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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214화 (214/226)

< 87, 폭풍전야(暴風前夜). >

87, 폭풍전야(暴風前夜).

노룡군도는 며칠 사이 십 년은 더 늙은 것처럼 초췌했다.

‘술에 환장한 작자들이다.’

비록 자신의 사형인 축융노도와 동격이지만,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일 푼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악마와 묘마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을 뿐이다.

‘모두가 사형처럼 희생했다면 애초에 천룡전이 이렇게 날뛰지도 못했을 게야.’

그는 괴마들을 인솔하는 내내 마뜩찮은 표정을 보였다.

축융노도와의 결의가 없었더라면 벌써 헤어졌으리라. 하나 형산파의 몰락마저 감수하면서 지켜온 결의가 아니던가. 신마의 심득에 휘둘리지 않고, 천하가 안정을 찾는 그 날까지 함께 하고자 했다.

‘괴마라서가 아니라 절명곡의 생존자이기에 더 화가 난다. 저런 자들에게 신마의 심득이 이어졌으니 이런 혼란이 계속되는 거잖아.’

오월동주(吳越同舟)라고 여겼다.

신마가 저지른 일에 대한 판단이 끝난다면 축융노도는 괴마들과 헤어져 다시 숨어들 것이다. 신마의 눈과 귀가 천하를 뒤덮었으니 죽는 그 순간에도 검을 뽑지 않기로 약조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노룡군도는 어느 지역에서 은거를 해야 할지 상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강호를 지키기 위해서, 사형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괜찮을 터였다.

그렇게 축융노도에 대한 그리움을 양분삼아 걸음을 재촉했다. 하나 형산파의 산문을 넘는 순간 예기치 못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사, 사형.”

노룡군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하나 축융노도는 수십 년 간 한솥밥을 먹은 사제의 등장에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앗!”

저자의 범부가 수련을 할 때에도 저렇게 소리를 내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축융노도는 검을 내지를 때마다 가슴 속의 울분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게다가 무인의 품격은 벗어던지듯 상의마저 탈의했다. 노구에도 팽팽하게 당겨진 육신 위로 땀방울이 비 오듯 흘렀다.

일견하기에도 잠깐의 수련이 아니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대답은 반대편에서 돌아왔다.

“수십 년 동안 등껍질 안에 숨어 있던 거북이가 대가리를 내밀었으면 하품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이훤이었다.

노룡군도는 미간을 좁힌 채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형께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다른 놈이었으면 일단 두어 대쯤 후려친 후 발로 짓밟으며 대꾸했으리라. 하나 축융노도와 노룡군도의 관계를 알기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했다.

“축융노도는 억지로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나로 인해.”

“뭐라고? 억지로 짊어졌다니. 사형은 강호의 정의와 인세의 안위를 위해······.”

노룡군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훤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강호의 정의와 인세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네 자유다. 한데 그걸 타인에게 강요하면 안 되지.”

“뭐라고? 정파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억지로 정도와 협의를 부르짖었기에 정파랍시고 위선을 떨고, 암중에서 협잡질을 한 것이 아니더냐?”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

“당금 강호의 어디에서 정도와 협의를 찾을 수 있느냐? 그저 정파의 세상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잖아.”

노룡군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혈을 짚지 마라! 왜 내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잡혈을······.”

이훤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노룡군도는 다시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축융노도의 얼굴을 봐라. 행복해 보이지? 그는 이제 모든 짐을 내게 넘겼고, 오십 년 전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아! 괴마에도 들어오고 싶다고 했는데······.”

이훤은 자신과 축융노도의 얼굴을 번갈아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연령이 너무 올라가는 것 같아서 거절했어.”

노룡군도는 축융노도가 수련을 끝낸 후에야 아혈이 풀려 노발대발했다. 하나 축융노도의 밝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맥이 풀린 듯 안으로 사라졌다.

“고맙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당신이 하기에는 힘든 말이었잖아. 이제 저 자도 당신의 변화를 받아들이겠지.”

“후훗, 오랜만에 사제와 편안한 마음으로 술잔을 나눠야겠군.”

