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싸움이라는 단계를 벗어났다. >
85, 싸움이라는 단계를 벗어났다.
이훤은 득의양양했다.
“어때? 이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우리를 알게 됐다!”
그 말 대로였다.
무림맹의 지부가 없어도, 정사지간의 방파가 득세하는 지역이라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끓었다. 오랜만에 등장한 무림공적을 구경하려는 이들이 절반이라면 신마의 심득을 노리는 자들이 절반이다. 다만 힘으로 이겨낼 수 없으니 기회만 엿볼 뿐이다. 그러니 괴마의 행적을 천하에 널리 알림으로서 천룡전과 축융노도를 불러들일 수 있게 된 셈이다.
계획은 성공했다.
다만 강제로 계획에 동참해야 한 괴마들의 얼굴은 썩어문드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특히 묘마는 오늘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뭐라고 좀 해 봐?]
[대형이 저렇게 즐거워하잖아.]
한데 악마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인지 관심을 즐기는 듯했다. 탈마는 오히려 주도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반겼다.
“창피하기는 한데 나쁘지 않아! 평소에 이러고 다니다가 도둑질을 할 때만 갈아입는 거죠. 후훗, 그러면 더 의심을 사지 않고, 원하는 걸 쓱싹할 수 있는······.”
전마는 애초에 선택권이 없다.
“이러다 시집은 어찌 갈는지······.”
“그보다 남자를 먼저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이런 사람들하고 다니는데 누가 접근이나 하겠어?”
“망하려면 너 혼자 망해라. 하긴 너는 시집을 가야 하냐? 장가를 가야 하냐?”
괴마들이 떠드는 사이 이훤은 이미 취마의 본분을 지키고 있었다. 별왕루가 자랑하는 단강구의 풍광을 만끽하면서 술을 즐겼다.
“슬슬 기운이 무르익었어.”
전마가 옆에 앉아 수저를 챙기면서 물었다.
“그런데 루주는 정말 오늘 밤에 기습이 있을 거라고 믿는 건가요?”
그녀는 대청을 가득 채운 항아리를 보며 질린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별왕루의 루주인 연소방은 이훤과 탈마의 말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만약 적이 오지 않으면 저들끼리라도 칼부림을 할 듯보였으리라. 그렇기에 백여 동이에 가까운 술을 들여보낸 후 후원으로의 출입을 통재했다.
“그건 알 바 아니지.”
“네?”
“경고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도리를 다한 거야. 내가 비록 공적이지만, 인의예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 않냐?”
전마는 이훤의 강렬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그 때 서로 핏대를 세우던 묘마와 악마가 갑작스레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탈마는 대뜸 처마를 잡고 뛰어오르더니 지붕에 올랐다.
“느껴지냐?”
이훤의 물음에 전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신마는 지난 행적으로 인해 공적이 되었고, 작금에 이르러서도 정사지간 취급을 받아. 하지만 그가 남긴 무공은 정사마로 분류할 수 없는 상승의 절예야. 강호의 상식과 법리를 벗어나지.”
“네, 대자연과 호흡하는 무공이라고 배웠어요.”
전마는 공적으로 몰린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돌아가면서 가르침을 청했다. 괴마들은 백지 상태나 다름없는 전마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심득을 갈고 닦았다. 그 덕에 전마의 무공은 급성장 했지만, 여전히 괴마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자연은 곧 이 세상이다. 결국 신마의 무공은 대자연에 동화되는 과정인 거야. 얘들아! 우리가 점심 먹을 때 주변에 얼마나 있더냐?”
“이천 명은 훌쩍 넘겼을 걸요.”
“무슨 소리야? 이천오백은 그냥 넘겼지.”
이훤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삼천 명이 넘는다. 삼천백 명 정도였지.”
전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이요?”
“신마의 무공은 우리가 아는 무공이 아니야. 내가 원하면 저들의 호흡이 느껴지고,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순간 숫자를 세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악마와 묘마는 다른 의미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형의 성취가 저 정도였나?’
그럼에도 묘마는 악마를 보며 우월감이 깃든 눈빛을 흘렸다. 두 사람 모두 틀렸지만, 근사치는 그녀가 아니던가. 악마는 그 눈빛을 철저하게 모른 척 했다.
