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싸움이라는 단계를 벗어났다. (3) >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신마의 심득은 대자연의 기운, 그 자체였다.
즉, 난해한 도경이나 해괴망측한 주술이 아니라 좋은 뜻을 품고 꾸준히 익히기만 하면 신선이나 부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대자연을 닮아가는 이가 악인일 리 만무했다.
결국 좋은 사람은 늘고, 나쁜 사람은 줄어드니 세상을 위해서 이만한 일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축융노도는 개소리를 지껄인 셈이다.
하나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눈빛만 봐도 개인의 욕심이나 무지라고 보기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만약 이훤이 형산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타나지 않았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
이훤은 말문이 막힌 와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미 신마의 심득은 세상에 뿌려졌다.
더 이상 알리지 말라고 부탁을 하는 쪽은 축융노도가 아닌가. 그러니 결국 칼자루를 쥔 쪽은 그가 아니라 이훤이었다.
이훤은 침묵했다.
축융노도는 예상대로 부연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자네와 저들의 싸움을 보았네. 어떠하던가?”
앞은 이훤에게 한 말이지만, 뒤는 사제에게 한 말이다.
축융노도의 사제인 노룡군도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본래 형산파의 기린아였다.
형산파 내에서도 축융노도보다 노룡군도를 후계자 감으로 점찍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만큼 자질도 뛰어났고, 성정도 훌륭한 편이었다. 다만 절명곡의 추격전 당시 폐관 수련을 했기에 축융노도가 대신 나섰던 게다.
형산파의 차기 장문인감으로 내정되었을 정도이니 성정은 말할 것도 없다.
“너무 과했습니다. 사형의 방식도, 취마의 방식도요. 저것을 어찌 사람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디 미물이라고 할지언정 생을 이어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비록 형산파가 장강 이남에 터를 잡아 교류가 부족하고, 미개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말이 길어질 듯했다.
한데 그를 제지한 건 이훤이 아니라 축융노도였다.
“들었는가. 이것이 범인의 생각일세.”
노룡군도는 자신을 평범하다고 격하하는 축융노도의 말에도 인상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한 때 문파의 기대주였고,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었던 그다. 그러니 운 좋게 신마의 심득으로 고수가 된 축융노도가 마뜩찮을 수도 있다. 하나 노룡군도는 축융노도를 사형이 아닌 지고의 존재처럼 대우했다. 그렇기에 스스로 형산파의 마지막 제자라고 칭했으리라.
“그렇겠지.”
별왕루의 혈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건 괴마들 뿐이리라. 망아취자를 비롯한 무림맹의 인사들도 이 정도까지 해버릴 것이라 예상하는 건 불가능했다. 속으로는 잘했다고 칭찬했을지언정 겉으로는 표정관리가 필수였다.
“나 또한 사람이기에 악인만 골라서 보냈다고는 하나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을 게야. 하나 나도, 그대도 개의치 않았지. 이제 별왕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이라 불릴까?”
혈사, 살육, 청소, 박멸과 같은 단어가 뇌리를 스쳐갔다.
하나 흘러나온 대답은 생각과 별개였다.
“알게 뭐야.”
이훤의 말에 축융노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네. 저건 싸움이 아니지.”
“훗! 세상이 바뀌었어. 신마의 심득이 등장한 이상 누군가의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지나갔다고. 예전의 싸움 방식은 끝났으니 이제 새로운 강호의 새로운 방식의 새로운 싸움이 펼쳐질 거다.”
축융노도는 침음을 흘렸다.
“크흠,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그래서는 안 돼.”
“절명곡의 생존자라서가 아니야. 신마의 심득을 갈라 배웠기에 베푸는 배려라고. 그러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계속하려거든 네 사제에게나 해. 보니까 술을 과음하면 치매에 걸린다고 해도 믿겠는 걸?”
이훤의 조롱 섞인 한 마디에 축융노도는 한 마디로 응수했다.
“비인.”
비인(非人)이라.
“싸움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사람이 아니라니······.”
