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13화 (213/226)

< 86, 형산(衡山). (2) >

“클클, 천하가 피로 잠기는 꼴을 보려면 높은 자리에 앉아야겠지.”

스르륵-

제갈삭은 방갓과 복면, 장삼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형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걸음을 재촉한 후에야 흑의를 걸친 무인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제각기 묘한 기운을 흩뿌리는 자가 무려 일곱 명이다.

“남마교는?”

제갈삭의 물음에 무인들이 부복했다.

그들은 제갈삭의 정체를 모른다. 다만 천룡전의 현무령이라고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현재 무인들을 이끄는 이가 바로 청룡령이다.

“접수했습니다.”

“얼마나 건졌느냐?”

“쓸 만한 무인 이천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청룡령이 인솔하여 사천성의 석진을 지나 북상 중입니다.”

사천성 북쪽의 끝인 석진을 지나면 곧장 청해성이다. 그렇게 되면 사라진 마교가 숨어 있는 신강이 코앞일 터였다.

“정마대전에서 패배한 후 마교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지. 비록 남쪽으로 쫓겨난 이들이 잔당이라고 할지언정 마교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청룡령은 마교의 수족을 자처하며 흡수될 것이다.

그리고 내부에서부터 마교를 물들일 것이다.

천룡의 지휘를 받아 마교를 차지하게 되면 고대하던 정마대전도 꿈은 아닐 터였다.

“청룡령을 따라라. 나 또한 천산마교로 가겠다.”

“모시겠습니다!”

현무령은 네 명의 무인이 짊어진 교자에 올랐다.

이내 한덩어리가 된 이들이 바람처럼 질주하며 사라졌다.

그는 단색으로 변하여 좌우로 흩어지는 풍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온 세상을 피로 물들여주마.’

*

축융노도는 신마의 심득으로 인해 형산파의 잊혀진 절기, 소우주경을 대성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신마의 심득이 순순한 호의나, 질 나쁜 장난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는 도피를 택했다.

상대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이상 휘둘리는 것보다 아예 바둑판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로 인해 형산파의 멸문마저 좌시했다. 아마 죄책감으로 인해 수십 년 동안 형산을 멀리 했으리라.

“형산의 풍광이 어떤가?”

하나 축융노도의 눈동자는 빛났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라면 누구라도 저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하나 이훤으로서는 회귀 전 수십 번이나 오갔던 형산에 대한 감흥이 없다시피 했다.

“오악 중 남악인 형산은 아래로 회안, 위로는 악록에 이를 만큼 산세가 기다랗죠. 한데 웅장하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고, 험준하지도 않으니 날파리가 꼬이기에 딱 좋은 지형이란 말입니다.”

“크흠, 형산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군.”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전 생에서 수십 번은 오갔죠. 아예 터를 잡고 산 것도 몇 년 되고요.]

축융노도는 회귀에 대한 놀라움보다 형산의 평가가 박함을 아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산파가 몰락한 이후 형산은 사마외도의 집결지로 추락한 상태였다.

이훤의 말처럼 산세가 완만하나 봉우리가 많았고, 곳곳에 협곡과 강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팔교, 구담, 십동, 십오암, 이십오계.

형산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다리와 연못, 동굴, 바위, 그리고 계곡의 숫자였다. 그러니 누군가 슬쩍 터를 잡고 살아도 평생 마주하기 힘들만큼 숨을 곳이 많았다. 그렇기에 강호의 도둑과 공적, 사마외도의 잔당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으리라.

이훤 역시 회귀 전 괴마의 시절 형산을 애용했다.

무림맹의 손이 닿지 않는 지역 중에서 도시와 인접한 장소는 강호에서 형산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악록이 곧장 악록산과 연결되고, 그 너머가 동정호의 호변이니 이곳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었죠.]

축융노도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예 걸음을 멈췄다.

“이상하군.”

이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형산이 넓다고 해도 이만큼 움직였으면 인기척이 느껴졌어야 옳다. 아닌 말로 이훤의 기감을 피할 존재라면 천하제일인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지 않던가. 그러니 주변에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형산에 지옥도가 펼쳐졌다던데······. 이런 게 지옥이라면 강호보다 훨씬 평온한 걸요.”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최대한 멀리 기감을 흩뿌리는 중이다.

그제야 몇몇 기운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이훤은 가장 왕성한 기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파팟!

초월경에 이른 두 사람이 경공을 펼치니 무인이라고 해도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만큼 빠르다.

형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좌우로 흩어지듯 밀려났다. 하나 풍광과 달리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의 광경은 그리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중늙은이가 여염집 처자를 납치해왔는지 한참 윽박을 지르는 상황이다. 일단 다리를 부러트리고, 얼굴을 두 배 정도 크게 만들어준 후 저간의 사정을 캐물었다.

자세히 아는 것이 없더라.

두 사람은 가을철 메뚜기가 뛰듯 사방팔방으로 남아 있는 자들을 찾았다. 그렇게 수십 명을 추궁한 끝에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을 만난 사마외도 중 숨을 쉬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제 떠났다는 군요. 남아 있는 건 잔챙이거나, 아예 바깥출입을 포기한 놈들이에요.”

“수백 명이 흩어져서 움직였다면 하나의 세력이 분명해. 천룡전이겠지. 한데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영역이 형산파의 터전인 주룡봉이라는군.”

“가보면 알겠죠.”

형산의 산세 자체가 험하지 않으니 주룡봉에 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나 반쯤 폐허가 된 형산파를 앞에 두니 막막하기만 했다.

“천룡전이 형산을 차지한 이유, 그리고 주룡봉에 터를 잡은 이유. 뭐라고 보세요?”

축융노도는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신마의 심득과 관련이 있을 테니 소우주경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다.