“한데 해가 질 무렵 그 숫자가 이천으로 줄었다. 그리고 우리가 별왕루에 들어왔을 즈음 삼백이 더 줄었어. 절반 이상이 멀어졌다는 건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함이겠지.”
“그게 오늘 밤 우리를 기습하려는 전조인가요?”
이훤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밤새 술이나 마시는 거고.”
하나 전마는 이훤의 설명을 듣고 나니 혈사는 기정사실처럼 생각됐다. 아닌 말로 악마는 벌써부터 별왕루의 별채 주변을 돌며 법보와 역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묘마는 등을 보인 채 무언가를 읊조렸다.
‘적을 상대하기 위해 무형진기를 가다듬으시는 건가?’
하나 잠시 후 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단장을 고쳤는지 이른 아침처럼 화사했다.
“준비 끝!”
“······.”
“왜? 뭐?”
전마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요. 너무 고우셔서.”
이훤이 비운 술병이 열을 넘겼을 무렵 탈마가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그가 자리를 뜬 것조차 알지 못했던 전마가 딸꾹질을 했다.
“어때?”
“오늘 제대로 오겠는데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탈마는 이훤의 명령이 없더라도 이미 적을 은밀하게 따라가 상황을 지켜본 상태였다.
“하나가 아니에요. 무리가 셋 정도 되는데요. 천 단위가 있어요.”
이훤은 침음을 내뱉었다.
색마가 있었다면 탈마의 설명만 듣고도 적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으리라. 하나 그가 없다고 해서 아쉬워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누가 오든 철저하게 뭉개버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한데 탈마가 물어온 정보는 계속됐다.
“그런데 시간이 달라요. 야습의 시간이 반 각 단위였고, 규모가 작을수록 뒤로 밀렸어요.”
이훤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예기치 못하게 값비싼 술을 보았을 때나 보일 법한 표정이 아닌가.
“뒤에 뭔가 있구나.”
탈마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이거 잘하면 별채 가지고 안 되겠는데요.”
이훤은 잠시 히죽거리더니 전마를 향해 바라봤다.
“네?”
*
단강은 흐르는 물과 고인 물이 반씩 이뤄졌고, 주변의 지형으로 인해 안개가 잦았다. 그리고 오늘 밤 역시 안개가 짙게 깔린 탓에 시계가 불확실했다. 그렇기에 단강을 오가는 이들은 별왕루의 불빛으로 방향을 짐작했을 정도였다.
하나 오늘은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일년내내 문전성시를 이루던 별왕루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어둑했다. 오직 별채에서만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올 뿐이다.
“하아. 딱 좋은 시간이다.”
이훤은 빈 병을 내려놓으며 읊조렸다.
그 순간 누군가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신마의 심득을 가져오자!”
동시에 복면을 쓴 이들이 개미떼처럼 담을 넘었다.
미친 놈들이 분명했다.
어차피 어떻게 오든 달라질 것은 없지만, 굳이 저렇게 소리를 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진짜 사람의 마음이란 참 신기해.”
악마의 말에 묘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구덩이인 줄 알면서도 보석을 꺼내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지는 게 사람이지.”
탈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속을 응시했다.
“저 새끼들, 눈이 돌아갔는데?”
한순간 잠력단과 같은 독약이 뇌리를 스쳤다.
아닌 말로 그런 게 아니라면 절정에도 미치지 못한 채 힘으로 검을 내지르는 자들이 어찌 괴마들을 공격하려 했겠는가.
“앵속이에요.”
전마는 모든 걸 사고, 팔아 본 경험에 의거하여 외쳤다.
앵속은 마비산이나 금창약의 원료이며 심신을 미약하게 만들고, 중독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마약이었다. 하여 거래가 금지됐고, 정파 내에서 식용으로 사용했다가는 공적으로 몰릴 터였다.
하지만 잠력단과 같은 독약보다는 구하기 쉬웠다.
“검은 소든, 흰 소든 무슨 상관이야?”
이훤의 말에 악마가 히죽 웃더니 창을 들어올렸다.
“그렇죠. 맛만 좋으면 되지!”
그리고는 진각을 밟은 채 창을 내질렀다.
그가 별채에서 찾아낸 법보 중 지기(地氣), 즉 땅의 기운이 용솟음치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창을 내지르는 평범한 한 수임에도 돌개바람이 일더니 한순간 시퍼런 뇌기가 전방으로 벼락처럼 뻗어나갔다.
