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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212화 (212/226)

< 86, 형산(衡山). >

86, 형산(衡山).

축융노도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간헐적으로 실소를 흘렸다.

“하, 하하, 하하하.”

한참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눈을 끔뻑이더니 말을 건넸다.

“자네, 술 좋아하지?”

이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 이야기가 나온 이상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마련이다.

술은 완벽함, 그 자체가 아니던가.

“한 잔 할 곳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축융노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산에 좋은 술을 숨겨뒀지.”

이훤이 축융노도의 배로 건너갔고, 노룡군도는 이훤의 배로 넘어왔다. 그리고 각기 왔던 곳으로 향하며 서서히 멀어졌다.

노룡군도는 단강변에 배를 대자마자 인상을 썼다.

“하아. 이런 냄새는 처음이야.”

피 냄새가 짙게 깔린 것은 물론이고, 사람의 살냄새와 내장 조각이 뒤섞인 채 산처럼 쌓여있지 않은가. 목불인견의 참상에 잠시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 때 자그마한 체구의 여아가 다가왔다.

얼굴의 반을 차지할 만큼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노룡군도시지요.”

“아.”

노룡군도는 침음을 흘렸다가 슬쩍 단강을 돌아봤다.

축융노도는 비인의 경지라 했고, 이훤은 초월경이라 칭한 이들 간에 통하는 기예가 있는 듯했다.

‘이걸 어찌 전음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가히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심어(心語)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전마라고 합니다.”

예상대로 청도대상단의 여식이다.

상인 출신답게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진중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대우받는 걸 싫어하는 이가 어디 있으랴. 그렇기에 노룡군도는 손녀를 대하듯 편한 미소를 지었다.

“형산파의 제자인 노룡군도라고 하네. 들었겠지만, 두 분은 따로 자리를 마련했네.”

전마는 빙긋 웃은 후 반대편을 가리켰다.

“이쪽은 뒤처리를 하느라 어수선하니 저쪽으로 모실 게요.”

후원은 지옥도가 펼쳐진 것처럼 난장판이었지만, 별왕루 자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했다. 이미 루주부터가 큰 돈을 받고 잠시 자리를 피했기에 빈 방으로 안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노룡군도는 그녀의 뒤를 따르려다 멈춰섰다.

남녀가 티격태격하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악마와 묘마인가.’

그는 강호의 대다수가 그러하듯 저들을 절명곡에서 살아난 생존자들의 후예로 알고 있었다.

악마는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채 투덜거렸다.

“아! 짜증난다.”

“오랜만에 마음껏 손을 썼더니 후련하기만 한데. 뭐가 문제야?”

묘마는 방금 갈아입은 것처럼 새하얀 무복을 살랑거리며 물었다.

“네 년의 태도가 문제다! 이 몸이 앞장서서 피를 뒤집어쓴 채 길을 뚫었잖아. 편하게 뒤따라오면서 손가락만 깔짝거렸으니 내게 감사를 표하란 말이야.”

제아무리 창에 강기를 휘감고, 법보와 역법보를 활용한다고 해도 전장의 한복판에 있다는 건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악마는 겉으로 보기에 악전고투를 거친 역전의 용사처럼 보였다. 반면 묘마는 후방에서 응원이나 한 사람처럼 말끔했다.

“어!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이 몸에게 감사하다고 말해보렴. 어서!”

“이게 피 맛을 보더니 제 정신이 아니네. 네 실력이 하찮아서 몸으로 뛰어야 하는 거잖아. 그럼 스스로 반성하면서 정진할 수 있는 길이나 찾아. 그렇게 답답하면 내가 바람 구멍이나 몇 개 뚫어주랴?”

험악한 대화가 마치 생사투(生死鬪)처럼 오갔다.

노룡군도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두 사람을 만류했다.

“큰일을 끝냈는데 아군끼리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악마와 묘마는 눈빛을 교환하다가 전마를 바라봤다.

“뭐야?”

“아! 축융노도께서 오셨어요. 이 분은 형산의 제자이신······.”

