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08화 (208/226)

< 84, 나는 무림공적이다. (2) >

*

매순간이 새로웠다.

“공적이라는 거 사실 좋은 건지 모르겠어.”

어찌 된 일인지 악마의 말에 묘마가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야.”

전마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혀를 찼다.

“공적이 되기 전과 후의 차이가 없잖아요.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이거 원래부터 하던 일이잖아요.”

그래서였다.

압도적인 강함이 부여된 이상 섣불리 공적 운운하면서 달려드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닌 말로 개죽음당하고 싶은 자가 어디 있으랴.

그렇기에 이훤과 괴마들은 나타나고 싶을 때마다 나타났고, 사라지고 싶을 때마다 사라졌다. 색마가 하오문의 정보를 정교하게 조작하여 흩뿌리니 강호인들은 괴마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셈이다.

“괴마다! 괴마야!”

그들이 저자에 등장하는 순간 객잔과 주루, 다루를 비롯한 온갖 장소에서 무인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한순간 구름같이 몰려들어 괴마들을 포위했다. 하나 십 장 정도 거리를 두고 대치할 뿐 다가서지 않았다. 어찌보면 대치 상황도 아니었다.

“저기 괜찮아 보이는데?”

“네, 색마도에서도 홍점 1개를 줬네요.”

괴마들이 움직이자, 마치 거대한 숲이 움직이듯 군중도 움직였다. 그리고 괴마들이 식사와 술을 즐기는 동안 멀뚱히 서서 지켜볼 따름이다. 하나 이들은 언제든지 구경꾼에서 살수로 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슬슬 올 때 되지 않았어?”

“느려. 색마에게 말해서 정보를 더 많이 퍼트리라고 해야겠어. 하루에 서너 놈 상대하는 거면 식후 운동도 안 된다고.”

아니나다를까 괴마들이 주루를 나서자,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장창을 늘어트린 채 막아섰다.

“어때?”

“쯧, 꼴을 보아하니 2번이로군.”

“저는 3번이요.”

지금까지 이훤과 괴마들에게 덤빈 자들의 상황은 대동소이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네 가지 정도의 상황으로 정리될 터였다.

1번은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하는 자들이다.

쉭쉭쉭쉭!

물론 어둠 속에서 대가리를 내미는 순간 무형검이 목이 잘렸다.

2번은 비무라도 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나오는 자들이다.

자신의 사문이 어디고, 무슨 무공을 익혔으며, 어떤 명분으로 이 자리에 섰는지 장황하게 떠들었다. 물론 끝까지 들어줄 괴마들이 아니었고, 대부분 사지 중 어딘가가 잘리거나 베인 채 도주했다.

3번은 편 가르기를 하는 자들이다.

이훤과 괴마들의 악행을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방관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려 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합공을 통해 목적을 이루려고 애썼다. 하나 지금껏 누구도 동조하여 괴마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자라면 오늘 처음 본 자에게 등을 맡길 리가 없지 않은가.

괴마들은 네 번째 유형을 가장 반겼다.

4번은 대규모로 나타나 집단 공격을 펼치는 자들이다.

논공행상은 이후로 미루고, 이름 있는 자들끼리 힘을 합친 게다. 그렇기에 괴마들이 그나마 날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강호 동도께 고하겠소. 이 양 모는 감숙성 기련산에서 사십 년 간 홀로 수양한 후 강호에 발을 들였소이다. 한데 정파의 세상으로 안정된 강호가 어찌 이리 소란스럽단 말인가? 사마외도를 징치하여 변경으로 몰아낸 강호의 선배들이 땅을 치고 후회할...”

그 순간 악마의 창이 벼락처럼 꽂혀들었다.

“흡!”

노인은 가볍게 상체를 비틀며 자신의 창으로 악마의 창을 올려쳤다. 악마는 아예 상대의 창을 쪼갤 생각에 미리 준비한 법보를 활용하려 했다.

[야! 힘 조절 잘 해. 한 방에 보내면 당분간 할 일이 없어진다.]

하나 묘마의 전음으로 인해 서너 수를 어울려줬다.

