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마(魔). >
92, 마(魔).
이훤은 단호하게 말했다.
“다 거짓말이야.”
그는 신마가 천공혈륜겁의 정수인 천공을 막아내고, 조롱하듯 자신의 행적을 밝혔을 때만 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그가 동굴을 떠난 이후부터 평소처럼 입가의 미소를 되찾았다.
“대형!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한마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탈마가 조급하게 외쳤다.
이훤은 손바닥을 위로 했다.
그리고 물건을 들어 올리듯 움직였다.
그 순간 붉은 장막이 땅에서 솟구치더니 벽처럼 길을 막았다. 이미 진흙으로 된 벽을 무너트렸기에 역으로 펼친다면 반대의 경우도 가능했다.
그리고 한마는 그것을 뚫을 수 없었다.
“으으으으으.”
적의를 드러내듯 침음을 흘리며 붉은 벽을 향해 돌진할 뿐이다. 탈마는 여전히 한마를 향한 걱정스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하나 조금의 여유를 되찾은 듯 한 숨을 내쉬며 앉아버렸다.
“휴, 신마가 거짓말을 했다고요?”
이훤은 단호했다.
“응.”
괴마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마가 남긴 말을 복기하고 있으리라.
“앞뒤가 맞지 않지.”
그리고 망아취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이훤과 더불어 유일하게 위화감을 느낀 존재였다.
“스승님 말이 맞아요.”
“신마는 지고의 존재다. 자긍심이 높아. 하지만 냉철해. 그는 스스로 자부한 것처럼 조율자다. 그 결과 자신의 이성과 감성까지 조화를 이뤘지.”
이훤이 망아취자의 의견에 말을 더했다.
“그로 인해 군주가 지녀야할 자긍심과 군사가 지녀야할 심모원려를 동시에 갖췄죠.”
이쯤 되면 괴마들도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악마는 비주류로 밀려난 세가를 부흥시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묘마는 제왕으로 태어나, 제왕으로 살아오며 수많은 수하들의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탈마는 천라지망 속에서 하나의 탈출구를 찾아낼 만큼 감이 좋았다.
거기에 신마의 심득이 더해진 게다.
그러니 의심의 씨앗을 심는 순간 선입견이 사라졌다.
그 순간 수많은 정보가 조각조각 흩어졌다가 다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강호를 바둑처럼 다뤘다는 건 사실이겠죠.”
“따지고 보면 마지막 정마대전의 마무리 또한 예상과 달랐어. 정파가 지리멸렬하고, 마교가 천하를 쥐락펴락했다지. 한데 최후의 결전 때 마교의 거대한 성세는 마치 물거품처럼 주저앉았어. 저울의 추처럼 균형을 맞춰온 건가?”
“그럼 오십 년 전까지는 그렇게 산 게 맞겠네요.”
“이름도, 나이도, 사문도 불명이야. 그만큼 깨달음의 깊이가 무한하니 등선의 기회가 왔겠네.”
“한데 막상 등선을 하려고 보니 자신이 떠나고 난 후의 강호가, 강호가······.”
탈마는 괴마들의 말을 받아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괴마들을 보며 질문했다.
“강호가 걱정됐다? 됐을까요?”
“글쎄다.”
“흐음, 좋아! 그럼 그 부분을 넘기면 곧장 신마의 등장이야. 어찌됐든 그가 남긴 심득들은 확실한 효과를 보였어. 가짜가 아니었지.”
이훤이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그 증거야.”
“우리도 그렇고. 그러면 자신과 같은 수준의 후계자? 아니지. 대리인? 그것도 좀 별로야. 자신과 같은 수준의 무언가가 필요했어. 그래서 새외에서 사람을 불러들이고, 강호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켰지. 왜?”
“신마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했던 일을 대신 할 사람이 필요했다지요.”
“한데 그 진의(眞義)는?”
마치 모사들이 모여서 작전을 짜듯 쉴 새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가 다시 회수되면서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십 년이 흐른 거야.”
“그리고 이렇게 됐지.”
그리고 마침내 모든 정보가 규합됐다.
“이상하지?”
“이상하네.”
첫 의문을 제기했던 탈마가 히죽거렸다.
“신마는 강호를 걱정하지 않아요. 자신의 무위를 구현할 실험장에 불과할 걸요? 그래. 기껏해야 아이가 개미떼의 길을 막거나, 짓밟는 정도의 유희였겠지.”
“맞아. 그는 애초에 강호를 걱정하거나, 무인의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아. 그저 하고 싶은 걸 할 뿐입니다.”
망아취자가 침음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대신해 강호를 조율해야 한다고 했던 것부터가 거짓말이겠지.”
이훤이 말을 받았다.
