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15화 (215/226)

< 88, 폭풍전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88, 폭풍전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림맹이 개최한 신무대회는 여러 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화려한 폭죽놀이로 시선을 끌었고, 신마의 심득이 만인에게 전해지는 경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종극에 이르러서는 신마의 심득을 전한 이훤이 무림공적으로 몰려 추살령이 내려졌다.

“그러고 보면 올 한 해는 다사다난했군.”

호사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훤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흐음, 무림공적이기는 한데 말이야. 뭐랄까? 실감이 나지 않는군.”

대다수가 이와 같은 반응이었다.

무엇보다 무림맹은 이훤이 신마의 심득을 독점하기 위해 생존자들을 불러 모았고, 일부러 잘못된 심득을 전했음을 가장 큰 죄로 내걸었다.

하나 강해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만 있어도 목숨을 내놓는 자들이 바로 강호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무림맹의 공표에도 불구하고, 이훤이 전한 신마의 심득을 익혔다. 그리고 이훤이 장강 이남으로 사라질 무렵 여기저기서 호사(好事)가 들려왔다.

“장강문의 막내 제자가 문주가 되었다고?”

“서풍 지역의 패주였던 혈조방이 일개 엽사에게 멸문 당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공동파의 일대 제자가 무관주와 시비가 붙었다고 무참하게 박살났다는군.”

만매만전으로 인해 강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면 신마의 심득이 통으로 전해지는 순간 분위기가 아리나 현실이 바뀌었다.

호사가들은 이제 이훤이 아니라 무림맹을 눈여겨봤다.

“도대체 무림맹은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무림맹은 전과 다르지 않지만, 내부는 완전히 뒤바뀌어 다른 조직이 되었음을 말이다.

맹주전에서 조촐한 연회가 열렸다.

한데 좌석 배치가 평소와 달랐다.

독천무협 이학주가 오른쪽에 앉았고, 반대편에는 무상(武相) 검천제성(劍天帝聖) 갈량이 자리했다. 입구 쪽에 앉았던 문상 혜석자(慧晳子)가 상석을 향해 술잔을 들어올렸다.

“오늘 태가장주가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이권과 세력을 해산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이로서 맹 내에 숨어들었던 간자와 가짜, 그리고 배신자들이 모두 배제됐습니다.”

맹주가 문상의 말을 받았다.

그 또한 상석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 모든 것이 망아취자께서 힘써 주신 덕분입니다.”

맹주가 주인인 무림맹의 맹주전이지만, 상석에 앉은 건 망아취자였다. 그는 무림맹의 수뇌부들을 내려다보는 상황임에도 느긋했다. 권세를 즐기는 것도 아니도, 자신의 노력을 보상받으려는 것도 아니다.

“무위는 행하는 것도, 행하지 않는 것도 구애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이 아래로 흐르고, 낮과 밤이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지요. 만매만전이 퍼져나갈수록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과례는 비례라고 했다.

결국 과한 겸양 또한 좋지 않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맹주를 비롯한 문무상은 망아취자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그들 역시 만매만전을 통해 큰 성취를 이뤘기에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미 이번 일로 고생을 한 이들에게 술과 고기를 비롯해 충분한 보상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만은 요대를 풀고, 진탕 마셔보십시다!”

호탕한 성격의 무상이 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망아취자는 빙긋 웃은 후 술잔을 들며 말했다.

“취선관주의 노고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풀렸습니다. 그를 위해 술을 마십시다!”

네 사람이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하나 그들 모두 무림공적이 된 이훤이 고초를 겪고 있을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나쁜 놈이라고 낙인이 찍힌 이상 마음껏 술을 훔쳐다가 마시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공적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요?”

무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맹주와 문상이 시선을 교환했고, 결국 망아취자를 바라봤다. 그들은 당금 강호에서 이훤과 망아취자의 관계를 알고 있는 극소수의 요인들이다.

망아취자는 취기를 억누르지 않았기에 불콰해진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제 놈이 하고 싶어 할 때까지 내버려둡시다. 때가 되면 알아서 풀어낼 게요.”

“취선관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없지요.”

문상은 지자(智者)의 논리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훤의 행적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아! 그나저나 곤륜파가 이번에 큰 성과를 이뤄냈다고요?”

맹주의 말에 곤륜파 출신인 문상 혜석자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한 때 서쪽의 방벽이라 불릴 만큼 중원을 수호하던 곤륜파가 아니던가. 하나 중원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외부와 교류하지 않는 법규로 인해 나날이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런 곤륜파에 호재가 생겼다.

일신의 수양을 중시하는 곤륜파로서는 만매만전의 등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곤륜파는 장문인을 비롯해 문도들이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그로 인해 청해성 인근의 모든 세력이 곤륜파의 입만 바라보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최근 곤륜파의 장문인이 청해연합에 등장하여 문호를 열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장문인이 큰 결심을 했지요. 실상 제게는 사제이지만, 그처럼 고지식한 이가 없답니다. 하여 제가 무림맹에 가겠다고 했을 때 검까지 뽑으며 만류했지요. 그런 이가 강호에 발을 들이겠다고 결심을 했으니······.”

“곤륜파의 성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무상의 축하가 이어졌다.

“이 또한 망아취자께 감사를 표해야겠지요.”

망아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신마가 어떤 사람이든, 그가 남긴 심득이 무엇이든... 이쯤에 와서는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생겼으니 그로써 족하지요. 그걸로 족합니다. 나라는 사람은 신마를 통해 천명을 받았고, 이제 존재 의의를 다하였으니 더 이상의 명예나 물욕은 무의합니다.”

물아일체에 대한 관념이 그에게는 세상과 하나 됨을 의미하는 듯했다. 마치 지금 당장 등선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묘한 분위기에 맹주조차 침을 꿀꺽 삼켰다.