그리고 뇌기를 번뜩이며 상대의 창을 쪼개버렸다.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대나무를 쪼개듯 반으로 갈라 버린 것이다.

“쯧.”

묘마는 기세등등하게 돌아오는 악마를 보며 혀를 찼다.

“뭐?”

“불필요하게 창을 왜 쪼개는 건데? 그냥 부러트리지.”

“하찮은 자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너도 배 타고 싶으면 어느 정도 수준은 보여줘야 할 걸?”

“나는 분풀이도 하고, 태가 나지 않도록 잘 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한 묘마 역시 저녁나절 접근한 적들이 등장하기도 전에 무형검으로 다리를 날려버렸다.

“내가 냄새에 조금 민감하잖아요. 그런데 저것들은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서······.”

하나 이훤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틀 내내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크흠.”

헛기침을 연발하고, 술도 싸구려만 찾아 마셨다.

괴마들이라고 해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포위망은 십 장에서 이십 장으로 늘어났다.

‘지금 나섰다가는······.’

‘전력으로 쳐 맞을 것 같은데?’

이훤의 심기를 신경 쓰는 건 비단 괴마뿐이 아닐 터였다. 야습을 계획하던 몇몇이 이런저런 핑계로 거사 날짜를 미뤘다. 그 결과 장강을 따라 유람을 한다는 묘마의 소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냥 가.”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 묘마도 입술만 삐죽거릴 뿐 뻗댈 수 없었다. 그렇게 장강을 건너 강남에 이르렀으나, 이훤의 표정은 점차 굳어갔다.

마치 중차대한 실수를 깨달은 사람처럼 말이다.

“안 되겠어.”

괴마들은 멈칫했다.

각기 천룡전과 한마, 또는 술에 대한 추측을 하더니 종극에 이르러서는 전마를 바라봤다.

[조리 있고, 생각이 깊은 네가 물어 봐라.]

[우리 중에서는 네가 말을 제일 잘하잖아.]

[어리니까 한 대라도 덜 때리겠지.]

전마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저 귀찮기 때문에 떠넘기는 것을 어찌 모르랴.

하지만 여전히 괴마 중에서 가장 약한 그녀로서는 이렇게라도 존재 의의를 찾아야 했다.

“대형,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이훤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부족해.”

“네?”

“관심도가 부족해.”

전마를 비롯한 괴마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한데 탈마만이 이훤의 속내를 짐작한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면 고금을 통틀어 가장 화려하게 탄생한 공적일 텐데 너무 조용하기는 하네요.”

전마는 허탈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장강을 기점으로 강북과 강남은 본래 다른 세상처럼 여겨질 만큼 교류가 부족했다. 게다가 장강 이북에는 온갖 문화와 물류를 비롯해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그러니 강남에 들어서면 강북보다 관심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녀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알게 모르게 뒤따르는 이들의 숫자는 일견하기에도 수백 명을 훌쩍 넘길 듯했다.

‘이렇게 많은데 관심이 부족하다니.’

이훤은 주변을 살피다가 포목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창평포는 질 좋은 비단과 솜씨 좋은 바느질로······.”

포목점의 주인은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들어서니 일단 경계를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특히 선두에 선 청년은 화풀이라도 하러 온 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나를 아는가.”

이훤의 물음에 주인은 눈을 끔뻑였다.

“글쎄요. 저희 가게에서는 무복을 팔지 않아서 예전에 오신 손님 같지는 않고······.”

“몰라?”

흉흉한 한 마디에 넙죽 엎드릴 수밖에.

주인은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손을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노안이 왔는지······.”

“나는 공적이다!”

“네?”

“공적 몰라? 무림공적! 무림맹에서 잡아다 죽이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그 무림공적이라고.”

이훤의 외침에 주인은 점혈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쟤도, 쟤도, 쟤도, 쟤······. 아니, 탈마 이 새끼는 그 사이에 또 어디를 간 거야? 도둑질을 해도 분위기 파악을 하면서 해야지!”

그는 콧김을 뿜으며 의제들에게 말했다.