“하나 소우주경의 진본은 노룡군도에게 있네. 그리고 그것을 저들이 모를 리가 없지. 한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들이 오랜 시간 형산을 탐색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모르겠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형산파의 전경을 내려다봤다.

아마 무림맹 근처에 숨어서 폭발을 구경하려 했던 제갈삭은 형산으로 이동한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바람결을 타고 신마의 기운이 미세하게나마 넘실거렸다.

‘왜?’

의문이 깊어질수록 단서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제갈삭과 관련된 단서는 천총대화가 유일했다.

하여 비동에서 보았던 천총대화의 흐름을 떠올리며 형산파의 전경과 맞춰보고자 애썼다. 분명 형산에서 머물면서 무언가 획책을 했을 터였다. 그것을 찾는다면 제갈삭의 다음 행보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형산의 명물인 십동 중 주룡봉에 있는 것이 몇 개나 됩니까?”

“두 개일세.”

“흩어져서 살펴보죠.”

두 사람은 두 개의 동굴을 찾아 흩어졌다.

하나 한 시진이 지난 후 마주한 두 사람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네.”

“아무 것도 없어서 이상한 건 아닐까요?”

“그럴 리 없어. 그곳은 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장소였네. 무언가 숨겨져 있다가 드러났다면, 그리고 그것을 치웠다면 내가 알아차렸을 걸세.”

이훤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무언가 숨겨졌을만한 장소를 떠올렸다. 형산파는 수십 년 동안 도적과 사마외도의 손길을 탄 장소다. 그러니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더라도 파괴됐거나, 이미 사라졌으리라. 하여 주룡봉 인근의 명소를 하나씩 살폈다.

그러던 중 구담에서 단서가 발견됐다.

아홉 개의 못 중 천극담(天極潭)이라는 장소였다.

축융노도는 침음을 내뱉었다.

“맙소사! 천극담이 바닥을 드러내다니.”

이훤은 주변을 살폈다.

그로 인해 천극담이 형산파의 금지였음을 알게 됐다.

“이곳은 누구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장소였네. 어찌된 일인지 중수가 고여 만들어진 연못이기에 냄새만 맡고 있어도 나자빠지기 일쑤였지.”

중수(重水)라면 빠지는 순간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고, 한 모금만 마셔도 오장육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수은의 원료이니 간혹 피부를 곱게 만들려고 쓰기는 하지만, 그 또한 정제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던가.

한데 그 천극담이 말라붙었다.

이훤은 바짝 마른 천극담의 바닥에 내려선 후 주변을 살폈다. 진흙 사이로 햇빛을 반사시키는 은광이 존재했다. 그러니 천극담의 중수가 사라진 건 최근이라는 의미였다.

“이 정도의 중수라면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그릇에 담으면 녹을 것이고, 철에 닿으면 흡수될 것이며, 나무에 담으면 새어나올 겁니다.”

“하나 완벽하게 옮길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지.”

축융노도는 손을 펼친 후 가볍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진흙 한 덩이가 저절로 솟구친 후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기의 공간 속에는 열 방울이나 될까한 중수가 둥둥 떠 있었다.

“중수 또한 자연의 산물, 대자연의 기운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것이 원활하다면 옮기지 못할 까닭이 없지.”

“천극담이 아무리 작다 해도 수십 명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에요. 하면 자신의 몸뚱이만한 중수를 기로 감싼 후 이동을 해야 한다는 건데······.”

“그건 불가능하지.”

이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축융노도와 같은 방식으로 중수를 분류해냈다. 그러나 허공에 띄운 것과 달리 삼켜버렸다.

“그걸 왜 먹어!”

축융노도가 대경실색하며 다가왔다.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맛인가 보려고요. 술을 담글 수 있을까 했는데······. 안 되겠네요. 맛도 없거니와 술과 섞일 놈이 아니에요. 그리고 몸에 보관하는 게 되네요.”

축융노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일견하기에도 제정신이 아닌 자나 할 법한 실험이 아닌가.

하나 이훤이 오물거리더니 먹은 중수를 그대로 토해내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몸을 그릇으로 삼아 중수를 삼킨다면 천극담을 비우는 건 일도 아니겠죠.”

“하나 중수는 먹는 순간 사지백해로 흩어질 것이야. 그렇다면······.”

이훤은 축융노도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이었다.

“당신 수준으로 신마의 심득을 받아들인 수십 명이 존재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죠.”

“하루 이침에 어디서 그런 자들이······.”

축융노도는 혼란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반면 이훤은 단서를 역추적하여 하나의 가설을 완성한 후였다.

“감각사도 중 몇이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요. 어디서 다른 짓을 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하나 천극담을 비워서 무슨 효용이 있다고······.”

이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축융노도가 스스로 깨우쳐야 더 큰 충격을 받을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하나 상대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이훤이 화두를 던졌다.

“천룡전에서 수십 년 동안 정파 내부에 심은 세력은 일소가 됐어요. 천룡과 제갈삭이 기댈 곳은 어디일까요?”

마교(魔敎).

축융노도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훤의 낭랑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이 만큼의 중수를 가져다가 마교에서 쓸 일이 무엇일까요?”

이번만은 축융노도도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천마신공.”

이훤은 축융노도를 압박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제갈삭은 바보가 아닙니다. 무림맹 내에서 끝냈으면 좋았겠지만, 더 쉬운 길은 마교를 끌어들여서 양패구사하게 만드는 거지요. 그런 그가 중수를 가지고 마교로 갔을 겁니다. 자! 아직도 내게 숨길 것이 남아 있습니까?”

“······.”

이훤은 자신의 것을 내놓으라는 듯 당당하게 외쳤다.

“수십 년 동안 현실을 외면했던 당신이 감당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게 신마의 심득을 건네세요.”

< 86, 형산(衡山).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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