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25화 (225/226)

< 92, 마(魔). (2) >

명확했다.

눈앞의 빛을 등 뒤의 어둠이 덮친다.

선악의 명확한 대비에 모든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나 양측의 기세가 떠오르는 해와 같았기에 감당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선택지는 하나였다.

“악귀다!”

“적이 온다!”

있는 힘껏 외치며 자리를 피했다.

무림맹주인 독천무협 이학주는 한 눈에 상대를 알아봤다.

‘취선관주?’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것을 나눈 상대였다.

그렇기에 이훤에 대한 신뢰 또한 대단했다.

그는 내키는 대로 행동할 뿐 명예나 이권을 탐하지 않았다. 그저 향 좋은 술 한 잔이면 어지간한 원한 따위는 훌훌 털어버리리라. 좋은 쪽으로는 호탕했고, 나쁜 쪽으로는 흔한 술주정뱅이였다. 그렇기에 이훤이 적이라고 여기는 자에 대한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는 천상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어디선가 선학이 날아올 것처럼 신령스러웠다. 그렇기에 자신 또한 조금 전만 해도 하늘이 무림맹에 축복이라도 내리는 줄 알았다.

한데 이훤이 등장한 이상 생각이 바뀌었다.

‘저것이 신마인가?’

그는 구파오가 출신과 달리 유협으로 살아왔다.

그렇기에 진실이란 철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한 쪽만 보고 판단할 수 없음을 뼛속 깊이 새겼다. 그리고 그런 성정으로 인해 맹주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게다.

오랜 경륜으로 인해 쉬이 결단을 내렸다.

“비켜라! 길을 열어라!”

멸마회의 무인들은 신분과 무위를 떠나 상석에 자리했다. 마교를 무너트리고 돌아온 이들이니 명성만큼은 이미 중원 전체에 퍼졌을 정도였다. 그들은 맹주의 명령을 기다리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신마다!”

군웅들은 경악을 하며 비켰다.

하나 그들이 노려보는 건 머리 위의 광휘가 아니라 무림맹을 돌파하는 핏빛 기운이었다.

“그 쪽이 아니야. 저게 신마다!”

맹주가 허공을 가리키는 순간 멸마회마저 한순간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 누가 봐도······.”

“신마가 저런······.”

그 때 핏빛 장막 속에서 이훤의 일갈이 들려왔다.

“네 깟 놈이 등선을 하도록 그냥 둘 성 싶으냐!”

군웅들이 우왕좌왕하는 건 당연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악당이 어느 쪽인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어찌됐든 그 덕에 길이 열렸다.

이훤은 도움닫기를 하듯 십여 장씩 뛰다가 한순간 사십 여장을 날았다.

솨아아아아아아!

군웅들은 핏빛 장막이 머리 위로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통로처럼 일렁이던 백광과 피처럼 너울거리던 적광이 충돌했다.

텅-

미약한 울림이 전부였다.

초절정의 무인이라고 해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적광이 백광과 뒤섞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나 절대지경을 넘어선 이들은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기운이 섞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연지기 자체가 충돌하는 광경을 말이다.

마치 결코 마주할 수 없는 기운끼리 충돌한 듯했다.

해와 달이 만나고,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 출렁거렸다.

그 여파가 한 호흡 후에 대지를 뒤흔들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다행히 강호에서 손꼽히는 자들만 모인 자리였다.

하급 무인들까지 모였다면 기파가 퍼져나가는 순간 시신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으리라. 하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파장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크흑!”

하늘에서 낙뢰가 내리꽂혔을 때 사방으로 흙과 돌이 튕기듯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튕겨나갔다.

- 천의가 뜻하는 바가 명확하거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사감을 드러내니 너야 말로 사기요, 마기로구나!

신마의 웅혼한 외침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자들의 귓가를 적셨다.

- 하늘의 부름을 거역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마의 기운만은 짓눌러야겠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위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착한 척 하기는! 너 같은 새끼는 하늘 근처도 못 가게 만들어야 해!”

이훤은 악을 쓰듯 외쳤다.

그 때 신마의 전음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한마의 죽음은 새 시대를 밝힐 등불과도 같다. 그 아이를 비롯해 헛되이 사라져간 수많은 생명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개새끼!”

