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나는 천마다. (2) >
언령(言靈)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은 힘을 지니고, 돌이킬 수 없기에 매사에 신중해야 했다. 보통 한 조직의 장이 수하의 생사여탈권을 가질 때 써먹기 마련이다.
한데 이훤의 한 마디는 생면부지인 수천 마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었다. 이훤에게서 퍼져 나온 혈륜이 괴마들을 매개체로 하여 선고를 내렸다.
죽음.
악마의 두 눈마저 붉게 물들었고, 수백 개로 흩어진 창의 그림자는 해질녘의 그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끝없이 뻗어나가면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꿰뚫었다. 핏빛 창영에 섞인 뇌기(雷氣)가 아니었다면 이훤의 신위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공간 자체에 구멍이 뭉텅이로 뚫린 듯했다.
전방을 악마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면 묘마와 망아취자 또한 좌우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보이지 않아야 할 무형검이 핏빛으로 물든 채 부채처럼 퍼져나갔다. 반대편에서는 피에 물든 자색의 검기가 노을처럼 공간을 수놓았다. 여기까지는 차력미기를 극대화한 것처럼 보였으리라.
한데 탈마의 경우는 단순히 내공의 발출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사람 형태로 잘라놓은 수백 장의 종이가 한 장씩 솟구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신술을 방불케 하는 신위에 장내는 한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했다.
푹푹푹푹푹푹푹!
수백 개로 흩어진 탈마의 신형은 적을 난도질한 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다섯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서서이 이동했다.
그 때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마인들의 생사가 정해졌다.
마치 거대한 신장이 강림하여 땅을 헤집듯 마교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인세의 싸움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괴이한 공세가 쉴 새 없이 이어지다가 한순간 멈춰버렸다.
솨아아아아아-
장내에는 피 냄새만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휘돌았다.
이훤이 팔황과 무극을 거둬들이자, 뒤늦게 네 명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하나 그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멸마회의 무인들은 한순간 끝나버린 대회전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저런 기준으로 강함과 약함을 판별한다면 천하의 그 누가 스스로 강자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신위다.’
‘천마가 문제가 아니야.’
몇몇 사람은 모든 혈겁이 마무리 된 후 이훤의 의중이 변화할 것을 우려했을 정도였다.
하나 이훤은 저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시체로 만들어진 몇 개의 산 너머에 뭉쳐 있는 괴인들을 응시했다. 조괄을 비롯해 짧은 시간 멸마회의 무인들을 죽인 자들이 서른 명이나 모여 있었다.
한데 괴인들의 면면은 기이하기 짝이 없다.
안개가 휘감은 듯한 얼굴의 이목구비가 쉴 새 없이 변했다. 그리고 몸뚱이는 뼈가 없는 것처럼 구부정한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 살다살다 저런 괴물들까지 보게 되네.”
그 사이 탈마가 멸마회의 피해를 전했다.
[열여섯 명이 죽었어요.]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신마와 천룡전에 대한 일이 끝난다면 멸마회의 무인들은 강호의 주축이 되어야 했다. 만매만전을 깊이 받아들였으니 장차 좋은 방향으로 강호를 이끌 동량지재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오랜 만에 화가 났다.
얼굴도 없는 실혼인 따위가 강호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얼굴 없는 새끼가 서른 명이나 있네.”
그 때 교주전의 문이 열리며 제갈삭이 양 옆에 무인을 대동한 채 등장했다.
“무면인이 아니라 천공인이라네.”
괴마들 사이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마두에 불과했지만, 그들에게는 수십 년 전에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다. 비록 마음을 주고받지는 않았으나, 같은 곳에 속했던 이가 한없이 타락한 광경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병신 같은 새끼.”
묘마가 읊조렸고, 악마는 한 숨을 내쉬었다.
망아취자는 검을 버렸다.
그리고 양 팔을 휘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어이, 삭이. 나일세. 기억하는가?”
제갈삭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조달수. 늙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 같으니 되새겨주마. 너와 나는 그리 친하지 않았고, 나는 특히 너를 아주 싫어했어. 그깟 화산파가 뭐라고 내게 목숨을 걸라고 강요를 한단 말이냐.”
