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17화 (217/226)

< 89, 소집령(召集令). >

89, 소집령(召集令).

무림맹주 독천무협 이학주.

홀로 무와 협을 이뤘다는 당대 정파의 최고수였다.

그렇기에 이학주는 자신이 포함됐음에 의아함을 가지지 않았다. 정파 무림의 태양인 자신을 말 한 마디로 불러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스스로 자격을 증명한 이훤의 호출이라면 만사 제쳐두고 움직이는 것이 정파를 위한 길일 터였다. 또한 대강남북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혈사에 휘둘리는 것보다 진짜 적과 부딪치는 걸 선호했다.

하나 그것과 별개로 이훤의 인선(人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섯 명만 부른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면면은 낯설기만 했다.

“장춘기, 구오, 문복, 청기혁이 누구인가?”

문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춘기와 구오는 장로원 소속으로 각기 현월도와 쌍수권벽이라 불립니다.”

이학주라고 해도 장로원의 모든 장로를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설명을 듣고 나니 어렴풋이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데 문복과 청기혁은 문상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결국 여섯 번째 호명됐던 사람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비선각의 부각주인 종초홍은 숙직 중이었는지 호출하자마자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무당의 속가제자인 종초홍은 협의가 드높고, 이훤과 친분이 있으니 일을 처리할 때 도움이 될 터였다. 그 증거로 문복과 청기혁을 거론하자, 쉼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문복은 청료당의 부당주입니다. 무위는 초절정에 근접했으며, 주특기는······.”

맹주가 말을 덧붙였다.

“요리겠지.”

청료당 자체가 무림맹 내원의 주방이다.

그리고 문복은 이훤이 즐겨 먹던 오리찜을 만들어낸 주인공이기도 했다.

“허허, 술을 즐기는 취선관주라면 요리를 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겠지요.”

문상이 웃음으로 분위기를 띄워보려 했으나,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천룡전을 발본색원하고, 마교를 공격하여 천마를 없애려는 작전이 아니던가.

“하아, 요리사라니.”

맹주는 일말의 기대감도 없이 물었다.

“청기혁은 누구인가?”

“청기혁은 경무당의 무인입니다.”

경무당(警懋堂)이라면 무림맹의 내원을 경호하는 호위무사들의 거처였다. 그렇기에 맹주가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당주와 부당주를 비롯해 안면이 없을 수가 없다.

“설마?”

“경무당 무인입니다. 저 또한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의형이 정보를 요구할 때마다 제가 직접 관리를 했더니 이나마 알게 되었지요.”

맹주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하루아침에 골라낸 이들은 아니라는 뜻이군.”

하나 여전히 어떤 이유로 선택된 이들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설명해야 할 탈마는 바쁘다면서 자취를 감춘 후였다.

“아마 신마의 심득 때문이겠지요.”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닐세. 하나 아무리 신마의 심득이 신묘하다고 해도 무공의 고하는 존재하지 않던가. 아닌 말로 자네나 무상이 경무당의 무인보다 약해?”

문상도 쓴웃음을 지었다.

탈마의 발표 때 가장 실망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무림맹의 양 날개라 불리는 문상과 무상이 호명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강림혼요술이나 신마가 만들어낸 기이한 무공 때문이겠지요. 적에게 현혹되는 아군이 강할수록 불리할 테니까요.”

“크흠, 그렇다고 해도 무림맹에서 고작 여섯이라니······.”

문상은 맹주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불쾌해보이지 않으십니다. 가십시오. 강호의 혈사나 다른 일들은 저와 무상에게 맡기고, 오랜만에 악인이나 잔뜩 썰고 오십시오.”

맹주는 대답 대신 검을 들었다.

수련할 때가 아니면 지난 십 년 간 한 번도 뽑아보지 않았던 애병이다.

“비선각의 부각주는 호명된 이들은 은밀히 불러들이고, 개인 장구에 부족함이 없도록 보조하게. 그리고 약속 날짜까지 곤륜산에 도착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그리 하겠습니다.”

종초홍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맹주는 문상을 보며 물었다.

“우리가 여섯이면 다른 곳은 얼마나 될까?”

