 대형 없었으면 어찌 살았으려나?”
탈마가 투덜거렸지만, 색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구워서 대령하겠습니다.”
탈마는 색마의 등을 향해 침을 뱉더니 헛기침을 연발했다.
“크흠! 어쨌든 이게 그렇게 대단한 어! 누구라고 했지? 하여간 그 노인의 무공 비급이라고요. 이기는 사람에게 상품으로 드리겠습니다!”
취마가 털썩 주저앉았다.
“귀찮아.”
검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이 최고야. 이류 병장기 따위를 익혀서 뭐하라고?”
“그래서 안 싸울 거야?”
취마가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낯선 곳에 왔으니 당연히 술을 한 잔······.”
그 때 나무 위에서 신경질적인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조용히 좀 해. 이 새끼들아!”
면사를 쓴 여인은 나무에 기댄 채 한숨을 흘렸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 술, 도둑질, 싸움, 남색. 창피하지도 않니?”
“술 마시는 게 죄는 아니잖아.”
“그럼 무인이 싸우지, 노냐?”
“도둑질이라니! 잠시 빌려온 거지.”
“저는 굳이 평가하시려거든 남색이 아니라 취색이라고 해주시겠어요?”
한마(恨魔)는 한숨을 연발했다.
“진짜 거지같아. 지금 이러고 놀 때가 아닌데. 이래서야 언제 사부님의 복수를 할 수 있겠냐고?”
이훤은 이번 생과 전혀 다른 한마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생의 한마는 회귀 전과 달리 참으로 착했다. 오늘 먹은 안주도 모두 그녀가 직접 만든 음식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해장에는 그녀가 만들어주는 죽이 최고다. 꿈에서 깨어나면 죽을 쑤어달라고 해야겠다.
하나 회귀 전의 취마는 한마를 달래는 방식을 모르는 듯했다. 그는 숨겨놓았던 술병을 꺼내며 은근슬쩍 물었다.
“이거 마시고 기분 풀래?”
탈마가 정수리에 꽂고 있던 화려한 옥비녀를 꺼냈다.
“이거 낄래?”
“고기 드세요.”
“나와 싸워서 성장해라! 그럼 복수는 금방이야!”
하나 한 번 돌아누운 한마는 말이 없다.
취마가 손짓을 했다.
“우리 막내가 그 날인 것 같으니 모두 말을 가려서 해라.”
“오라버니가 제일 그지 같아!”
한마의 짜증 섞인 일갈과 함께 나뭇가지가 날아왔다. 취마는 슬쩍 상체를 기울인 후 술병을 들었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술병의 마개를 절묘하게 뜯어내며 사라졌다.
“술을 마실 수 있고, 술을 마시게 되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네.”
취마는 되도 않는 노래를 중얼거리며 술을 머금었다.
그 사이 색마가 대접 가득히 고기를 담아왔다. 그리고는 취마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채 젓가락을 내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먹여드리고 싶지만, 대형께서 너무 부끄러워하시니 제가 양보하는 겁니다.”
“야! 대형만 입이냐?”
탈마의 말에 색마는 슬슬 탄내를 풍기기 시작한 석쇠 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 잘하는 것처럼 훔쳐 드세요.”
검마가 그 사이 수련이라도 하는 지 허공을 향해 칼질을 시작했다. 탈마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른 후 발소리를 죽인 채 석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좋네.’
취마는 이 모든 광경을 한 눈에 담은 채 웃었다.
“어! 소마가 왔다!”
잠시 조용해졌던 공터가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얼굴 가득 미소를 드리운 채 나타났다. 그는 취마 앞에 서서 예의바르게 포권을 했다.
“형님, 다녀왔습니다.”
취마는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히죽 웃었다.
“어! 내 동생. 고생 많았어. 앉아. 앉아. 배고팠지? 고기부터 먹어라.”
그만큼 피붙이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준비한 독주를 마신 건 열흘 후였다. 하나 그것을 알 리 없는 취마는 탈마의 젓가락을 쳐내며 일갈을 내질렀다.
“야! 소마꺼 뺏어먹지 말라고 했다!”