“봤지? 우리의 인지도가 고작 이 정도다. 그런데도 천룡전이나 축융노도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건 염치없는 짓이 아닐까?”

비정상의 생활화에 익숙해진 괴마라고 해도 잠시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훤은 그 사이 흉중의 울화를 풀어내듯 포목점의 주인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오늘 내로 가능하겠지?”

“예, 예! 제 영혼을 갈아 넣어서라도 만들어내겠습니다!”

*

별왕루(鱉旺樓)는 단강의 입구라 할 수 있는 단강구(丹江口)의 명물이다. 하류에 위치하여 호수처럼 보이지만 제법 넓은 강줄기를 따라 길게 늘어진 대수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흥취가 일 정도였다. 하여 루주인 연소방은 단강구 방면의 벽을 헐어 최대한 멋들어진 풍광만 연출하고자 했다. 그 시도는 제법 성공하여 호북성 북부를 지나는 시인묵객이나 무인이라면 반드시 거쳐 가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니 수많은 손님을 마주했고, 그 중에는 기인이사나 괴인이 즐비했다. 그렇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걸로 이름을 떨쳤다.

“정표야. 손님 받아라.”

점소이는 연소방의 읊조림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나다를까 다섯 명의 남녀가 자연스럽게 별왕루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흐음, 무복은 평범한 듯하나, 눈빛의 정기가 가득하군. 범상치 않은 이들이야. 정표야, 너는 빠져. 내가 접객해야겠다. 왠지 느낌이 좋아!”

점소이는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연소방의 장사 솜씨는 근방에서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니 오늘 연소방은 손님을 잘 구슬려 큰 돈을 벌 것이고, 시중을 드는 자신도 용돈 좀 만나게 될 터였다.

“헤헤, 알겠습니다요.”

연소방은 헛기침을 하며 손님을 맞이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하여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연소방의 표정은 상대의 첫 마디에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모른다. 하지만 알 수밖에 없었다.

연소방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취마?”

이훤은 만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리고?”

연소방은 그간의 노련함마저 퇴색된 듯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고, 고, 공적?”

이훤은 폭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나를 아주 잘 알고 있군.”

연소방은 미친 사람, 아니 다른 세상의 존재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면부지에 듣도 보도 못한 자였지만,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닌가.

상의의 가슴팍에는 명필이 휘갈긴 것처럼 멋들어진 글자로 공적(公敵)이라는 두 글자가 수 놓였다. 그리고 이름을 물어볼 때에는 알아봐 달라는 듯 상체를 비틀더라. 그렇게 보인 등짝에는 문파의 현판처럼 커다란 글씨로 취마(醉魔)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간혹 그런 자들이 있지 않던가.

아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남편감을 구하던가.

강호초출이 무위를 자랑하기 위해 비무 깃발을 달던가.

또는 영역을 벗어난 무인들이 문파의 상징을 내걸던가.

보통 이런 경우에 자신을 일부러 드러냈다.

‘제 놈이 공적인 걸 알아달라고 옷에 수를 놓고 다니는 놈이 있다니······.’

심지어 보통 실이 아니라 금사(金絲)를 쓴 것처럼 보였다. 저 정도 굵기로 수놓으려면 앞뒤로 해서 은자 다섯 냥은 족히 들었으리라.

‘미친 놈.’

하나 연소방은 자신의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줄지어 들어온 남녀의 가슴과 등짝에도 똑같은 필체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도 처음 온 놈이 대장이었는지 저들은 은사(銀絲)를 수놓았다.

‘미친 연놈이 다섯이나······.’

그는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숙인 채 들어서는 괴마들을 보며 한 숨 돌렸다.

‘그래,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어. 저들도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는가?’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하나 마지막에 들어선 장난기 가득한 청년의 말에는 다시 한 번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늘 밤에 혈사가 있을 거니 후원 쪽은 오지 말아요.”

“그게 무슨······.”

살다 살다 혈사를 예고하는 놈은 처음이다.

탈마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아는 장의사 있으면 꼭 부르시고.”

< 84, 나는 무림공적이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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