그 때 묘마가 전마의 말을 끊더니 파안대소했다.

그리고는 노룡군도의 어깨를 감싼 후 말을 건넸다.

“흑우야! 오랜만이다. 아직 살아 있었네? 형산파가 멸문한 이후 사라졌기에 죽은 줄 알았지. 그런데 지금껏 축융과 함께 다녔더냐?”

노룡군도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묘마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 탓에 어린 시절 흑우(黑牛)라 불리지 않았던가. 한데 묘령의 여아가 자신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을 하고 있음에도 반응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언제 어깨를 감쌌는지도 모르겠고, 팔을 떨쳐내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마치 태산 같은 족쇄가 어깨를 휘감은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이것 좀.”

악마는 그 모습에 콧방귀를 뀌었다.

“쯧쯧, 잘하는 짓이다. 축융노도의 사제라면 폐관을 핑계로 도망친 그 놈을 말하는 건가?”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일 년의 폐관수련을 끝내면 본래 같은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폐관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야. 한데 너는 몇 달 만에 다시 폐관했다던데?”

“그건 사부님께서······.”

노룡군도는 떼를 쓰듯 변명을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마치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또한 형산파의 비기인 소우주경을 익힌 상태였다. 그렇기에 불가능보다는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먼저 떠올리곤 했다.

“설마······.”

“그래, 나다. 오랜만에 봤는데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노룡군도는 손녀 뻘로 보이는 묘마에게 끌려가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반노환동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여자가 되다니······.’

그렇게 술을 마시러 떠나는 이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전마는 그를 보며 턱짓을 했다.

“생각 있으면 따라가지 그래요?”

색마는 혈사의 뒤처리를 위해 애쓰고 있는 하오문도들을 슬쩍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수하들을 두고 홀로 즐길 수는 없지.”

하나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숨기지 못했다.

전마는 탈마에게 귀띔 받은 내용을 슬쩍 흘렸다.

“대형이 좋아하실 거예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일 믿는 건 색마라고요.”

“그, 그렇지?”

색마는 하오문의 지부장을 불러 더 많은 인력을 충원하라고 기분 좋게 명령했다.

“돈은 걱정하지 마!”

전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나를 보는 건데?’

*

피 냄새가 아무리 짙어도 십리를 넘길 수 없는 법이다.

하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마치 현장에 있던 것처럼 인상을 썼다. 조금만 산만해져도 피 냄새에 머리가 어질했을 정도였다.

“비가 내려도 이 더러운 기운은 사라지지 않는군.”

소천기 제갈삭은 밤하늘을 색칠하듯 쏟아지는 비를 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그는 반쯤 허물어진 건물로 걸어가 비를 피했다. 한때 구파 중 한 곳인 형산파의 장문인이 살던 도관이었다. 하나 수십 년 전 멸문한 이후 지금은 귀기가 감돌고, 폐허로 밖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는 형산파의 전경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갈세가 또한 이처럼 되었으리라.

하나 아쉽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 중에는 제갈세가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형산파처럼 구파오가를 폐허로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직 마지막 기회가 남았음이야."

잠시 후 그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줄 상대가 나타났다.

짚단을 엮어 만든 우비를 걸쳤고, 방갓을 깊이 눌러 쓴 탓에 정체를 유츄하기 어려웠다.

하나 제갈삭이 기다리던 자였다.

“늦었군.”

사내는 방갓을 슬쩍 들었다.

방갓 아래로 드러난 하관은 길게 찢어진 입매로 인해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쪽 입꼬리가 치솟으며 조롱 섞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천지멸겁폭뢰진이라며? 고것이 폭발할 때마다 웬 놈이 외치더군.”

사내는 손을 입가에 댄 채 외쳤다.

“너희들이 십 년이 날아간다! 이렇게 다섯 번, 아니지. 수십 번을 외쳤어.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폭소를 참기 힘들었다네.”

한데 참으로 기이한 모습이다.