“아니, 나도 동생이잖아! 이렇게 차별하실 거요?”
이훤은 한데 둘러앉아 시끌벅적한 광경을 응시했다.
조금은 그리웠던 광경에 소마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짜증이 물밀 듯이 솟아올랐다.
그는 한쪽 눈을 감고 검지로 소마를 가리켰다.
‘넌 빠져라.’
검지를 흔드는 순간이었다.
나무 사이로 어디선가 기파가 일렁였다.
그리고 소마의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지며 튕겨나갔다.
이훤은 아비규환이 된 야림을 뒤로 했다.
‘그렇게 안타까워하지 마라. 그 새끼는 개새끼야.’
그리고 그가 손을 흔드는 순간 꿈이 스스로 물러갔다.
“형님. 깼소?”
“하아, 왜?”
탈마는 조금 어른스럽게 변했다.
그래도 이십 년이 흘렀거늘 아직도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다.
“형님도 갈 때가 됐나 봐요?”
“개소리나 할 거면 가서 술이나 가져와.”
이훤의 윽박지름에도 탈마는 여유로웠다.
괴마 중에서 유일하게 이훤을 혈육처럼 여겼기에 대놓고 기어오르려고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예전에는 백일 밤낮을 마셔도 거뜬했는데 말이야.”
“자고 싶어서 잔거다.”
“그럼 일어났으니 뭐 할 거요?”
이훤은 눈을 반개한 채 심호흡을 했다.
그 순간 엄청난 양의 주독(酒毒)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서 헛구역질을 하고, 도망치는 자들이 즐비했다.
“아! 뭐야?”
“술 깼으니까 술이나 마시련다.”
탈마는 코를 막은 채 입술을 삐죽였다.
“마신이라고 불린 지 십 년이 흘렀어요. 이쯤 되면 뭐라도 좀 해줘야 별호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거 아닙니까?”
“가서 강호라도 통일할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너도 할 수 있잖아. 묘마나 악마를 꼬셔서 해.”
이훤의 시큰둥한 한 마디에 탈마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 노인네들이 미쳤나. 요즘 연애하느라 낙안봉 근처에도 안 온다고요. 아니, 애초에 말이 돼? 그 지경인데 정분이 난다고?”
“너는 진짜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더럽고, 무식해.”
탈마는 미간을 좁혔다.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
“바람에 좋은 바람이 있고, 나쁜 바람이 있더냐? 경지에 이르니 성별도 의미가 없고, 금수라면 또 어떻겠냐? 너도 지금부터라도 잘 해. 마음을 나눌 지기란 평생에 걸쳐도 얻기 힘든 법이다.”
“형님은 있소?”
이훤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네가 데리고 올 거잖아. 저기 저 항아리로 가져 와. 오늘은 저 녀석이다!”
탈마는 땅이 꺼져라 한 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술 항아리를 들고 왔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다른 애들하고 해.”
“전마는 돈에 미쳤어요. 금자로 산을 쌓겠다던데요? 색마, 이 새끼는 어차피 내 말은 똥으로 듣고. 한마는······. 아! 진짜 지극정성이다.”
한마는 그 사이 안주를 만든 듯 김이 솔솔 나는 볶음을 내왔다. 아마 이훤이 잠에서 깨어나 탈마와 대화를 시작했을 때부터 안주를 만들기 시작한 듯했다.
“이쯤 되면 혼인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탈마는 투덜거리다가 한마의 눈 흘김을 받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 이거 드세요.”
“응, 고마워.”
한마는 안주만 건넨 채 다시 자리를 떴다.
“형님, 생각 없소?”
“군림도, 혼인도 다 생각 없다.”
“왜요?”
이훤은 술 한 잔과 한마의 요리로 세상을 얻은 듯한 표정을 보였다.
“지기란 굳이 혼인이라는 굴레가 아니어도······.”
탈마는 이훤의 말을 듣다가 그냥 자리를 떴다.
그 때 창공에서 기음이 울렸다.
삐이이이익-
동시에 사람의 몸뚱이만한 매가 내려앉았다.
색마가 애용하는 전서응이다.
그리고 분명 녀석의 이름은······.