“비단 싸움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사람과 사람의 문제이기에 가장 먼저 싸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났을 뿐이지. 신마의 심득이란 결국 비인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언뜻 들으면 엄청 위험하고, 대단한 말처럼 들렸다.
하나 해석하면 결국 신마의 심득을 대성하면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질색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하나 축융노도의 고뇌는 그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나는 사람이고 싶다.”
이훤은 축융노도의 간절한 한 마디에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알게 됐지?”
이러한 화법은 이훤이 즐겨쓰는 방식이다.
뭘 아는지, 뭘 하려는지가 아니라 상대의 시작점을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축융노도 또한 백 년을 살아온 노고수였다.
게다가 무림맹과 하오문의 눈과 귀를 피해 수십 년을 숨어살지 않았던가. 이훤의 중의적 질문 정도는 단박에 꿰뚫어봤다.
하나 기꺼이 입을 열었다.
같은 고민을 할 수 있는 상대란 억만금을 주어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파의 무학은 거칠다. 자질구레하게 합을 주고받는 것보다 일격에 집중하여 돌파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스스로의 단련이지.”
일격필살이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투자한 후에야 끌어낼 수 있다. 반드시 죽인다는 필살의 묘리를 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육신과 감각을 단련하는 건 필수였으리라.
“소우주경이라는 것이 있다.”
뒤이은 축융노도의 설명에 의하면 소우주경(小宇宙經)을 대성하면 감각의 예민함이 극에 달하고, 자면서도 풀벌레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천지조화를 축소하여 인간에게 대입하니 자연과 동화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아.”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듣다 보니 소우주경이라는 건 천관심결과 천총대화, 거기에 더하여 십전진뇌공과도 관련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신마의 심득 중 씨알 같은 것이 강호에 퍼졌다가 뿌리를 내려 형산파라는 이름으로 자라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파조사 이후 누구도 대성한 적이 없다. 이 녀석도, 나도 겉핥기 식으로 익혔을 뿐이지. 한데 신마가 절명곡에서 우리, 아니 나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그 순간 소우주경의 성취가 폭발적으로 올라간 건가?”
“그렇다. 저절로 느껴지더군. 내 옆에 다섯, 그리고 절벽 위 좌우에 한 명씩. 하나 그것을 인지했을 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나 또한 그 때에는 신마의 심득에 홀려 넋이 나갔으니까.”
들을수록 신마의 심득을 폄하하는 모양새다.
하나 그로 인해 한 가지 의문이 풀렸다.
‘천룡전이 형산을 차지한 이유가 있군.’
아무래도 신마의 심득과 관련이 있는 소우주경이 원인이리라. 어쩌면 천룡전이 아니라 신마의 시작과 관련된 정보가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이훤은 축융노도와 대화를 할수록 형산을 멀리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형산파의 모든 무학을 익혔고, 펼쳤고, 버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건이 고작 눈 한 번 깜빡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대자연의 흐름이 나를 관통하는 순간 의도하지 않게 모든 것을 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잠시 말을 끊은 축융노도가 한 숨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한낱 치기나, 광기, 복수나 원한, 대의와 명분, 안위와 같이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다름을 말이다.”
“그래서 숨었군?”
“그래, 우리끼리의 맹약은 의미가 없을 것임을 느꼈거든.”
“한데 나타났잖아.”
“너 때문이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 거대하게 판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야. 가장자리에 숨어 있는 내가 판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지.”
이훤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거지?”
축융노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노룡군도가 자연스럽게 노를 반대로 젓기 시작했다. 맞닿았던 뱃머리가 떨어지는 가운데 축융노도의 담담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바라는 건 자연스레 삶이 다하여 죽는 그 날까지 신마의 심득을 펼치지 않는 것이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배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어둠의 장막을 비집고 그 너머로 사라진 듯하더니 이내 반대편에서 장막을 걷어내고 내리꽂혔다.
“갈 때 가더라도!”
천공혈륜겁이 십일 성에 이르렀다.
