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신(神). >
91, 신(神).
해달라는 거 다 해줬잖아?
과정이야 어찌됐든 원하는 대로 됐잖아?
“그럼 나오라고! 이 새끼야.”
멱살을 잡는 것과 목울대를 잡는 건 다르다.
후자가 훨씬 더 잡기 어려웠고, 잡은 만큼 고통은 몇 배로 돌려줄 수 있었다. 그건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날뛰던 천마도 다르지 않았다.
“끄르르르르륵.”
천마의 검은 낯빛보다 더 검은 눈동자는 먹물이 번져나가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는 이훤이 무슨 말을 해도 흘려들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정신력을 지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상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고,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한 수를 펼쳐야 했다.
한데 흔들렸다.
‘왜 내게서 신마를 찾는단 말인가?’
천마는 본래 마교 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비영대(秘影隊)의 대주가 되었다고는 하나 마도팔가의 가솔이었기에 가능했던 자리였다.
그런 그의 삶이 바뀐 건 역시 신마 때문이었다.
무림맹을 주축으로 정파가 신마에 대한 추살대를 조직했을 때 마교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혹여 고금제일이라 불리던 신마의 무공이 정파 쪽에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
하여 정찰과 잠입에 능한 비영대를 비롯한 타격대들이 선발대로 마교를 떠났다. 선발대가 신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사이 마교의 본대가 삼문협을 통째로 덮친다는 것이 계획의 일환이었다.
‘나는 내 의지로 신마를 쫓았어!’
비영대주였던 그는 신마의 신위를 눈으로 지켜봤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기라성 같은 정파의 고수들이 개미떼처럼 짓밟혔다. 의지가 굳건한 협객이라고 해도 욕심이 났을 것이다. 하물며 마교 내에서도 승진에 목말랐던 비영대주는 더더욱 그러했다.
하나 닿을 수 없는 하늘과 같았다.
신마의 무공은 욕심낸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한데 신처럼 보였던 신마가 조금씩 달라졌다.
초반에 비해 피를 흘리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고, 신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신마는 분명 죽어가고 있었어.’
그 때부터 신마의 흔적을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를 교란하여 마교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절명곡에서 정파의 여섯 생존자와 더불어 신마의 심득을 전해들을 수 있게 됐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예상대로 풀렸다.
강림혼요술로 천마가 없는 마교를 쥐락펴락 했고, 신마의 다른 심득을 얻기 위해 정파 내에 세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갈삭을 꼭두각시로 삼아 천룡전의 이름으로 신마의 심득을 모으지 않았던가.
이 모든 과정은 말이다.
스스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애써온 삶의 흔적이었다.
오롯이 천마의 삶이었고, 천마의 의지였다.
그렇기에 천마는 이훤을 부정하기 위해 마기를 끌어 모아 외치려 했다.
“내 의지로······. 내 의지로······.”
천마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릴 뿐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입을 통해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은 화의 근원이고,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네. 한데 어찌하여 후학은 그리 화가 나셨는가?”
이미 천마의 눈동자는 산중 호수처럼 맑아진 후였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혼돈에 휩싸인 천마라고 해도 자신의 눈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생각을 달리할 터였다. 만물을 그대로 비춰낼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살의나 적의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나 이훤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으며 욕을 퍼부었다.
“너 때문이지. 이 새끼야! 눈치 없는 척을 하고 있어.”
천마의 목울대를 잡아당기자, 놈의 신형이 목각인형처럼 덜렁거리며 지척에 이르렀다.
이훤은 코가 닿을 것처럼 맞닿은 천마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한 채 반문했다.
“어때? 이제 미몽에서 깨어난 것 같으냐?”
지난 번 제갈삭의 흉계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신마의 흔적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개봉의 철탑에서 확인한 야산의 깊은 협곡에는 신마가 남겼던 한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말이다.
-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자만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훤은 당시 글귀를 보고 신마의 모든 심득을 깨우치는 행위를 꿈에서 깨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야 신마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하나 몇 번의 사건을 거치고, 확신은 물거품처럼 사라진지 오래였다.
놈은 상대가 모든 심득을 익히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상대로는 누가 됐든 상관 없을 터였다.
이훤은 그것을 알면서도 마치 자신이 적임자라는 듯 확신 가득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이제 감당할 수 있겠지?”
찰나의 환각이었을까.
한순간 천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것처럼 보였다.
“하늘의 의(意), 땅의 념(念), 인간의 리(理)는 천지만물의 조화에서 비롯됐지. 하늘이 있기에 땅이 있고, 그 사이를 떠받들기 위해 인간이 있다네. 지고의 이치 또한 그럴진대 하물며 해와 달, 빛과 그림자에는 어찌 그것이 없겠는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지만, 흔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조화(造化).
세상은 비우는 만큼 채워지고, 채우는 만큼 비운다고 하지 않던가. 빛이 쇠하면, 어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달이 쇠하면 해가 떠오르는 이치와 같았다. 결국 이와 같은 만물의 이치를 조화롭게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조율자의 역할을 하셨다고?”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슬픔이 되고, 누군가의 행운은 누군가의 불행이 된다. 고래로부터 지금껏 자연스럽게 이어져온 만물의 이치란 말이다.
한데 신마는 저절로 이뤄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고, 땅이 솟구치지 않도록 인간이 버티고 있다는 게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신마를 의미할 터였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고, 하기 싫다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찌 천의와 지념을 논하겠는가. 미몽에서 깨어난 자는 앉아서 천 리를 보고, 누워서 백 년 후를 살피니 무위와 위가 아닌 절로 그렇게 되리라.”