그그그그그그그그극!
수십 명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나자빠졌다.
묘마가 그에 질세라 화려한 춤사위와 함께 양 손을 흔드니 손끝이 닿는 곳마다 시신이 늘어났다.
“으아악!”
하나 앵속에 중독된 이들은 옆에서 비명이 울리고, 피가 낭자함에도 기세를 잃지 않고 달려들었다.
“신마의 심득!”
“고수가 될 수 있어!”
적들이 쓴 복면은 이미 침으로 인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하나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았다.
광인이 된 자들 사이에서도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모용홍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강남에서도 귀주 일대를 장악한 귀독방의 무인이다.
귀독방은 암상으로 시작하여 밀염과 앵속을 비롯한 물건을 거래하는 자들이다. 오늘을 위해 창고에 쌓아놓았던 앵속을 모두 거덜 냈으니 그 대가로 신마의 심득을 얻을 요량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이미 괴마들은 인외지경이나 천외천으로 분류된 상태였다.
한 마디로 자연재해와 다를 바가 없으니 저들을 노릴 수 있는 건 무림맹이나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들 뿐이다.
하나 모용홍은 괴마 중 가장 약한, 애초에 무인이 아니었던 전마를 노렸다. 그녀만 인질로 잡을 수 있다면 협박이나 협상을 통해 목적을 이룰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괴마끼리는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했으렷다.’
악마와 묘마가 들었다면 개소리라고 코웃음을 쳤으리라. 하나 색마의 정보 조작으로 인해 괴마의 우애는 고금에 유례가 없을 만큼 끈끈한 것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저기 있군!’
모용홍의 입꼬리가 복면 안에서 치솟았다.
전마는 괴마들을 믿는 듯 전장의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지 않은가. 소문대로 무인으로서의 값어치는 없다시피 한 듯했다.
‘하나 인질로는 네 년만한 것이 없지!’
한데 그 순간 시야에서 전마가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앞을 막은 게다.
상대는 얼굴 전체가 웃는 것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잘 가.”
그 말과 함께 가슴팍이 따끔했다.
모용홍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그 다음 광경은 모용홍이 아니라 귀독방주에게서 계속됐다. 그는 믿어의심치 않던 모용홍이 달리던 도중 엎어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도.”
누군가의 속삭임이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보다 앞서 허리가 따끔거렸다.
그 순간 온 몸의 감각이 사라졌고, 달리던 기세 그대로 나뒹굴었다. 방주는 그제야 상대의 얼굴과 흉기를 확인하고, 입을 벌렸다.
“못!”
하나 앵속에 중독된 복면인들은 거치적거리는 걸 피해갈 만큼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귀독방주는 탈마를 향해 뭐라고 할 사이 없이 수십 명에게 짓밟힌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 미친 놈이 어디 있지?”
탈마는 미간을 노리고 꽂혀드는 창을 피해 물러섰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어둠속으로 녹아드는 듯했고, 목표를 잃은 광인은 희번덕거리는 눈알을 마구 굴리더니 다시 전마를 향해 달려갔다.
“이건······.”
별원의 유일한 빛은 횃불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그 횃불을 들고 있는 전마가 침음을 흘렸다.
“왜?”
이훤이 새로 개봉한 술병을 기울이며 묻자, 전마는 한 숨과 함께 대꾸했다.
“하아, 이미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났네요.”
그녀가 아는 싸움과 강호인이 아는 싸움은 비슷했다.
하물며 명가의 후예나 고명한 영웅의 싸움도 그러할 터였다.
하나 괴마들의 싸움은 달랐다.
아니, 이훤의 말처럼 신마의 심득은 애초에 싸움이라는 현상 자체를 뒤바꾼 듯했다.
“재밌어.”
전마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이훤을 바라봤다.
제아무리 자신들을 노리는 적이라고 해도 이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녀가 괴마의 길을 간다고 해도 수백 명의 죽음을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걸 감당하기란 불가능했다.
“하나 같이 기혈이 뒤틀리고, 왜곡된 놈들만 모아놨네.”
“다 나쁜 놈들이라고요?”
“응,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디 가서 좋은 놈 소리는 못 들어봤을 거다. 일부러 이런 놈들만 골라 보낸 놈이······.”
이훤은 단강구 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저기 있네.”
< 85, 싸움이라는 단계를 벗어났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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