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23화 (223/226)

< 91, 신(神). (2) >

삶을 다하여 하나의 선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축융노도가 깨우친 신마의 심득, 진생일선(盡生一線)의 유일한 구결이자, 오의였다. 그리고 하나의 선(線)이 만들어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신처럼 여겨졌던 천마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이훤은 천마의 마기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노도.”

축융노도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왜인지 모르게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이훤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설마 형산파의 소우주경으로 여기까지 내다봤다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놀랍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놀랍다.

아닌 말로 신마를 만난 이후 오십 년 동안 폐인처럼 살아오지 않았던가. 겁쟁이라는 조롱을 감수하면서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의미였다.

한 순간 정신이 멍했다.

집념과 집착은 오판이 되기 쉽다.

사람은 매순간 흔들리고, 매순간 옳은 선택을 할 수 없다.

한데 무엇을 믿고 오십 년 동안 오늘을 위해 칼을 갈아왔을까. 평생 알지 못할 것이고,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협객이란.’

이훤만 어리둥절한 것이 아니었다.

괴마들은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멀뚱히 자리를 지켰다. 축융노도의 협의지심이나, 결의보다 그가 만들어낸 신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같은 것을 보고, 들었는데 이게 뭐야?’

‘버텨내는 것조차 힘들었던 천마를 단칼에 베다니?’

반면 망아취자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처연했다.

눈앞에 축융노도가 있음에도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듯 흐릿한 눈빛이 한차례 일렁였다.

“그래야만 하는 건가?”

“내 선택이라네.”

“어디까지 보았는가?”

이훤은 두 사람의 대화에 눈을 가늘게 떴다.

축융노도는 자신을 제외하면 망아취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밤낮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분명 형산파의 소우주경을 논했을 터였다. 그로 인해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쯧.’

이훤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신마의 심득이다.

그리고 소우주경은 신묘하다고 해도 천관심결과 일치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하여 이훤은 소우주경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천관심결과 천총대화만으로도 신마를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는 건가?’

돌이켜보면 축융노도의 행동은 천관심결이 아니라 소우주경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망아취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무엇을 보았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할 뿐이네.”

축융노도는 그 말을 끝으로 바위에 기대앉았다.

“멋지게 가부좌라도 틀고 가려 했는데······. 너무 힘들군.”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시대의 거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무명이 쟁쟁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 전 멸문한 형산파의 문도로 알려졌을 뿐이다. 겉으로는 그저 초로의 노인이 길을 걷다가 유명을 달리한 것처럼 보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일검을 휘둘렀다.

이훤은 고개를 숙였다.

만약 축융노도가 천마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이훤이 나섰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상태로 신마를 상대하지 못했으리라.

‘이해할 수 없지만, 고맙습니다.’

그는 탈마에게서 술병을 받았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술을 고스란히 축융노도에게 바쳤다. 잠시 후 돌아서는 이훤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서늘했다.

“이제 신마를 만나러 갑시다.”

*

돌아갈 필요도, 느리게 갈 필요도 없다.

축융노도의 시신은 신강 외곽에 위치한 하오문의 지부에 맡겼다. 그리고 네 명의 괴마와 한 명의 도인은 개봉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대자연과 영통하는 수준은 아니다.

하나 자연지기를 받아들이고, 내보는 것이 더없이 익숙할 만큼의 고수들이다. 그렇기에 이훤을 선두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한 걸음에 십여 장씩 내달렸다.

이번엔 첨탑을 거치지 않았다.

곧장 야산에 올라 숨겨진 협곡에 이르렀다.

“엇!”

악마는 철문 위에 적힌 문구를 보고 탄성을 흘렸다.

-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자만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신마의 심득에 반응한다.”

탈마가 은근슬쩍 나서더니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철문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좌우로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다!”

탈마는 히죽거렸다.

하나 금세 웃음을 지우더니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문구를 올려다봤다.

‘똑같네.’

처음 왔던 자신과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혈륜의 회복과 탈마의 홍천기공은 궤가 달랐다.

이대로 문구에 홀렸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이훤은 탈마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빡!

