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싸움이라는 단계를 벗어났다. (2) >
전마는 이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나 그녀로서는 어둠을 뚫고 단강을 살필 재주가 없었다.
“가시게요?”
“아니.”
의외의 대답에 오히려 더 놀라야 했다.
그녀가 알던 이훤이라면 적을 발견하는 순간 만사 제쳐두고 달려들지 않았던가.
“이건 싸움이 아니야.”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이건 청소다.”
이훤은 전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설명을 이어갔다.
“자기가 쓰레기를 잔뜩 모아왔으니 나보고 치워달라는 거지.”
“그런 얕은 수에 당해줄 대형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안 당해주고 있잖아.”
전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랜만에 이훤이나 취선관주가 아니라 취마의 횡설수설 화법이 등장한 듯했다. 그러던 중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설마 그래서 가만히 계시는 거예요?”
상대의 꿍꿍이에 당하고 싶지 않아서 악마와 묘마만 싸움터로 내몰았다는 의미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싸움이 아니라 봉사활동이리라.
청소는 언제나 착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어쨌든 저것들이 다 악인이라는 걸 너는 몰랐잖아. 다른 녀석들이 나한테 홀려서 마구 죽이는 것이 아니야. 저 녀석들도 다 알아. 그러니까 거리낌 없이 죽여 버리는 거야. 살아 있어봤자 쓸모가 없으니까.”
전마는 괴인에 대한 상념을 접고 시무룩해졌다.
“죄송해요.”
“잘 들어둬. 이 또한 무형진기와 강림혼요술, 그리고 천관심결과 연계된 심득이다. 천룡전의 하수인을 감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쪼개기와 같아. 두 개의 선택지를 두고 하나를 선택하여 양파처럼 휘감긴 적의 정체를 파헤치는 거지. 저들의 성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면 너 또한 첫 번째 껍질을 벗긴 것이나 다름없다.”
전마는 한 숨을 연발했다.
“잘 모르겠어요.”
“제아무리 신마의 심득이라고 해도 너처럼 아무 준비 없던 아이가 한 번에 깨우치면 나라고 해도 섭섭하지. 당연한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라.”
전마는 감사함에 미소를 지었다.
하나 속으로는 시산혈해가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공부를 하는 이유가 마냥 순수하게 와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괴인에게 자신의 여유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공부를 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대형이 지기 싫을 만큼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인가?’
전마는 그 정도의 무인을 떠올려봤다.
하나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그 때 요인을 암살하고 다니던 탈마가 전마의 곁에 나타났다. 전마가 화들짝 놀라며 횃불을 떨어트렸을 정도였다. 하나 탈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두 번째 기습을 행한 놈들은 앵속이 아니에요. 조금 흥분한 것 같기는 한데 정상입니다.”
실소가 절로 나왔다.
첫 번째 기습을 한 복면인들이야 앵속에 취해 사리분별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나 두 번째 기습을 한 자들은 명백하게 신마의 심득을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우스웠다.
이제는 거치적거리지도 않는 복면인들을 끝없이 밀어 넣다보면 괴마들이 지칠 것이라고 여겼나 보다. 그래서 기세 좋게 달려들다가 묘마와 악마에게 풍비박산이 나는 중이다.
“그런데 세 번째 놈들이 움직이지 않아요.”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겁 먹은 거야?”
“초절정 고수에 방파의 주인들까지 섞인 집단이에요. 눈앞에서 수천 명이 썰려나가니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요.”
“쯧.”
“어쩔까요?”
이훤은 탈마에게 대답하는 대신 묘마와 악마를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언제까지 놀고 있을 거야?”
그 순간 적이 쓰러지는 속도가 다섯 배 이상 늘어났다.
악마가 법보를 활용해 십전진뇌공을 펼칠 때마다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꽂힌 것처럼 적들은 부르르 떨다가 나가떨어졌다. 묘마는 아예 있어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휘두르던 양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적진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풀은 남았을지언정 사람은 남지 않았다.
“세 번째 놈들이 튄단다. 쫓아라!”
이훤의 외침에 묘마와 악마가 튕기듯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탈마는 그 모습에 눈을 끔뻑이다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마치 사냥개를 부리는 듯한?”