망아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안 통하는군. 역시 못생긴 자의 원한은 바다보다 깊다더니.”
있지도 않은 속담이고, 되도 않는 도발이다.
하나 제갈삭에게는 즉효였다.
“놈! 나는 제갈삭이 아니라 현무령이다! 이미 천룡에 감화되어 천마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지. 그가 등장하면 너희들은 모두 핏덩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마치 저주를 퍼붓듯 길길히 날뛰었다.
하지만 망아취자는 그런 현무령의 기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네 사정은 됐고, 옥주는 어디 있느냐?”
탈마가 의아해하는 맹주에게 귀엣말을 했다.
“검후의 본명입니다.”
“아······.”
현무령은 코웃음을 쳤다.
“흥! 이미 죽었다. 개밥으로 주었지.”
망아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네 깟 놈과 더 이상 대화를 할 이유가 없어졌구나. 잘 됐어. 그냥 죽이는 것보다 옥주의 복수를 위해 네 놈을 죽이는 편이 낫겠구나.”
그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제갈삭을 향해 내달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순간 망아취자에게 쏠렸을 때 이훤은 슬쩍 뒤로 물러섰다.
[저 새끼, 거짓말이네.]
탈마는 이훤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좋은 새끼들은 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죠.]
[기억하냐?]
[한마는 몰라도 검후의 기운은 기억하죠.]
이훤은 슬쩍 자리를 옮겨 탈마를 가려주었다.
[찾아와.]
[그런 구멍을 거슬러 올라가서 물건을 훔치는 게 바로 접니다!]
탈마는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 사이로 몸을 숨겼다.
바로 옆에 있던 맹주조차 한순간 탈마가 사라졌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만매만전을 떠올려라.”
이훤의 읊조림에 멸마회의 무인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만매만전은 이 세상의 근원이니 순리를 벗어난 무엇이 등장해도 흔들릴 까닭이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이훤도 내달렸다.
한데 서른 명의 천공인은 의도적으로 이훤과 괴마들을 피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기에 멸마회의 무인들을 노렸다.
이훤은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제갈삭의 새로운 이름, 현무령.
그리고 좌우에 선 청룡령과 백호령 중 한 명만 죽이면 천공인이 무력화됨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을 가득 채운 자연지기 사이로 위화감이 일 정도로 기이한 기운이 스멀스멀 퍼지고 있었다. 천공인들과 연결된 기운의 끝에 진짜가 있을 터였다.
‘셋 중 한 놈이 천공인을 조율한다면······.’
답은 언제나 같았다.
‘다 죽이면 되지.’
이훤은 천공인이 아니라 제갈삭을 노렸다.
중앙에 있는 놈을 노리면 좌우의 청룡령과 백호령이 알아서 막아설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무당파의 백암진인이라 불렸던 백호령이 이훤에게 검을 내질렀다.
형(形)은 태극검이지만, 의(意)는 신마의 심득이 담겼다.
그렇기에 눈으로 보이는 검신과 달리 주변에 흩뿌려진 무형의 검기가 수두룩했다.
“너와 한 번 붙어보고 싶었다!”
백호령의 일갈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나 이훤에게 있어서는 먼저 다가와준 백호령이 고마울 뿐이다. 이제 십이성 대성에 근접한 천공혈륜겁은 더 이상 단전에서 혈륜을 뽑아 올리지 않았다. 천공혈륜겁의 완성은 곧 대자연과 하나 됨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주변에 퍼져 있는 자연지기가 혈륜으로 변하여 스며들었다. 그리고 팔황이 늘어지면서 만들어진 기형의 검을 혈륜이 휘감는 순간 먹구름을 꿰뚫고 하늘에서 붉은 선이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쩡-
천지의 기운이 한데 뭉쳐져 사람을 통해 폭발했다.
그 순간 백호령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
다.
하늘에서 내리꽂힌 붉은 선이 자신의 몸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촤아아아아악!
백호령의 몸은 절반으로 찢긴 채 좌우로 흩어졌다.