사내의 목소리는 웃음을 참기 힘든 것처럼 억눌렸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제갈삭은 무저갱처럼 검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사내를 응시했다.

“십만 근의 화약을 설치한 건 나지만, 그것을 은밀하게 모은 건 자네라네.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오십 년의 세월에서 자네의 지분이 더 크지.”

“이잌! 일처리를 병신 같이 해놓고도, 아직도 뻣뻣하시군! 이제 너는 정파의 공적이나 마찬가지야? 터전까지 미끼로 삼았는데 이훤은 우습게 빠져나갔지. 결국 네 놈의 천총대화만 가져다 바친 꼴이 아닌가?”

한데 그 순간 제갈삭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했다.

“그 또한 천총대화의 흐름을 따랐을 뿐이지.”

사내가 방갓을 벗어던졌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가 붉게 번들거리면서 기이한 열기를 드러냈다. 마치 제갈삭을 속마음을 염탐하듯 위아래로 몇 번이나 훑었다.

“나는 천룡이다. 천룡전의 수장이지. 그리고 너는 천룡전의 머리인 현무령일 뿐이야. 네게 묻겠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느냐?”

그도 알고, 제갈삭도 안다.

하나 천룡전의 주인임을 입 밖으로 꺼낸 건 최초였다.

제갈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내게 강림혼요술을 쓰지 마라. 내가 네게 천총대화를 전했듯 나 또한 네게 강림혼요술을 배웠다. 자! 똑같이 심득을 익혔다면 어떤 사람의 성취가 더 뛰어날까? 근골과 자질이 좋은 자, 아니면 머리가 좋은 자?”

사내는 침묵했다.

제갈삭은 사내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우리끼리의 우열은 의미가 없어. 천하? 강호? 명예? 권세? 다 네가 가져라. 나는 작금의 정파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짓밟히는 것으로 족하다. 나를 비웃고, 나를 동정하던 모든 이가 비참하게 찢겨 죽는 것으로 족하단 말이다. 그렇기에 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밀어내지 않았고, 현무가 되라는 말도 수락했다. 그리고 네 뜻을 따라 열여섯 명의 감각사도도 만들었어. 자! 모든 것이 네 뜻대로 진행되는 중이다.”

“흥! 감각사도는 죽었고, 이훤은 더 많은 심득을 차지했으며 천하는 놈을 추종한다! 그런데도 아직 천총대화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내의 외침에 제갈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암, 아니 백호령이 천공인 삼십 개를 가지고 떠났다.”

“그렇다면?”

제갈삭은 흥분한 듯한 사내를 보며 말했다.

“자네가 원하던 상황이 만들어질 걸세. 마교의 주인이 되는 거지.”

“마교의 주인이 되는 건 쉬워.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수십 년 전에 차지했을 것이다. 하나 나는 강림혼요술이 아니라 진짜 마교의 주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마교의 깃발로 천하를 덮을 것이다.”

“청룡령이 복귀하고, 백호령의 천공인이라면 천마비고의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야. 천관심결과 만매만전에 우리의 심득을 더한다면 천마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아.”

“좋아. 그렇다면 너를 위해 기꺼이 정마대전을 열어주지. 그리고 네 앞에 원하는만큼의 목을 바치마.”

제갈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마라. 천하를 피로 씻어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럴 수 있겠소?”

사내는 확답을 하듯 말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동시에 사내의 칠공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천룡이 떠나고 원래의 정신을 되찾은 사내가 부들부들 떨며 제갈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내는 살려달라고 몇 번이나 발버둥을 치다가 진흙과 함께 쓸려나갔다.

제갈삭은 고개를 들었다.

빗물이 주름 사이를 적셨고,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나 그는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향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럴 수 있겠소?”

쿠쿠쿠쿠쿠쿵-

먹구름 사이로 벼락이 몇 번이나 번뜩였다.

그리고 먹구름은 갑작스레 사방으로 흩어지며 새카만 하늘이 드러났다. 마치 제갈삭의 염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대답을 한 듯했다.

< 86, 형산(衡山).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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