탈마가 비명과 함께 대여섯 바퀴나 나뒹굴었다.

“따라와.”

이훤은 그런 탈마의 뒷목을 잡아 일으킨 후 비동으로 발을 들였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기에 금세 진흙으로 된 벽을 마주했다. 예전에는 혈륜을 뿌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나 이번만은 달랐다.

예전에는 신마의 모든 심득이 천공혈륜겁의 혈륜에 섞였다. 하나 여덟 개의 심득을 모두 받아들이고 나니 역으로 갈라놓는 것이 가능했다.

강림혼요술이 담긴 혈륜을 흩뿌렸다.

하나 이번에도 바다에 한 줌의 모래를 뿌린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형님, 도와줘요?”

이훤은 탈마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제는 혼자 할 수 있어.”

심호흡 한 번에 손끝에서 핏빛 기운이 흩뿌려졌다.

한데 괴마들은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지만, 각기 다른 여덟 종류의 기운이 담겼다. 그리고 그것은 진흙 벽 전체를 물들였고, 이내 한순간 기이하게 빛나는 듯했다.

이훤은 인세의 빛이라 볼 수 없을 만큼 기이한 빛무리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공혈륜겁이 십일성에서 멈췄다고 여겼는데······.’

하나 혈륜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깊이를 더했나 보다.

이훤은 이 순간 천공혈륜겁이 십이성에 이르렀음을 확신했다. 그 증거로 진흙으로 만들어진 벽이 한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놀랍게도 흙이 튀지도, 먼지가 날리지도 않았다.

그저 말 그대로 사라졌다.

이제야 신마의 만들어놓은 마지막 관문을 뚫은 게다.

“진짜 이 안에 신마가 있는 거야?”

묘마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있어야지.”

이훤이 대꾸와 함께 양손을 떨치는 순간 붉은 빛무리가 생성됐다. 그리고 허공에 머물던 붉은 빛은 그대로 불길이 되어 동굴 내부를 밝혔다. 격공섭물과 삼매진화를 비롯한 온갖 이능이 구현됐다. 그리고 불길이 동굴의 끝을 밝히는 순간 괴마들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

그 곳에는 신마 대신 한 명의 여인이 존재했다.

제갈세가에서 납치됐던 한마였다.

“아.”

그녀의 상태는 일견하기에도 괴이했다.

마치 보이지 않은 줄에 매달린 것처럼 축 늘어졌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천마의 경우를 보았듯 그녀의 변화가 짐작됐기에 더더욱 안쓰러웠다.

“하는 짓거리는 저자의 왈패보다 천박한 새끼.”

이훤의 짜증 섞인 일갈에 한마가 반응했다.

그녀는 축 늘어진 채 고개만 들었다.

그리고 한마의 눈동자는 천마가 그랬던 것처럼 맑았다.

세상 모든 걸 비추려는 거울처럼 말이다.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네. 그 말은 비단 천의의 무소불위만을 논하는 게 아니지. 그 말에는 더 큰 뜻이 있다네.”

“오냐. 지껄여봐라.”

“하늘의 뜻은 한낱 미물이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지.”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인간을 미물에 비유한다면 미몽이란 인간의 삶이라는 거냐?”

“흔한 비유지만, 인간과 개미의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오만하구나.”

신마는 한마의 입을 빌려 나직이 말을 건넸다.

“너는 산을 좋아했지. 화산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어떻던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삶의 굴곡 또한 마찬가지란다.”

“너 또한 인간이다. 그리고 내가 네 심득으로 강해졌다고 해서 우리가 다르지 않아. 다르지 않기에 너는 아직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꽈득-

이훤은 주먹을 말아 쥔 채 한마를 향해 나아갔다.

“나한테 죽어야지.”

“이 아이를 죽이겠다고?”

한마는 꼭두각시가 아니던가.

하나 신마를 떨쳐내려면 결국 한마를 죽여야 했다.

천마를 그랬던 것처럼.

하나 이훤은 멈추지 않았다.