듣는 것만으로도 만매만전의 여러 구절과 얽혀들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심지어 묘마와 악마는 매섭게 눈을 부라리면서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니야.”
하나 이훤의 목표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신마의 목적.
단순히 강호의 정과 마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조율했다고 하기에는 허술한 점이 너무 많았다. 애초에 신마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기에 허술한 점이 보였으리라.
“너는 조율이 아니라, 키운 거다.”
“그 말 또한 틀리지 않다. 세상의 빛과 어둠을 조화롭게 다루는 건 홀로 감당하기에 지난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격을 갖춘 이가 나타난다면 응당 뒤를 맡겨······.”
“아니야.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좋은 일을 하자고 키운 게 아니란 말이지. 그냥 너는······. 너는······.”
신마의 유혹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애초에 틀린 말이 아니었고, 지극히 상리에 부합하며, 천하만민을 위해서라면 부정할 수 없었으리라.
하나 이훤에게 중요한 건 천하의 안위가 아니다.
아닌 말로 누가 죽든, 멸문하든, 부정당하든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 공적이라고? 그러라고 해라.
- 마도라고? 언제는 정도였나.
- 죽이겠다고? 술부터 가져와라.
이와 같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일 만큼 삐뚤어진 상태가 아닌가.
그것을 가리켜 한 마디로 괴마라 했다.
이훤은 정파도, 사파도, 마도도 아닌 괴마로서 천마의 맑은 눈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놈의 혓바닥이 이렇게 길어진 이유와 수십 년 동안 암중에서 획책한 모략의 결과물까지 모든 걸 떠올린 채 한데 넣어 섞어버렸다. 그러다 보면 어딘가 모르게 어긋난 것이 하나라도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뭐에 홀린 것처럼 천마의 눈을 응시한 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신마의 심득을 전할 때 마교도를 남겨 강림혼요술을 일부러 익히게 했고, 그로 인해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드니······. 절명곡에 남은 자들은 순리를 따르지 않고······. 시간이 걸릴지언정 자연스럽게 심득이 모이기를 원했다면······. 마치 너와 똑같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일을 꾸몄을지도······. 결국 진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代替).
이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순간 뒤죽박죽 섞여 있던 회귀 전의 기억과 회귀 후의 기억이 요철(凹凸)처럼 맞물리기 시작했다.
“너!”
그 순간 천마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맑은 물에 먹을 뿌린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는 지금껏 본 적 없는 거대한 기운이 노도와 같이 퍼져나오더니 이훤의 손을 튕겨냈다.
텅-
이훤은 천마가 어깨를 흔드는 것만으로도 백여 장이나 날아갔다. 하나 한 호흡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다시 한 번 천마의 목울대를 움켜쥐려 했다.
“크아아아아아! 나는 천마다. 내가 천마다! 내가 곧 신이 될 것이고, 이 세상을 굽어살피리라!”
천마의 몸뚱이가 점차 형태를 잃어갔다.
피륙으로 만든 몸뚱이가 햇볕을 받은 눈처럼 녹아내리더니 검은 안개처럼 일렁거릴 뿐이다.
그 안에서 눈으로 보이는 부분이 길게 찢어지며 형태를 드러냈고, 입으로 여겨지는 부분이 용의 아가리처럼 벌어지며 귀곡성을 퍼트렸다.
“내가 진짜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이훤은 해일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마기에 정통으로 부딪친 후 침음을 내뱉었다. 회귀한 이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신마가 천마의 몸을 빌려 발현한 진짜 힘일 터였다.
“가짜는 모조리 없앤다!”
천마는 이미 이지를 상실하고, 신마의 꼭두각시가 되어 날뛰었다. 하나 그것을 자각할 힘이 없으니 그야말로 신마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악마는 창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휘둘렀다.
그로 인해 퍼져 나온 기파가 반경 십여 장 정도의 방패처럼 사람들을 지켰다. 하나 안색은 창백했고, 서서히 파리해지고 있었다.
채워지는 내공보다 쓰는 내공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는 신마의 심득을 통해 초월경에 든 절대고수가 아닌가. 하지만 대자연과 하나가 된 것은 아니기에 자연지기를 받아들이고, 몸에 담고, 다시 배출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즉 천마의 공세는 그 과정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엄청나다는 의미였다.
“후우, 후우.”
묘마 또한 끊임없이 심호흡을 하며 천마를 향해 무형검을 뿌려댔다. 하나 천마는 지금 대자연과 영통하여 신마의 화신(化身)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만은 그가 신(神)이다.
천산은 물론이고, 신강 전체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천기가 어긋나고, 지기가 말라붙으니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신강 전체가 사막처럼 변할 것이다.
하나 천마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부정당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오직 나만이 진짜로서 존재할 것이다!”
천마는 간간히 알아듣지 못할 괴성을 질러대며 쉴 새 없이 마기를 내리꽂았다.
“크흑! 이대로라면······.”
뒷말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천마를 노려봤다.
놈을 죽이려면 죽일 수 있다.
놈을 소멸하는 것또한 가능했다.
하나 할 수 없었다.
‘내가 행하는 것이야 말로 신마가 원하는 것.’
아닌 말로 천마를 죽였을 때의 반발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이훤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해와 달이 사라졌다.
산과 들이 사라졌다.
오직 검은 장막이 세상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별?’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기가 하늘을 가렸으니 별이라고 보일 리 만무했다.
하나 호선을 그리는 유성은 어느덧 천마에게 닿았고, 그대로 하나의 선을 그렸다.
천마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솨아아아-
그리고 검은 안개가 되었던 천마는 허무할 만큼 가벼운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그 자리에는 축융노도가 검을 늘어트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진생일선.”
< 91, 신(神).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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