전마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탈마의 경박한 성정을 생각하면 악마와 묘마가 돌아왔을 때 분명 이걸 가지고 놀릴 터였다. 그리고 자신의 말까지 더해서 깔깔거리겠지. 탈마와 달리 전마는 아직 다른 괴마들을 편히 대할 수 없었다.
산동악가와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가 아닌가.
하나 그보다 더 한 건 반노환동과 빙의처럼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이적을 이뤄낸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이훤이 몸을 일으켰다.
“술 가져오시게요?”
“볼 일 보러 가는 거지.”
탈마는 전마를 향해 물었다.
“너는 어쩔 거야? 대형을 따라갈 거야?”
전마는 가고 싶었지만, 지금도 적들이 인질로 노릴 만큼 허약하지 않던가. 하여 고개를 내젓고, 탈마와 함께 뒤처리를 하기로 했다.
“좋아! 색마가 곧 하오문도들을 이끌고 올 거야. 시체나 치우자.”
“그런데 색마와는 언제 연통을 주고받는 거예요?”
전마는 갑작스레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형은 질색을 하지만, 놈은 나보다 대형을 더 꾀고 있어. 연통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놈이 알아서 나타나는 거야,”
“다 들린다. 이 새끼야!”
*
이훤은 느긋하게 단강으로 향했다.
강변에 이르자 나룻배가 보였다.
“섬세한 작자네.”
이훤은 피식 웃은 후 나룻배에 올랐다.
뱃사공도 없고, 노도 없다.
하나 나룻배는 누가 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쭉쭉 나아갔다.
반면 상대는 선두에 섰고, 뒤에서 노를 젓는 노인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범상치 않았다. 의문인이 이 모든 일을 꾸몄고, 그로 인해 수천 명이 죽었다. 하나 노를 젓는 노인은 느긋하기만 했다. 마치 노를 젓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천천히 움직였다.
수십 장을 나아간 배가 느릿하게 멈췄다.
이훤은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안력을 돋워서 보는 것과 주름까지 헤아리며 마주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팔 척에 이르는 장대 같은 체구.
붉게 충혈 된 눈동자.
반면 머리카락은 누군가 빗어 준 것처럼 단정했다.
옷차림은 무복이나 도복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만큼 낡았다. 그러나 품에 안고 있는 검은 일견하기에도 고색창연하여 명가의 보검처럼 보였다.
그렇게 결론이 쉽게 도출됐다.
“축융노도.”
“무례를 논하지는 않겠다.”
꽤 깐깐한 태도였지만, 부인하지 않는다.
한데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축융노도(祝融老道)가 검을 품고 있던 손을 뒤로 뻗으니 노인이 술병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능숙하게 마개를 뽑은 후 이훤에게 던졌다.
술꾼은 언제, 어디서라도 환영이다.
이훤은 술병을 기울였다.
알싸한 향과 더불어 찌릿한 기운이 식도를 자극했다.
독(毒)
하나 입안에 머금은 것을 뱉어내기에는 술맛이 제법이다.
이제는 술,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한 이훤에게 신선함을 주는 맛이었다.
“예의 바른 모습이지만, 딱히 칭찬해주지는 않겠어.”
오는 말이 곱지 않은 만큼 가는 말도 좋지 않다.
하지만 축융노도는 술을 마시러 나온 사람처럼 술병을 기울였다. 그 광경이 불안했던 것일까? 노를 젓던 노인이 말을 이었다.
“사형은 해독제를 먹지 않았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술맛만 좋으면 문제될 것이 없지.”
“괜찮은가?”
“나쁘지 않았어.”
축융노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 앉았다.
두 척의 배가 맞닿은 상태였다.
이훤 역시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자, 축융노도가 말을 건넸다.
“오래 전 칠채오두사를 담가 만든 술이 있었다. 너무 좋았기에 나도 만들었지. 그 맛이 나지 않더라. 해서 독니를 남긴 채 다시 담갔다. 그 맛이 나더군. 해서 점차 독의 비중을 늘렸다. 그리고 칠채오두사가 술에 잠겨 죽었을 때 가장 향이 좋음을 알게 되었다.”