이훤은 그 사이를 내달리며 제갈삭을 눈에 담았다.
한데 제갈삭은 몸을 뺐다.
청룡령이 나섰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교주전 주변에서 수백 명의 마교도가 쏟아져 나왔다.
몽롱한 눈빛과 거친 호흡만 봐도 강림혼요술에 젖은 자들이다. 한데 기세 좋게 달려드는 것과 달리 손발을 놀리는 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이거 뭐야?”
멸마회의 무인은 종잇장처럼 튕겨나가는 마교도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근처에서 밭을 갈 던 자야. 자! 정파의 위선자들께서 죄 없는 민초들을 어찌할지 너무 궁금하군!”
청룡령은 깔깔 거리며 장내를 내려다봤다.
멸마회의 무인들은 흐느적거리며 접근하는 마교도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파의 무인으로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을 해한다는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는 게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이훤의 외침에 청룡령은 히죽거렸다.
하나 이훤의 외침은 마교도가 아니라 멸마회를 향했다.
“강림혼요술은 독과 같다. 저들은 이미 독살당하여 강시처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해. 불쌍하고, 안쓰럽고, 죄책감이 느껴진다면! 더 고통 없이 죽여주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괴마들이 먼저 움직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강림혼요술에 당한 자들의 말로를 지켜봤기에 찜찜할지언정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하나 느려도 너무 느렸다.
이훤은 혀를 찼다.
그리고 동시에 팔을 뻗었고, 핏빛 기운이 대침(大針)처럼 응축된 채로 흩뿌려졌다.
푹푹푹푹푹푹푹푹!
그 순간 수백 명의 마교도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주저앉았다.
“아.”
맹주를 비롯한 멸마회의 무인들은 침음을 내뱉었다.
이훤의 과감한 손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지했으나, 눈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쯧.”
이훤은 혀를 찼다.
그가 양민들을 정리하는 사이에 현무령과 청룡령은 자취를 감췄다.
한데 섣불리 교주전으로 들어가기에는 검후와 한마의 안위가 걱정됐다. 그 때 허공에서 탈마가 검후를 들쳐 업은 채 내려섰다.
“검후!”
멸마회의 무인들이 몰렸다.
망아취자는 검후의 안색을 확인한 후 나직이 침음을 내뱉었다. 푸르죽죽한 안색과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흐릿했다.
“강림혼요술을 낮밤으로 주입했나 봐요. 아직까지 버티기는 했는데······.”
이훤은 혀를 찼다.
“쯧, 차라리 강림혼요술을 받아들였다면 치료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맞아요. 일부러 버티셔서 정신이 붕괴하기 직전입니다. 연세가 있으셔서 몸도······.”
탈마가 말끝을 흐렸지만, 뒷말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나 검후는 오히려 고개를 숙인 탈마의 손을 잡아준 후 나직한 한 마디를 건넸다.
“강림혼요술은 교감으로 시작되지. 상대가 나를 엿본 만큼 나도 엿보았네. 교주전이 아니야. 원로원으로 가. 그곳에서 천마가 만들어지고 있다. 한마도 거기에 있을 게야.”
검후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망아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며칠은 버틸 수 있지?”
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버텨 봐. 금세 돌아올 테니까.”
망아취자는 멸마회의 무인들에게 검후를 부탁했다.
그리고 이훤을 향해 읊조렸다.
“천마를 죽이면 끝나는 게냐?”
“멸마회의 일은 그렇겠지요.”
“그럼 나도 그렇겠구나.”
“스승님이 결정하시는 거죠.”
“그럼 옥주와 함께 보내겠다.”
이훤은 빙긋 웃은 후 교주전이 아니라 반대편을 응시했다.
“그럼 슬슬 천마가 만들어진 것 같으니 한 번 가볼까요?”
맹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천마를 막아야 하잖아! 이대로 두고 볼 셈인가?”
이훤은 단호하게 읊조렸다.
“천마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신마에게 갈 수 있어요.”
< 90, 나는 천마다. (2) > 끝
ⓒ 김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