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18화 (218/226)

< 89, 소집령(召集令). (2) >

중원의 도가문파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무당파였다.

화산은 속세화 되어 도호를 사용하지 않고, 혼인과 자식까지 허락됐을 만큼 도가의 색채가 옅었다. 그렇기에 도가를 논할 때 무당파를 떠올리는 건 당연했다. 하나 정파 내의 도가방파라면 모든 사람이 곤륜파를 떠올릴 터였다. 장문인을 중심으로 문도들은 하나가 되어 구도를 꿈꿨고, 폐쇄적인 환경 덕분에 집중을 하기도 편했다.

일 년 내내 찾아오는 이가 아예 없을 때도 있었다.

“허허, 마교가 쳐들어왔을 때 이후로 가장 많은 손님이 찾아왔구나.”

곤륜파 장문인인 청석자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 말처럼 곤륜파는 백여 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을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여 그들은 평소 하던 대로 할 뿐이다.

“정파의 무인이라면 노숙이 익숙할 터, 이 기회에 대자연과 호흡하며 심기를 다잡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게야.”

지극히 곤륜파 적인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뒀다.

하나 맹주까지 밤이슬을 맞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십여 명 정도의 노인들이 객방을 차지했고, 이내 심도 깊은 대화가 이어졌다.

“허허, 죽기 전에 곤륜산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삼십 년 전에 곤륜산 아래를 지나간 적이 있지. 하지만 위에서 보는 풍광은 전혀 다르군.”

“여기서 살면 당장이라도 신선이 될 것처럼 심신에 활력이 넘치는 구려. 아니지. 말이 나온 김에 장문인을 통해 슬쩍 언질을 넣어봐야겠군.”

이미 살만큼 살았고, 부귀영화도 누릴 만큼 누렸다.

그렇기에 맹주를 비롯한 노인들의 얼굴에는 마교를 상대한다는 긴장감보다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클클, 죽기 전에 강호대사에도 끼어보고 나쁘지 않은 삶이었어.”

“내 스승께서 한평생 마교와 일전을 겨뤘다고 자랑을 하셨다네. 같은 이야기를 수백 번이나 들었더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물리더군. 그분을 따라가서 이번에는 내가 영원히 자랑을 할까 하네.”

“자네 몸을 보아하니 잠이라도 푹 자야 밥값을 할 듯하군. 약속 날짜가 내일이니 오늘은 이만 헤어집시다.”

맹주는 주인이 아님에도 객방으로 흩어지는 노인들을 배웅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비선각의 부각주인 종초홍과 경무당의 무인인 청기혁이 다가왔다. 청기혁은 호위 답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등을 보였다.

‘보면 볼수록 기이한 자다. 어째서 저런 자를 몰랐을까?’

맹주는 청기혁을 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이훤이 봤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보다 신기함이 더했다. 종초홍의 보고에 의하면 청기혁의 작년 고과는 평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신마의 심득을 받아들여 한순간 경무대 최고의 고수가 된 것이다.

‘취선관주의 말대로 신세계는 이미 열렸구나.’

정파의 후예들이 급격히 성장한다는 건 어깨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것과 같다.

하여 맹주는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종초홍이 분위기를 살피다가 보고를 시작했다.

“팔대마가 전체의 위치를 확인한 건 아닙니다. 다만 두 곳의 위치를 확인했기에 다른 곳의 위치 또한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맹주는 종초홍이 내민 종이를 보고 침음을 흘렸다.

신강의 전역을 확인할 수 있는 지도의 중앙부근에는 일반적인 팔괘진의 형태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역팔괘의 지형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중앙에 마교도들이 말하는 천산이 있다고 봐야겠구나.”

“한데 신강 땅 전체가 산지이고, 지명이 무의미할 정도로 얽혀 있다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내일 도착할 취선관주에게 달렸다는 의미로구나.”

“그러합니다.”

“클클, 그러고 보니 취선관주는 자네의 의형이 아닌가. 향후 무림맹주라도 노려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종초홍은 맹주의 농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무림공적인 의형 때문에 승진은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유명하며, 범접불가인 의형이라면 공적이어도 된다네.”