“혈륜은 보이는 모든 것을 벤다. 지금껏 단 하나도 베지 못한 적이 없어. 그리고 천공혈륜겁을 대성하고 나니 천공의 의미를 알겠다.”

솨아아아아아-

그 어느 때보다 붉은 혈륜이 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천공(天恐)은 너무도 선명하게 한마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라버렸다. 한순간 단전 안의 혈륜이 가뭄의 전답처럼 말라버렸지만, 금세 저절로 채워져 원기를 회복했다.

하나 이훤의 표정은 굳은 채였다.

처음으로 펼친 천공(天恐)은 한마의 육신은 물론이고, 정신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그야말로 환영처럼 번뜩였을 뿐 아무 타격도 주지 못한 게다.

“놀랐는가?”

이훤은 대꾸하지 않았다.

신마는 그런 이훤을 놀리듯 입꼬리를 올린 채 말을 건넸다.

“절명곡의 삶과 죽음 또한 나의 의지였다. 애초에 팔황무극존이 어째서 중원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가?”

새외의 절대강자였던 팔황무극존은 중원의 절대자인 구파오가와 자웅을 겨루려 했다. 하나 삼문협 절명곡에서 신마의 심득을 전해 듣고 개미굴에 은거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네가 불렀구나.”

“선형을 아무리 갈라놓아도 바탕이 없다면 결코 쌓아올릴 수 없다. 누군가 나와 같기를 바랐기에 천하를 뒤져서 두 가지를 찾아냈지.”

“그것이 천마신공과 팔황무극존의 무공이었던가?”

한마는 해맑게 웃었다.

“맞아.”

하나 이훤은 가늘게 뜬 눈을 유지했다.

신마의 무공이 선형(仙型)이라는 것과 일부러 자신의 후예를 남겼다는 단서가 나왔다. 그 순간 얼토당토않은 한 가지 가설이 뇌리를 스쳤다.

“너, 신이 되려는 게냐?”

부처나 신선을 논하지만, 인외의 끝은 곧 신(神)이다.

신마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한마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 순간 태산처럼 위압감이 전달됐다.

“신이 되고 있다.”

“그럼 뭐하려고 이따위 짓을 꾸민 거지?”

“말했지 않는가.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이 세상의 안정을 지키고, 강호의 균형을 수호하기 위한 누군가가 필요했다. 나는 네게 그 중임을 맡기려 한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그걸 하려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고, 강호 전체를 도탄에 빠지게 만든 거냐?”

“하늘의 뜻을 미물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너라면 미몽에서 깨어났으니 내 뒤를 잇기에 충분하다.”

언제부터인가 신마에게서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제자를 대하듯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한 마디를 건넸다.

“이제 모든 미련을 벗어던졌으니 나는 등선을 하련다.”

이훤은 이를 갈면서 외쳤다.

“내가 그냥 둘 것 같으냐? 네 놈의 야욕을 막는다면 한마도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너는 이제 미몽에서 깨어났을 뿐 하늘의 뜻을 막지 못한다. 나는 이제 만인의 축하를 받으며 떠날 것이다. 하나 너희들은 초대받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수련을 해라. 이 아이가 너희들의 심득을 완성시켜 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한마의 몸이 축 쳐지기 시작했다.

처음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놈이 사라졌다.”

“설마 육신이 없는 겁니까?”

망아취자의 말에 이훤이 대꾸했다.

“그건 알 수 없지. 그는 심득을 전했을 뿐 모든 걸 전한 것은 아니니까.”

묘마는 턱짓을 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한마 상태가 이상한데요. 아무래도 천마 때처럼······.”

“쾅!

악마가 창으로 바닥을 찍었다.

“일단 한마부터 정신을 차리게 만들지요. 그리고 신마를 반드시 찾아서 막아야 합니다.”

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런 개새끼가 등선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어지간하면 물건만 훔치고 봐주는 편인데······. 저 새끼는 정말 안 될 것 같아요.”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히죽 웃었다.

“등선. 등선을 한다고?”

망아취자가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느냐?”

이훤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신마가 등선을 할 리가 없잖아요.”

< 91, 신(神).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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