“비율로 보자면 조금 적거나, 비슷하겠지요. 지금 괴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소집령을 내린다고 하니······.”

“기껏해야 이백 명이나 될까 싶군.”

“소수정예라고 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거대하군요.”

맹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한데 질 것 같지가 않아.”

*

이훤은 마교의 흔적을 찾았을 때 당연하게도 홀로 쳐들어가고자 했다. 그를 만류한 것이 악마였고, 이유는 검후와 한마의 안위였다.

멈췄다.

천룡전과 제갈삭, 그리고 천마가 숨어 있을 마교를 눈앞에 두고 돌아서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아마 제갈삭도 인지하고 있었으리라.

그처럼 주도면밀한 자라면 이훤의 성향을 이미 파악한 후였다. 그러니 천려일실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인질처럼 검후와 한마를 살려뒀으리라.

“대형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만, 제 사람에 대한 애착이 강해. 그리고 상대가 그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은 잠시 멈출 때입니다.”

이훤은 아쉽거나, 화내지 않았다.

천애고아였던 그가 이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지금에 이르렀다. 회귀라는 기연으로 인해 가장 좋았던 것을 세 가지만 고르라면 다음과 같았다.

술, 매화, 그리고 가족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망아취자와 노군은 가족과 다르지 않다. 괴마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들과 얽힌 이들 또한 소중했다.

“사람을 모아라.”

“생각해둔 사람이 있어요?”

이훤은 탈마의 물음에 소면의 면발을 뽑아내듯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화산에서 시작된 강호행은 개미굴과 화청궁, 종남파를 지나 산동성과 하남성에 이르렀고, 무림맹을 지나 장강 이남의 형산까지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만매만전으로 변화한 이들에 대한 정보는 매순간 비선각의 종초홍과 하오문의 색마를 통해 누적됐다.

선별 인원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1, 강림혼요술에 현혹되지 않을 정신력이 강한 자.

2, 천관심결을 통해 천기를 읽고 대비한 자.

이훤은 호언장담을 했다.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면 자신의 소집령에 응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고 말이다.

하여 괴마들은 강호로 보냈다.

그들이 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퍼트렸다.

전서구와 전서응, 인편과 역마가 동원됐다.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곳은 괴마가 직접 찾아갔다.

무림맹을 떠난 탈마는 마교가 위치한 신강이 아니라 북상하여 원양에 이르렀다.

그가 향한 곳은 장평문이라는 방파였다.

장평문은 창술을 중심으로 세 가지 무공이 알려졌고, 인근 시전에서 자릿세를 받는 것으로 운영됐다. 문주의 무공은 절정과 초절정의 경계였고, 문도의 숫자는 사십 명 남짓이다. 하나 하남성 내에서는 적당히 좋은 사람처럼만 굴어도 문파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장평문주는 전형적인 위선자였다.

비선각 부각주인 종초홍의 정보였으니 겉이 어떠하듯 속은 썩어문들어졌으리라.

“동네가 왠지 낯이 익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매화군자 흉내를 내며 산동성으로 향할 때 술을 얻어 마셨던 마을이다. 한시바삐 산동악가로 가느라 장평문이라는 문파가 있는 줄도 몰랐다.

‘흐음, 사파나 다름없는 곳에서 데리고 올 놈이 있다고?’

이훤의 말이니 신뢰할 수밖에 없지만,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한데 싱글벙글 웃고 있던 탈마가 장평문에 가까워질수록 미간을 좁혔다.

이건 피 냄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본업을 잊은 사람처럼 정문을 열어젖혔다.

“······.”

수십 명이 쓰러진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십 구의 시신 사이에 오직 한 사람만이 양 손에 단창을 쥔 채 서 있었다. 피에 흠뻑 젖은 채 달빛을 받고 있으니 섬뜩하기 그지없을 터였다. 한데 탈마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과 달리 또렷한 눈동자, 대나무처럼 꼿꼿한 허리와 가슴을 활짝 편 모습은 당당함의 극치였다.

“나는 탈마야.”

“무림공적이시군요. 저는 조괄이라 합니다.”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조괄은 단창으로 시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씻어야 할 건 저들의 죗값이지요.”

“도와줄까?”