[내가 하늘에 올라 그들의 혼백이나 굽어 살피리라.]

신마의 조롱과도 같은 위로로 인해 이훤은 혈륜을 거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백광이 사람의 형태를 취했다.

“너는 내가 죽인다!”

이훤의 외침에 신마의 손처럼 보이는 빛무리가 움직였다.

그 손끝이 이훤을 가리키는 순간 자연지기로 이뤄진 한 줄기 기파가 흘러나왔다. 마치 시간을 접어서 세상보다 빠르게 흘러가듯 기파가 닿는 모든 것이 생기를 잃고 말라붙었다.

이훤은 팔황과 무극을 내세워 백광을 마주했다.

“크흑!”

그 순간 맹주전의 지붕에서 바람이 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검이 묘마의 손끝을 따라 흩뿌려졌다. 수천 개의 무형검이 바람을 공간을 가른 끝에 도착한 곳에 신마가 있었다.

- 무지에 패악을 저지르니 괴마라고 하더냐?

신마의 손짓 한 번에 수천 개의 무형검은 자취를 감췄다.

애초에 양측 모두 자연지기를 운용하지 않던가.

그러니 양보다는 질이었다.

신마의 농축된 기운은 무형검을 상쇄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묘마의 전신을 덮어버렸다.

“쿨럭!”

묘마는 지붕 끝까지 밀려나면서 검붉은 피를 토했다.

“멍청이! 혼자 나서지 말라고 했지!”

악마가 우려인지 짜증인지 모를 일갈과 함께 나타났다. 그가 한 걸음 늦은 것은 병기고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가 발을 구르는 순간 병기고에서 모조리 꺼내온 장창이 일제히 솟구쳤다.

- 대자연의 이치만 알 뿐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과욕을 부리는구나!

신마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저으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묘마가 피 묻은 입술을 훔치더니 춤을 추듯 양 손을 휘돌렸다. 그 순간 수백 개의 창이 저절로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그것은 신마를 노리는 대신 맹주전 곳곳에 영역을 표시하듯 내리꽂혔다.

콰직!

악마는 마지막 창이 청석을 으깨고 깊숙이 박히는 순간 땅에 양손을 내리치면서 내공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그 순간 대지에서 끄집어낸 기운이 넝쿨처럼 솟구치더니 백광을 옭아맸다.

- 이 또한 사이한 잔재주일 뿐이다!

그 때였다.

이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광을 막아내던 중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잔재주에 당하는 너는?”

지이이이이잉-

창공을 가르는 자색의 기운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솟구쳤다가 내리꽂혔다. 망아취자는 검 끝을 따라 자색의 빛무리가 유성의 꼬리처럼 늘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통로를 연 것처럼 하얗게 빛나던 중앙 부분을 그대로 잘라버렸다. 소리 없이 허공을 베는 순간 자색의 기운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하얗게 빛나던 통로 또한 바람에 실려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신마의 무공인 선형(仙型)으로 이뤄진 기의 집합체일 뿐이다.

그리고 신마가 웃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마치 입이 있는 것처럼 육성으로 폭소를 터트렸다.

오십 년 이상 기다려온 순간이 찾아왔으니 기쁠 만도 했다.

하나 그는 더없이 냉철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등선의 길이 막혔음에도 웃음 짓고 있는 이훤을 보고 인상을 썼다.

그리고 이훤은 신마의 의아함에 호응해주듯 말을 건넸다.

“등선 안하게 되어서 좋아?”

신마의 눈이 있던 부분이 두 배는 커졌다.

이훤은 그 사이 망아취자와 괴마들에게 눈짓을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하늘이 의지한 바를 제아무리 망아취자라고 해도 단칼에 잘라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저 자신이 오랜 세월 갈고 닦았으며, 신마에게조차 선보이지 않았던 힘으로 잠시나마 등선의 길을 지웠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망아취자의 얼굴은 수십 년이나 더 늙어 보였다.

하나 그것으로 족했다.

[놈은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여기니 지금이야 말로 사람 대 사람으로서 끝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훤은 초췌한 망아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신마는 예전의 신마가 아니야.’

망아취자가 잠시 천의를 지웠음에도 저토록 피폐해지지 않았던가. 그러니 제아무리 신마라고 해도 수십 년 동안 천의를 지웠다면 멀쩡할 리 없을 것이라 여겼다.