“강호의 조율은 핑계야. 하지만 놈에게 대체제가 필요한 건 확실해. 그 자처럼 철두철미한 자가 진짜 심득을 수십 년 동안 전하면서 일을 꾸몄을······.”
“왜요?”
탈마는 이훤이 말을 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이훤이 말했다.
“이 새끼는 정말 등선을 앞두고 있어.”
“그렇겠죠.”
망아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득을 이어받은 우리 또한 반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라면 분명 등선을 앞뒀겠지. 하나 조율의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수십 년 동안 왜 이 일을 꾸민 걸까?”
탈마가 한탄을 하듯 말했다.
“어휴, 그게 문제라고요! 도무지 이유가 없어.”
이훤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 이내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 이 새끼는 싫었던 거야.”
“뭐가요?”
“등선하고 싶지 않다고! 이 새끼는 등선 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냥 사람으로 살고 싶은 거라고!”
모두가 눈을 끔뻑였다.
등선(登仙)은 곧 신이 됨을 의미했다.
불로장생과 불사는 고대로부터 인간의 변치 않는 욕망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괴마들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이 된다고요. 그런데 왜 거부해요?”
이훤의 눈동자는 더없이 또렷하다.
모든 의문이 해소되면서 머릿속이 맑아졌다.
“생사경에 이른 우리는 알잖아. 자연지기를 마음껏 활용하면서 신위를 보였지. 자! 그럼 다음 단계는 뭘까?”
“신?”
“그래, 신이다. 한데 신마는 정작 그 단계에 이르니까 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차린 거야. 생각해봐라. 자연지기를 제 것처럼 활용하는 다음 단계라면 곧 대자연과 영통하는 거잖아.”
망아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자연과의 영통은 유불도의 절예라면 모든 구결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그것을 문제 삼을 리가 없지 않느냐?”
“아닙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어요.”
이훤의 말에 탈마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아! 정말 대자연의 일부가 되는구나!”
“그래, 그냥 이 세상이 되는 거야. 놈은 이미 몸뚱이가 사라졌어. 혼백만 남은 상태라고. 그래서 아는 거지. 이대로 등선해버리면 혼백조차 사라지고, 사적인 의념조차 지워지는 거야.”
묘마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 놈은 끊임없이 천망회회 소이불실을 외쳤죠. 대형의 말처럼 알게 된 거야. 신이 된다는 건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 천의에 따라 움직이는······.”
악마가 창대를 흔들었다.
그러자 맹렬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이런 바람처럼 자연이 되어버리는 거지.”
“어차피 몸뚱이는 묘마의 경우처럼 어떻게 해서든 얻을 수 있어. 그러니 놈에게 필요한 건 등선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해결책으로 대체제를 원한 거야.”
“자신과 똑같은 수준에 오른 자가 있다면 등선을 시켜주고, 자기는 빠져버린다? 그런데 그게 되요?”
탈마의 물음에 망아취자가 수긍했다.
“될 것이다. 고래로부터 수많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유불도의 기사를 논하자면 한 세대에 같은 깨우침으로 동시에 등선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신마라면 분명 이 일을 꾸미기 전에 확신할만한 정보를 찾아냈을 게다.”
“뭐 달수 할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렇다는 가정 하에 상대방을 등선시키고, 남은 몸뚱이를 차지하겠다는 거겠죠?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몸을 만들거나,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또한 정황일 뿐이잖아요. 진짜 신이 되어 군림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나 신마는 불확실한 것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황이 복잡하더라도 확실한 것만 택한다. 놈의 오십 년 행적을 보면 이게 맞아.”
묘마는 더러운 것을 마주한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그럼 제 한 몸 살리겠다고, 수십 년 동안 강호를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거네. 그래 놓고 우리에게는 등선을 한다고 자랑을 했고. 아니지. 생각해보니 대형의 말처럼 놈은 일부러 악당 흉내를 내고 있어. 그래야 우리가 그를 막을 테니까. 아닌 말로 개 같은 새끼가 등선하는 꼴을 볼 수는 없잖아.”
“그거야 말로 신마가 원하는 바지.”
오십 년, 어쩌면 그 이상의 세월을 보내며 꾀한 짓거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얼토당토않았다.
“그럼 그냥 등선시켜버리죠?”
탈마의 물음에 악마가 침음을 흘렸다.
“하나 그런 개종자가 등선하는 꼴을 보는 것도 곤욕이지. 아니, 애초에 이런 짓거리를 했음에도 등선이 가능하기나 한 건가?”
망아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늘의 뜻은 우리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 넓다네. 그 순간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지. 어째서 이런 일을 꾸몄는지 말이야.”
탈마는 혀를 찼다.