“어! 취마다.”
탈마는 오랜만에 온 바깥소식에 히죽거리며 전서응을 맞이했다. 반면 이훤은 전서응을 보자마자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색마는 낙안봉에 보내는 전서응마다 이훤과 관련된 이름을 지어줬기 때문이다. 이훤의 매타작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훤이라는 전서응도 있었으리라.
“형님! 형님! 큰 일 났어요.”
“네가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전혀 큰 일이 아니겠군.”
“쾌마가 당했어요!”
이훤은 쾌마(快魔)라는 호칭에 눈을 끔뻑였다.
마가 붙었고, 탈마가 저러는 걸 보니 아무래도 괴마인 듯했다.
“그런데?”
“쾌마가 감숙성 기련산에서 노괴들에게 암습을 당했답니다. 중상이래요.”
“안 죽었으면 됐지.”
하나 탈마는 시키지도 않은 전서를 열심히 읽어내려갔다.
“난주에서 패검이라는 자를 만나 호형호제를 하게 됐고, 의기투합해서 장성 밖 마적떼를 없애려고 했데요. 아! 패검이라는 자는 검에 아주 환장한 자라네요. 하루 세 번 비무를 하지 않으면 똥을 싸지 못한다는······. 아 더러운 새끼.”
왜인지 모르게 이번 생에서는 만나지 못한 자가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회귀 전의 인연을 회귀 후까지 꼭 이어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가 용화라는 여자를 알게 됐는데 엄청 미녀랍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중원삼미라고 불리는 여협 중에서도 용화라고 있었지요.”
이훤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하나 탈마는 중원삼미(中原三美)를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통하지 않을 걸 알았나 보다. 그렇기에 전서를 읽으면서도 기운을 내지 못했다.
“기련산의 천설쌍괴가 쾌마를 유인하기 위해 설화산명주를 미끼로 삼아....”
파팟!
탈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설화산명주(雪華酸蓂酒)라는 말에 이훤이 단추를 건드린 기관처럼 저절로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훤은 눈을 부릅뜬 채 외쳤다.
“어디라고?”
탈마는 호응하듯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기련산! 갈 거예요?”
이훤은 비장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가야지! 설화, 아니 쾌마를 구하러!”
탈마는 히죽 웃으며 내공을 담아 사자후를 내질렀다.
“얘들아! 하산하자!”
그 순간 낙안봉 곳곳에 퍼져 있던 괴마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신을 필두로 백여 명의 괴마가 구름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낙안봉을 질주했다. 그 날 이후 마신이 괴마들과 하산했다는 소식에 강호의 모든 방파들이 문을 걸어 잠갔다.
- 그와 술로 얽히지 마라.
- 그가 술을 마시고 있다면 자리를 피해라.
- 그가 술에 취했다면 유언을 남겨라.
취마(醉魔) 이훤에 대한 평은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마신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 93, 마신(魔神). 완결.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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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일전 휴재 때 연재됐던 외전 부분이 포함됐습니다.
하나 외전 부분을 제외해도 5800자이니 문제는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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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즈음에 이르러 연재 주기가 흔들린 점을 먼저 사과드립니다.
몇 개의 글을 써왔지만, 이번 글은 참으로 아쉬움이 많습니다.
초반에 잡아놓은 설정이 흔들리고, 예상 외로 뻗어나가는 바람에 실망하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저 또한 그것을 알기에 이리저리 바로잡아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하고자 했던 것을 하게 되어 그나마 아쉬움이 덜한 듯 합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저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글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글을 써왔기에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고, 잠시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멋지게 이겨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부분이 아직도 마음에 남네요.
하나 이 일을 직업으로 택했기에 저는 다시 글을 쓰겠지요.
다음 글도 아마 무협이 될 것이고, 지금보다 변화되고 나아진 글을 쓰려고 노력할 겁니다.
노력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좀 더 잘해보려 합니다.
그 때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여러분을 만나 즐겁게 연재를 하고 싶네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함께 호흡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전합니다.
저는 언제나 그렇듯 글로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름이 찾아왔으니 건강 주의하시고, 언제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멀리서나마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