무공의 근간을 이루는 혈륜은 숨을 쉬든, 잠을 자든 저절로 성장했다. 그러니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비가 온 뒤에는 하늘이 개듯 시간이 흐르면 언제고 대성에 이를 터였다.
그리고 축융노도의 심득을 더한다면 그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흐르리라.
“신마의 심득은 내어놓고 가라!”
이훤이 일갈과 함께 무형검을 흩뿌렸다.
그 순간 노룡군도의 노에 자색의 기운이 얽혀들더니 무형검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펼친 신위만 봐도 무림맹주보다 아래는 아니었다.
엄청난 고수의 등장.
하나 이훤과 축융노도의 논리에 의하자면 인간의 싸움 방식이 아닌가. 비인(비인)의 방식이라면 노룡군도의 목을 자르는 건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손쉬웠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당!
노룡군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 기척도 없이, 눈으로 보이는 것도 없이 무언가가 끊임없이 꽂혀든다. 그나마 축융노도의 도움으로 소우주경의 수준이 일취월장했기에 버틸 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의 넓은 부분이 점차 아래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봐주는 건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손아귀이 힘이 풀렸다.
이훤은 가볍게 노를 튕겨내고, 잠깐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보이는 노룡군도를 뒤로 했다.
“오라!”
축융노도의 눈동자가 자색으로 빛났다.
마치 일출처럼 형형한 눈빛에 괴마라고 해도 잠시마나 움츠려들 정도였다.
쇄애애애애애애애액!
아예 대놓고 유형화된 무형진기가 거대한 검의 형태로 꽂혀들었다. 축융노도가 말했던 일격필살이라는 것을 선보이듯 강맹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한데 검 끝이 축융노도의 코끝까지 이르는 순간 놀라운 일이 연발했다.
“······.”
축융노도는 언제 생사의 결의를 다졌냐는 듯 눈을 감았다. 하나 검 끝이 코끝에 닿는 순간 기적처럼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하아.”
축융노도는 눈을 뜨자마자 한 숨을 흘렸다.
그리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훤을 보며 한 번 더 장탄식을 내뱉었다. 두 사람 모두 비인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웠다. 그러니 강기든 무형검이든 보내고, 거둬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당했군.”
축융노도는 기력이 다한 사람처럼 뱃머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만약 이훤이 마지막에 이르러 무형검을 멈췄다면 축융노도는 스스로 몸을 던졌으리라. 하나 무형검은 처음부터 축융노도의 코 끝에 닿을 생각으로 펼쳐진 것이었다.
즉 이훤은 축융노도의 속내를 꿰뚫고 있던 게다.
“이것도 신마의 심득인가?”
“심득은 개뿔, 너를 제 부모처럼 떠받드는 사제가 스스로 길을 열었잖아. 그리고 네가 익힌 형산파의 소우주경은 무당의 천관심결과 관련이 있으니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당신!”
이훤은 축융노도의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이 지긋지긋한 악연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게 너무나 눈에 보여.”
축융노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뱃머리에 숨겨놓은 술병을 꺼냈다.
한참동안 술을 들이키더니 탄식하며 말을 건넸다.
“하아, 그렇다. 이 개같이 지긋지긋한 악연에서 벗어나고 싶다. 고수? 명사? 선인?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바라는 건 그것이 아닌데 말이야.”
“신마 때문인가?
이훤의 물음에 축융노도는 아예 뱃전에 기대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모든 걸 보고 있어.”
“우린 모두 바둑판 위의 돌이라고 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네.”
축융노도는 애병마저 내팽개친 채 단강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칼처럼 예리하던 자가 한순간 버드나무처럼 살랑거린다.
“신마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아니야. 그는 모든 걸 보고 있다네.”
잠시 후 멍하니 단강을 보고 있던 축융노도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훤의 전음을 되새기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 지금 한 말이 사실인가? 아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하나 이훤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다.
“어때? 이것까지 신마가 알고 있을 것 같아?”
< 85, 싸움이라는 단계를 벗어났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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