축융노도는 노룡군도를 따라가다가 슬쩍 돌아봤다.

“내가 언제 괴마가 되고 싶다고 그랬나?”

“아니었어? 나는 엄청 끼고 싶어 보이기에 미리 노룡군도를 빗대어 거절한 거야.”

“클클, 괴마라더니. 정말 제멋대로구나.”

그가 사라진 후에도 웃음은 한참동안 이어졌다.

하나 이훤은 미소를 지운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제멋대로였으면 당신의 짐 따위는 절대로 나눠받지 않았겠지.’

그는 축융노도가 가르쳐준 심득을 떠올렸다.

신마의 심득답게 수련의 방식과 시기는 무의미했다.

인연이 닿는 다면 그 순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심득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축융노도의 심득은 듣는 순간 그대로 행할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형산파의 소우주경이 천관심결과 무형진기, 만매만전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원점에서 다시 시작이네.’

축융노도가 전한 신마의 심득은 진생일선(盡生一線)이라 했다. 생이 다하는 하나의 선이라는 뜻은 몇 번을 헤아려 봐도 의미심장할 따름이다.

본래 신마가 전한 여덟 가지의 심득 중 본바탕이 되는 걸 천공혈륜겁이라 여겼다. 그리고 천공혈륜겁이라는 그릇에 다른 심득이 더해져 완성이 된다고 생각했다.

축융노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확신에 가까웠다.

하나 진생일선을 알고 나니 달라졌다.

마치 어떤 길을 가더라도 도착지가 같은 지도를 받아든 기분이다. 그리고 신마가 의도한 도착지는 분명 진생일선일 터였다.

‘진생일선이란 무엇일까?’

이훤은 사마외도를 때려눕히고 다니다가 습득한 검을 쥐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혈륜이 들불처럼 일어나 진생일선의 심득을 구현하리라.

하나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축융노도는 오십 년 간 단 한 번도 진생일선을 펼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살아 있다고 설명했고, 이훤도 같은 생각이다.

‘생기를 모아 한 번에 잘라내는······.’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절예였다.

축융노도는 어디까지 자를 수 있을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줘야 하니 양패구사의 한 수나 마찬가지였다.

이훤의 뇌리에 축융노도의 마지막 한 마디가 스쳐갔다.

- 신마조차 베어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신마가 아직도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씨발,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냐?’

이훤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나 달과 별이 빛나고, 그만큼 어두운 하늘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

정마의 구분, 고수와 하수의 구분.

그 밖의 수많은 관계는 인간에게만 해당됐다.

정파의 하늘과 마교의 하늘은 다르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형산 어딘가에서 마주하는 달빛과 청해성의 천산에서 내리꽂히는 달빛의 분위기가 달랐다. 달빛은 스산했고, 어딘가 모르게 피 냄새를 품었으며, 수많은 악귀가 모여드는 것처럼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네 놈이 허락 없이 교주전에 들어와?”

흑석을 깎아 만든 의자는 마교의 주인인 교주에게만 허락된 장소였다. 교주는 허락도 없이 교주전에 난입한 자를 응시했다. 이미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수하들이 교주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렇기에 오연한 눈빛으로 배신자를 내려다봤다.

“버러지 같은 놈을 먹여주고, 키워줬더니 내 앞에서 그런 눈을 해?”

교주는 코웃음을 치더니 엄지를 아래로 향했다.

“그냥 죽어라!”

하나 좌우에 도열했던 수하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교주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할 때 배신자가 나직이 한 마디를 건넸다.

“정파에게 등을 보이고, 천산 구석에 숨어 사는 자가 어찌 교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놈! 내가 교주다. 내가 아니면 누가 교를 움직일 수 있겠는가? 내가 있는 이상······.”

배신자가 교주의 말을 끊고 외쳤다.

“꿇어라!”

그 순간 수백 명의 교도가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오래 전부터 강림혼요술에 젖어든 이들이기에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교주는 반쯤 혼이 나간 표정으로 진저리를 쳤다.