“그래도 괴마는 시켜주지 않더라고요.”

“하하하! 그거 나름대로 선별 기준이 까다롭더군.”

그 때 곤륜파의 문도가 나타났다.

“괴마의 전언이랍니다. 내일 오시에 성석정에서 회합을 가진답니다.”

곤륜파의 명소인 성석정은 한 때 정마대전에 대비하여 무림맹에서 회합을 가졌던 장소였다.

다음 날 백수십 명의 무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성석정으로 향했다. 지난 밤 비장하게 결의를 다진 사람도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이도 있으며, 천명을 따른다는 경건함에 젖은 자도 있었다. 하나 성석정에 오른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멈칫했다.

“어서 올라오세요! 시간 없습니다.”

탈마는 시전에서 호객을 하는 점소이처럼 손짓을 하며 외쳤다. 무인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잰걸음으로 달려갔다. 성석정은 한순간에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했다.

이학주 또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상태였다.

무림맹주라는 직위가 이 자리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저 마교를 공격하고, 천룡전을 찾아내며, 제갈삭을 추살하기 위한 회합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경건하면서도 비장한 분위기를 예상했다.

한데 눈앞에 펼쳐진 건 돗대기 시전과 다르지 않았다.

“자! 지금부터 호명하는 분은 이쪽으로 서세요.”

괴마들은 한 명씩 색깔이 다른 깃발을 들고 있었다.

탈마뿐 아니라 묘마와 악마, 심지어 색마와 전마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호남에서 온 왕교공! 이쪽으로 오세요. 아니! 연고룡 말고! 구절창을 사용하는 왕교공!”

이학주는 눈앞에서 펼쳐진 뜻밖의 광경에 헛웃음을 연발했다. 하나 손녀 뻘인 전마가 자신을 호명하는 순간 뭐에 이끌린 듯 발길을 돌렸다. 한바탕 소란을 끝으로 무리가 여섯으로 나뉘었다.

“지금부터 인솔자를 따라 이동합니다. 종착지는 마도팔가 중 한 곳이며 오늘부로 지도에서 지워버린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세요.”

누군가 우려 섞인 말투로 외쳤다.

“마인 중 천인공노할 자들이 있기는 하나 일반 마교도 중에는 죄가 없는 자도 있을 게요. 그들까지 모두 죽여야 한다면 너무 과하지 않겠소?”

악마가 나섰다.

“이미 마도팔가를 필두로 마교 자체가 봉문에 들어갔습니다. 천마가 탄생하면 힘을 한데 모아 단박에 치고 나올 계획이겠지요. 그로 인해 일반 마교도들은 외곽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악질인 마인들을 징치하기에 최적의 상황이지요.”

잠시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하면 취선관주께서는 마교의 위치를 확인하셨소?”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갈삭이 수를 썼어. 마교팔가 내에 신마의 심득을 퍼트려 감시망을 극대화했지. 이제 나를 제외하면 누구도 감시망을 피해 마교에 이를 수 없게 됐어. 그러니 외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마교팔가를 무력화시킨 후 마교를 노린다.”

검후와 한마를 위해서 고안한 작전이다.

마교팔가의 위치는 중원에서 향할 때 여섯 곳이고, 새외 쪽으로 두 곳이 자리했다.

“전마에게는 스승님과 맹주를 붙여놨으니까 팔가 중 가장 약한 혈륜마가를 맡는다.  전마가 이제 감지를 할 정도가 되었으니 맹주는 신마의 심득을 깊이 익힌 자들부터 정리를 해줘요.”

“탈마는 경공과 잠영에 능한 자들과 절벽 위에 위치한 공천마가를 맡는다. 색마는 곤륜산의 지류를 따라 이동한 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괴문마가를 맡아. 놈들의 세력은 방대하지만, 드러났다. 그러니 정면에서 밀어붙여. 묘마와 악마는······. 그냥 알아서 해라.”