이훤은 신마를 보며 혀를 찼다.

“모든 것을 보고, 예측했겠지.”

“이제 와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게냐? 네가 생각하는 대로 내 등선을 막았다면 응당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신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리고 속안의 말을 꺼냈다.

“하나 너 자신을 보지 못했고, 너 자신만은 예측의 대상에서 빠졌구나.”

“쯧쯧, 아직도 미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건가?”

이훤은 팔황과 무극을 팔목에서 풀었다.

그리고 두 가지를 한데 뭉쳐 금빛으로 일렁이는 검을 만들어냈다.

“너야말로 수십 년 동안 미몽에서 허우적대지 않았더냐?”

그 증거로 신마는 한마가 죽었다고 여겼다.

그만큼 등선을 막는 것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게다.

여력(餘力)이 없는 존재라면 십이성의 천공혈륜겁으로 베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아.”

이훤은 허공에 떠 있는 신마가 아니라 그 너머의 창공을 올려다봤다. 더없이 눈부신 태양은 인세의 환란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어제와 다름없이 빛나고 있었다.

“누가 내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훤(昍).

처음 회귀 했을 때에는 두 번의 삶을 살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인 줄 알았다. 한데 천관심결과 천총대화, 거기에 더하여 작금의 상황을 마주하고 보니 그 뜻이 다르게 여겨졌다. 두 번의 태양을 마주함으로서 삶을 다하라는 뜻처럼 생각됐다.

이훤은 땅바닥에 나뒹구는 술병 하나를 발로 차올렸다.

그것을 한 모금에 비운 후 후련한 기분으로 신마에게 말을 건넸다.

“나와 함께 가자.”

축융노도가 죽은 이상 진생일선은 오직 이훤에게만 전해지지 않았던가.

이제야 축융노도가 편안히 세상을 떠난 이유를 알겠다.

‘진생일선이야 말로 신마의 심득에 소우주경이 더해져 만들어진 하늘의 그물이로구나.’

이훤은 축융노도가 죽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편안하게 가더라.

‘그 시간에 잘하면 한 병 더 마실 수 있겠는 걸?’

술에 대한 상념에 깊이 빠져 있는 사이 그의 신형은 어느새 신마의 지척에 이르렀다. 그것은 신마조차 감응하지 못할 만큼 대자연과 영통하는 단계였다.

“너!”

신마의 눈처럼 보이는 부분은 비정상적일 만큼 커졌고, 입으로 보이던 부분은 길게 찢어져 무언가를 외치려 했다.

이훤이 그것을 기다려 줄 이유가 없다.

그는 히죽 웃으며 금검을 내리쳤다.

“만두 빚은 갚았으니 이제 데려가라!”

신마의 빛무리가 검의 형태를 취하며 금검을 마주했다.

금검은 너무도 허무하게 산산이 부서지며 햇빛을 튕겨버렸다.

쩡-

하나 이훤의 의지는 신마에게 충분히 전해졌다.

“아.”

누군가의 침음이었을까.

그것을 찾아보기에는 신마의 기운에서 벌어지는 기사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얗게 일렁이던 빛무리 사이에 검은 점이 하나 찍혔고, 그것은 이내 먹물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지기가 폭주합니다!”

악마의 외침이 들렸다.

“모두 피해!”

그 말처럼 대별산 전체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쿠쿠쿠쿠쿠쿵!

땅이 들썩거리면서 음습한 기운이 흩뿌려졌다.

그리고 괴이한 악취는 신마를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들러붙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하하! 진짜 어처구니가 없군.”

신마의 기운은 어느덧 모조리 까맣게 변하여 일렁였다.

“나 대신 등선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이훤은 피곤한 듯 눈을 반개 한 채 힘겹게 웃었다.

“괜찮은 척 하지 마. 아니면 너무 허망해서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

신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고, 수많은 해결책을 만들어놓았다. 하나 이와 같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네 존재 자체가 의문이었다. 너는 내 계획보다 언제나 한 걸음 더 빨랐으니까.”

그의 시선이 이훤에게 닿았다.

“너는 누구냐?”

이훤은 양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비밀이다. 이 새끼야.”

< 92, 마(魔).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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