“크흑! 이 흉악한 놈! 교도들이 너를 따른다고 해서 교주가 될 성 싶으냐? 교주의 자리는 원로들이 결정한다. 그리고 원로들은 나를 지지하지. 네 놈이 그 어떤 수를 쓴다고 해도······.”

배신자가 가볍게 발을 구르는 순간 묵빛의 기운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그 기운은 마치 무게를 지닌 것처럼 교주전 전제를 짓눌렀다. 그리고 압박감의 중심부에 앉아 있던 교주의 얼굴에서 땀이 흐리기 시작했다.

“교주 자리는 관심 없다.”

“크흑! 그렇다면 왜 이런 짓을······.”

배신자가 고개를 들었다.

일견하기에도 평범하게 생긴 노인의 눈동자는 피처럼 붉게 번들거렸다.

“나는 천마가 될 것이다.”

마교라는 배를 움직이는 건 교주일지언정 주인이 천마라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리고 마교는 천마를 탄생시키지 못했기에 정마대전에서 패배했고, 천산이라는 변경으로 밀려난 상태가 아니던가.

“네깟 놈이 천마가 된다고?”

우드드드득-

노인이 허리를 펴는 순간 기가 한 자는 늘어난 듯했다.

동시에 기사(奇事)가 연이었다.

그가 걸치고 있던 낡은 흑의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이내 백발과 백염이 마치 옥수수수염처럼 나풀거렸고, 그 자리를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채웠다. 오랜 가뭄에 병든 농토와 같던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내 고목처럼 말랐던 팔다리에 살이 오르더니 청년의 그것처럼 튼실한 몸뚱이로 변했다.

눈앞에서 반노환동을 목격한 교주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신마가 나를 선택하여 천마와 나란히 하기를 원했다.”

“뭐라고? 신마는 오십 년 전에 죽었어. 네 놈이 직접 절명곡에 다녀온 후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노인이 암중에서 교를 장악한 후 교주는 강호의 정세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훤에 대한 정보다 개미굴 이후 끊겼을 정도였다.

교주는 그것을 눈치 채고는 침음을 내뱉었다.

“교를 이미 차지했음에도 지금에야 나타났다는 건······.”

“그래, 나는 진정한 천마가 되어 천하를 지배할 것이다.”

사라라라라락-

어디선가 검은 천이 날아와 청년의 몸뚱이를 휘감았다.

“오냐! 네 놈이 천마가 될 자격이 있는지 내가 시험해보겠다!”

교주를 중심으로 묵빛의 광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가 빛살처럼 허공을 날아 청년의 목을 노렸다.

“천마신공의 일 할도 받아들이지 못한 놈을 교주라고 부를 수 있는가?”

청년은 입꼬리를 올린 후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 순간 교주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허공을 날았다.

청년은 교주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 나는 원로들과 함께 천마신공을 대성하러 가겠다.”

교도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마교는 모든 문을 닫아걸고, 힘을 비축할 것이다.

그리고 천마가 탄생하는 날 폭발하듯 강호를 덮칠 터였다.

청년은 교주의 흑좌를 부순 후 걸음을 내딛었다.

원로원으로 향하는 길에 첫 번째 수하가 등장했다.

장강 이남의 천산산맥으로 도망쳤던 마교의 잔당들을 이끌고 온 청룡령이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청년의 뒤를 따랐다.

두 번째는 천근의 중수를 머금은 천공인들을 이끌고 백호령이다. 그는 무당의 큰 어른이었음을 완전히 잊은 듯 흑의를 걸친 채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마지막은 현무령인 제갈삭이다.

그가 손짓을 하자, 원로원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청년은 자연스럽게 제갈삭을 지나쳐 원로원으로 들어섰다.

제갈삭은 완전히 달라진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신마는 천마신공 또한 심득의 갈래라고 했다. 그러니 네가 정녕 선택받은 자라면 내일 당장이라도 천마신공을 대성할 수 있으리라.’

그 때 청년이 멀리서 한 마디를 건넸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제갈삭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올린 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하늘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클클, 천총대화는 어그러지지 않는구나.”

< 87, 폭풍전야(暴風前夜).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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