누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섯 곳이라 하지 않으셨소. 취선관주는 누구와 마가를 공격할 것이오?”

이훤의 곁에는 축융노도만이 자리했다.

진생일선은 펼치는 순간 상대도 죽고, 나도 죽는다.

그렇기에 축융노도는 검을 품고 있었지만, 도저히 무공을 펼칠 수 없는 상태였다.

“말동무가 있으면 됐지.”

그리고 잠깐의 통성명 이후 여섯 무리가 빠르게 성석정을 빠져나갔다.

“공격은 삼 경, 그리고 마무리는 해가 뜨기 전까지. 그리고 다시 삼 경까지 나를 찾아 와.”

괴마들만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했다.

하나 무인들은 망설임 없이 괴마들을 따랐다.

애초에 선별된 이유부터가 만매만전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천관심결로 머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성공해서 보자!”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신마가 무엇을 꾸미든 세상이 변할 거다.’

*

전마는 심호흡을 했다.

갓 약관을 넘긴 여아가 서른 명의 무인들을 이끌었다.

소규모처럼 보이지만, 면면만 따지자면 화산의 전대고수와 무림맹주가 속했다. 그 외에도 신마의 심득을 제대로 받아들인 이들이다.

“으음, 혈륜마가의 전력은 삼백 명 정도라네요. 색마의 정보대로 남문을 통해 진입합니다. 선봉에는······.”

망아취자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가겠네.”

맹주라고 해도 망아취자가 나선 이상 선봉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제가 선배의 뒤를 받치지요.”

“고맙네.”

전마는 밤하늘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제 곧 삼경입니다.”

“가지.”

망아취자는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검을 슬슬 흔들며 나아가는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촌부의 밤마실이었다.

혈륜마가는 본래 마교의 선봉을 도맡았던 전통의 마가였다. 하여 마공의 수준만 논하자면, 팔대마가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기에 충분했다. 하나 몸으로 마공을 익히는 자들답게 신마의 심득은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훤이 전마에게 맡긴 셈이다.

저벅저벅-

망아취자가 지근거리에 이르렀음에도 혈륜마가의 높다란 벽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봉문한 상태로 외인의 출입을 물론이고, 가솔들의 출입조차 통제된 상태였다.

“하아.”

망아취자가 나직이 숨을 내뱉은 후 손을 들었다.

활짝 편 손으로 핏빛으로 물든 철문을 가리킨 후 손목을 휘돌렸다. 그 순간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소음과 함께 기사가 일어났다.

그그그그그그그극-

철문이 통째로 일그러졌다.

텅! 텅! 텅!

격자가 사방으로 쪼개졌고, 손목을 완전히 한 바퀴 돌리는 순간 철문이 튕기듯 비산했다.

“적이다!”

혈륜마가 내부에서 경종이 울렸고, 사방에서 마교도가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망아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신마의 심득에 대한 성취만 놓고 보자면 괴마들보다 그가 윗줄이다. 그만큼 빠르게 신마의 다른 심득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무위였다.

그가 보았을 때 눈앞에 등장한 건 마교도나 마인이 아니라 악귀나 다름없었다.

“제갈삭. 아귀떼를 현세에 풀어놓다니······. 선을 넘었구나.”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맹주의 일갈과 함께 서른 명의 무인들이 마교도들을 향해 쇄도했다. 망아취자는 후미에 뒤쳐졌으나, 검을 늘어트리는 순간 자색의 물결이 너울거리듯 공간을 수놓았다. 그리고 노을처럼 뻗어나가던 기운은 마교도만 골라서 갈가리 찢어발겼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진 후 혈륜마가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고, 잿더미로 변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쉴 시간이 없네.”

“출발합니다!”

전마의 외침과 함께 서른 명의 무인은 빠르게 걸음을 내딛었다. 해가 뜨기 전 마도팔가 중 여섯 곳이 전멸 당했고, 육로를 통해 이동하던 무인들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이훤은 성석정에서 떠날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상태로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마교로 간다.”

< 89, 소집령(召集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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