“문상.”

그 때 공교롭게도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 나타났다.

무림맹의 정보조직을 총괄하는 비선각주였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문상에게 귀엣말을 했다.

“하아. 그게 사실인가?”

“얼마 전부터 그들의 동향이 예전과 달라 정보력을 집중하기는 했습니다. 한데 이각 전부터 사방팔방에서 전해지는 정보의 내용이 겹치기 시작했고, 일각 전부터는 대동소이한 내용이 전달됐습니다.”

“신뢰도가?”

비선각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읊조렸다.

“신뢰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시급한 정보라고 생각됩니다.”

문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내주었다.

“자네가 직접 보고하게.”

비선각주는 망아취자가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한뭉치의 서류를 꺼냈다.

맹주와 무상이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그 순간 술상을 대신하던 탁자 위의 모든 물건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텅 빈 탁자 위로 각지에서 전해진 보고서가 놓였다.

비선각주는 수십 장의 보고서를 늘어놓은 후 좌중을 향해 말했다.

“마교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맹주는 눈으로 보고서를 빠르게 훑은 후 무상을 향해 턱짓을 했고, 무상은 황급히 벽에 걸려 있던 중원의 전도(全圖)를 가져와 펼쳤다.

“마교는 팔대마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네. 그들의 영역을 표기하게.”

문상은 손톱만한 종이가 붙은 대침을 신강 곳곳에 꽂았다. 각기 다른 색의 깃발은 팔대마가를 상징했다. 문상은 빠르게 팔대마가의 특징을 설명한 후 침음을 흘렸다.

“한데 단순히 교주가 바뀌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미 교주는 죽었다고 보는 건가?”

“팔대마가가 봉문에 가까울 만큼 외부로 내보냈던 마교도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출입조차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답니다.”

“교주가 바뀐 건 확실하군.”

마교는 정파의 영원한 숙적이다.

그리고 맹에 스며든 천룡전의 잔당들을 모조리 처리한 순간에 일어난 변고였기에 더더욱 불길했다.

“천룡전이 마교를 움직이려는 건가?”

“아무래도 그것이 순리이기는 하지요. 저였다면 처음부터 마교를 움직였을 겁니다. 무림맹 내부에서 일을 꾸미는 건 일견하기에는 좋아보여도 난관이 너무 많아요. 지자라면, 크흠! 제갈세가 출신인 제갈삭이라면 변수를 인정할 리가 없지요. 그런 그가 무림맹을 도모했기에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한데 이제야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드는군요.”

비선각의 무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시시각각 정세가 변했고, 신뢰도가 뒤죽박죽인 정보가 쌓이기 시작했다. 맹주는 검지로 이마를 매만지며 골머리를 앓았고, 무상과 문상은 맹의 가용 전력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다.

“곤륜파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혜석자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빨리 가져오게.”

곤륜파는 마교가 발호했을 때 최일선에서 마주하는 정파의 방패였다. 그리고 마교가 발호할 때마다 환난에 휩쓸려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도 했다.

“곤륜파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무상의 물음에 문상은 침음을 흘렸다.

“그건 아닙니다. 하나 큰 일이 생겼군요.”

“무엇인가?”

문상은 곤륜파가 전서응까지 사용해서 보낸 전언을 건네며 말했다.

“수천 명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인이 남쪽에서 올라왔답니다. 백 단위로 끊어서 이동하던 중 본 파의 문도들과 싸움이 벌어졌고, 그들은 신강 쪽으로 사라졌답니다. 그리고 본산의 기록과 대조한 결과 정마대전 당시 남쪽으로 도망쳤던 마교의 잔당들임이 확인됐습니다.”

무상은 입매를 실룩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머릿수가 늘어나 봤자지. 마교도 따위는 하루 종일도 때려잡을 수 있다네!”

반면 맹주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작금의 마교는 정마대전의 패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어. 가장 큰 문제는 천마의 부재와 정통성의 상실이었지.”

문상이 말을 받았다.

“남쪽의 잔당들이 신강의 마교와 하나가 된다면 정통성을 되찾게 됩니다. 놈들은 신교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모두 말을 아꼈다.

상상만으로도 얼굴을 찡그리게 되면 존재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나 망아취자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 후에는 천마를 만들려고 하겠지.”

“아무래도 취선관주가 남긴 말마따나 강림혼요술은 마교에 있는 자가 익혔겠지요. 그렇게 되면 제갈삭은 천룡전의 수장이 아니라 하수인이었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고, 결국 마교에 숨어 있던 절명곡의 마지막 생존자가 천마로 등극하겠군요.”

“천마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등을 보이고 도망칠 사람들이 즐비할 겁니다. 천마란 그런 존재니까요.”

무상의 걱정스런 말에 맹주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천마의 등장만은 반드시 막아야 해.”

“하나 신강으로 도망친 마교의 위치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무림맹이 나섰어도 수십 년 동안 팔대마가의 영역 정도만 확인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설령 마교의 위치가 알려진다 한들 누가 신강까지 가겠습니까?”

신강은 새외라고 하기에도 뭐할 만큼 중원과 동떨어진 세상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협의지심을 부르짖어도 쉽사리 갈 수 없는 장소였다.

그 때 망아취자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어째서 천마인가? 신마의 심득이란 분명 전해지는 천마의 위엄보다 윗줄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가 나타난다면 이 또한 누군가의 의지가 섞인 일이 아닐지 우려를 금치 못하겠구려.”

문상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탄 하듯 읊조렸다.

“폭풍전야로군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엄두도······.”

그 때 맹주전 일대에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훤이 튀어나오며 코웃음을 쳤다.

“폭풍전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88, 폭풍전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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