“기억해두지.”
두 사람은 오늘의 혈사에 관해서 논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마의 심득을 논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지기처럼 핵심 없는 화두를 서로 던질 뿐이다.
결국 노를 젓던 노인이 나섰다.
“나는 형산파의 마지막 제자인 노룡군도입니다.”
흰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스스로 허리를 굽혀 경어를 사용했다. 이훤도 축융노도는 개의치 않았다. 노룡군도(魯龍窘道)는 찻물로 입을 헹군 후 말을 덧붙였다.
“형산으로 가는 듯한데 맞소이까?”
이훤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지금 형산은 정파의 세상이 아니외다. 형산파가 멸문한 이후 온갖 사마외도가 몰려들었고, 흑점과 낭시가 판을 칠 만큼 변질됐소.”
장강 이남은 강북과 달리 사마외도의 발호가 연이었다.
아닌 말로 별왕루의 후원을 야습한 수천 명의 무인 중 대다수가 사마외도가 아니던가. 무림맹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위치이니 남하할수록 흉악한 자들이 즐비할 터였다.
“그런 거 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
이훤의 말에 노룡군도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덧붙이려 했다. 하나 축융노도가 손을 내저어 말을 끊었고, 이내 담담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생일선.”
진생일선(盡生一線)이라는 두 글자만으로 충분했다.
신마의 심득이다.
다만 선이 만들어지면, 생이 다한다는 속뜻이 의미심장했다.
“만매만전, 십전진뇌공, 무형진기, 천관심결, 강림혼요술, 천총대화.”
이훤의 대꾸에 축융노도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예상치 못했던 한 마디를 건넸다.
“하나가 부족하군.”
이건 정말 예상할 수 없었다.
“복기한 건가?”
축융노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게 아니면 알 수 없지.’
이훤은 회귀를 통해 수많은 진실을 알게 됐고, 망아취자의 고백을 통해 비사를 접했다. 그렇기에 결말을 알고 원인을 역추적할 수 있었다. 아마 축융노도도 그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훤의 무공을 살폈으리라.
‘하긴 이제 와서 만매만전만으로 이렇게 됐다고 하기도 우습게 됐지.’
아닌 말로 절명곡의 생존자들과 몇몇 초월경의 고수들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훤의 급격한 성장과 압도적인 무위를 설명할 수 없었다.
무언가 하나를 더 익혔다고 예상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망아취자는 이훤을 만나면서 상단전을 논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짐작일지언정 망아취자는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한데 잠시 후 이어진 축융노도의 말에는 한순간 평정심을 잃어야 했다.
“그가 말할 때 주변에 느껴진 기척이 여덟이었다. 탁한 기운과 맹렬한 기운이 절명곡 위쪽에서 퍼져 나왔지. 탁한 기운은 사뭇 마기와 같았으니 강림혼요술일 테고, 그대가 맹렬한 기운의 후계자인가?”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검후와 망아취자, 그리고 묘마와 악마까지 한목소리로 주장하지 않았던가. 가장 강한 건 남궁세가의 남궁천운이었고,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 망아취자였으며 소천기 제갈삭과 무쇄검 축융노도의 무위는 한참 아래였다고 말이다. 한데 축융노도는 숨어 있던 팔황무극존의 기척까지 알아차렸을 만큼 고수였다.
“대답하기 싫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섣불리 입을 열 때가 아니었다.
회귀 이후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니 상대의 반응에 따라 빠르게 반응하는 것밖에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축융노도는 적의를 품은 것도 아니고, 이득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네를 찾아오는 길에 거치적거리는 이들이 많아 대신 정리를 부탁했네. 그리고 자네가 기꺼이 그 일을 해줬으니 충고를 하나 할까 하네.”
“들어 보지.”
축융노도는 한참동안 침음을 흘린 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신마의 심득을 퍼트리지 마시게.”
개인의 욕심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무슨 뜻이지?”
“신마의 심득이 널리 퍼질수록 가장 좋아할 사람은······.”
이훤은 축융노도가 말끝을 흐리는 순간 답을 들은 듯했다.
아니나다를까 뒷말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신마일세.”
< 85, 싸움이라는 단계를 벗어났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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