탈마의 말에 조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채에 이들에게 납치된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재화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도와줄게.”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날이 밝을 때까지 돈이 될 만한 것을 모조리 꺼내어 장평문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장평문에 불을 질러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 외쳤다.

“여러분! 장평문은 하늘의 심판을 받아 사라졌으니 원한은 잠시······.”

탈마의 낭랑한 외침에 사람들은 슬퍼하고, 기뻐했다.

그리고 모든 재화가 골고루 분배되었을 때 봇짐을 짊어진 조괄이 나타났다.

“이거 꽤 멋있는 역할이야. 왜 양보한 거야?”

탈마의 가벼운 물음에 돌아온 답은 꽤 묵직했다.

“저 또한 저들과 같았습니다. 만매만전으로 변했다지만, 저들의 원한은 변하지 않아요. 제가 나서서 재화를 나눠주는 것이야 말로 위선의 극치겠지요.”

“그래서 나를 따라오려는 건가?”

조괄은 탈마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들의 손에 죽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해야 함을 알고 있기에 기다렸을 뿐입니다. 제가 죽을 자리는 대협께서 알고 있으니 부디 이끌어주십시오.”

탈마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멋있게 죽는 역할 정도는 만들어줄게.”

조괄은 단창을 허리춤에 끼고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

“재미없는 친구로군. 우리는 마교를 치러 간다.”

“알겠습니다.”

*

묘마는 재밌는 광경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부자(父子)로 보이는 노인과 중년인은 서로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버지,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니다!”

“제가 부족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 천관심결에 대한 심득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오늘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다행히 둘째가 있으니 이 아들은 천하의 향방을 가르는 현장으로 떠나 눈으로는 기억하고, 몸으로는 행하겠나이다.”

노인의 두툼한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하지 않느냐? 왜! 너만 간단 말이냐? 나도 가겠다. 마교라고? 이 아비가 어린 시절에만 수십 명의 마졸을 베면서 네 어미를 만나······.”

부자는 서로 가겠다고 싸우는 중이다.

묘마가 헛웃음을 지은 후 슬그머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노인은 말끝을 흐리더니 보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이내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았다.

중년인은 묘마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고맙네. 내가 직접 아버지께 손을 쓰기는 아무래도 좀 그랬거든.”

“어차피 취마가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면 동행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어. 그러니 의미 없는 말싸움은 그만 하고 떠나자고.”

중년인은 서책 한 권만 쥔 채 휘적거리며 묘마를 뒤따랐다.

“그게 전부야?”

“독청후는 이것만 있으면 된다네.”

묘마는 듣도 보도 못한 독청후(讀淸喉)라는 기예에 헛웃음을 흘렸다. 담대평이라는 이름의 중년인은 신마의 심득 중에서도 특이하게 강림혼요술을 체득했다. 그로 인해 자신이 만들어낸 서책의 구결을 외침으로서 상대를 흔들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제대로 바뀌었군.’

그녀는 날짜를 헤아린 후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쯤이면 중원 곳곳에서 신강성에 위치한 약속 장소로 무인들이 몰려오고 있으리라. 예상대로 그녀가 곤륜파에 도착했을 때에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합류한 상태였다.

“맹주.”

맹주는 묘마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여 전음으로 안부를 물었다.

[무탈하셨군요.]

묘마는 손사래를 쳤다.

맹주인 이학주의 배분은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였던 묘마와 큰 차이가 없었다.

[편하게 대해. 다 온 거야?]

[화산연맹이 아직입니다. 조금 전에 산문을 지났다니 슬슬 모습을 보일 때가······.]

맹주는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망아취자를 필두로 화산연맹의 무복을 걸친 이들이 등장했다.

한데 그 숫자가 무려 사십여 명에 이르렀다.

맹주와 문상의 예상대로 단일 세력에서 가장 많이 선별된 곳은 무림맹이었다. 공동파는 일대 제자가 한 명이었고, 구파 중에서 한 명도 선별되지 못한 곳도 있었다.

맹주는 화산의 맹도들이 줄지어 등장하는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읊조렸다.

“허어, 화산의 세상이 오겠구나.”

< 89, 소집령(召集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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