“그나저나 신마의 처우를 논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하나는 놈이 어디로 갔는지, 또 하나는 한마를 어떻게 해놔야지요.”
그 때 두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건 내가 알아.”
“그건 내가 할 수 있단다.”
이훤과 망아취자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한마를 되돌릴 수 있다고요?”
스릉-
망아취자는 검을 뽑았다.
“신마는 수십 년 동안 천공과 혈륜을 지켜보았으니 대비가 되어 있을 수도 있지. 실제로 팔황무극존과 너를 지켜봤다면 가능할 것이다. 하나 나는 지난 오십 년 간 단 한 번도 무공을 펼친 적이 없다. 그리고 만매만전 이후 만들어낸 무학 또한 선보이지 않았다.”
신마가 신이 되었다면 뜻을 품는 순간 모든 것을 알아냈으리라. 하나 그는 신이 되기 직전이었고, 망아취자는 맹약을 가장 오랫동안 지켜온 자였다.
그리고 이훤은 망아취자를 믿었다.
그가 손을 가볍게 흔드는 순간 한마를 막고 있던 핏빛의 투명한 벽이 흩어졌다.
“으아아아아아!”
한마의 전신에서 벼락이 흩뿌려지려는 순간이었다.
망아취자의 검이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한순간 한마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자취를 감췄다. 탈마는 망아취자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듯 거리낌없이 다가가 한마를 살폈다.
“호흡이 거칠기는 한데 괜찮은 것 같아요.”
이훤은 나직이 한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검후와 한마에 대한 마음의 짐이 사라지는 듯했다.
망아취자는 납검을 한 후 이훤에게 물었다.
“자, 신마는 어디로 갔느냐?”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림맹.”
*
무림맹이 위치한 대별산은 축제가 한창이었다.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도 아주 좋았다.
- 마교의 멸문.
“벌레 같은 종자들인지라 밟아도, 밟아도 다시 기어 나오지 않았던가. 한데 마교가 사라졌다니! 오늘 같은 날은 축배를 들어야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걸 맹주가 해냈어!”
“이제 정파의 세상이 열렸구나!”
맹주와 멸마회의 일원은 무림맹의 손이 닿는 청해성에 들어선 이후 마교의 멸문을 알렸다. 교주와 마도팔가가 모두 죽었으니 다시는 마교가 예전의 성세를 되찾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무림맹 지부에 전한 소식은 개방과 하오문의 입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 결과 대별산 인근에는 신마대회를 열었을 때와 비견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상태였다.
“무림맹이 창고를 열었으니 먹고 죽자고!”
“삼일 밤낮을 마시고, 또 삼일 밤낮을 다시 마시는 거다!”
축제의 흥겨움이 극에 달할 무렵이었다.
솨아아아아아아-
향긋한 꽃 냄새가 사방에 밀려왔다.
연회가 한창인 맹주전 앞에 뭉쳐드는 향기가 승천하는 용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마치 하늘의 문이 열리듯 구름이 갈라지며 오색의 빛무리가 버드나무처럼 늘어졌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대별산은 물론이고, 하남성 전체의 자연지기가 한데 뭉쳐 누군가를 맞이하는 듯했다.
“아!”
고기를 뜯고, 술을 마시던 이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악사는 금을 뜯던 손을 멈췄고, 무희는 너울거리던 천을 늘어트린 채 눈을 끔뻑였다.
“저것이 무엇인가?”
누군가의 읊조림에 호응하듯 신령스런 기운이 뭉쳐들었다.
그것은 희뿌옇게 일렁였지만, 일견하기에도 사람의 형체가 분명했다. 그리고 이내 마치 등선을 앞둔 고인의 감사가 담긴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팔방에서 바람을 타고 들려온 목소리.
그렇기에 귀로 듣고 있지만, 마음속에 전해지는 듯했다.
- 도탄에 빠진 강호를 구해낸 강호의 영웅들이여.
맹주는 눈을 끔뻑였다.
작금의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뭐지? 이게 뭐란 말인가?’
하나 대부분의 무인들은 천신을 응대하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 강호가 평화를 되찾았으니 이제 홀가분하게······.
응원과 격려, 그리고 감사.
신의 계시처럼 들리는 건 당연했다.
- 이제 그대들에게 강호를 맡기고, 하늘에 올라······.
군웅들은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마디 놓치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자 했다.
한데 그 순간 대별산 아래에서 핏빛의 기운이 해일처럼 솟구쳤다. 살아 있는 모든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 것처럼 파괴적인 기운이 넘실거리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로운 일갈이 군웅의 고막을 두드렸다.
“가기는 어디를 가려고?”
만개하려는 선(善)을 제지하려는 악(惡)의 등장이었다.
< 92, 마(魔).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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