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나는 무림공적이다. >
84, 나는 무림공적이다.
오랜만에 선포된 무림공적이다.
그렇기에 강호는 다른 의미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본래 대다수의 강호인에게 악적과 마두란 공포의 대상이다. 악적이나 마두라 불릴 정도면 손속의 잔인함이나 비틀린 성정으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인근에 악적과 마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 객잔과 주루에는 손님 대신 파리가 날렸다.
하나 무림공적은 달랐다.
한 마디로 무림맹에서 공언한 합법적 화풀이 대상이었다. 힘에 부친다면 고자질을 통해 무림맹을 끌어들일 수 있고, 때에 따라 생면부지의 강호인들과 힘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척살에 성공한다면 큰 보상이 기다렸다. 절세의 비급이나 혹은 신병이기와 같은 기물을 얻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훤은 그 정도가 아니야. 역대급이지!”
“놈을 잡기만 한다면 강호의 흐름을 바꿀 수 있어.”
“죽이기만 해도 강호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있지.”
이훤은 지금까지의 공적 중 최상급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로잡기만 한다면 무려 신마의 심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혹여 죽인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게 되면 천하제일인을 이겼다는 명성을 얻게 되리라.
“그런데 너무 조용한 걸?”
“너라면 지금 당장 이훤하고 싸우겠냐?”
“그건 아니지. 다른 놈들이 힘을 빼놓거나 부상이라도 입혀놨을 때 슬쩍 끼어드는 게 최상이지.”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야. 아마 놈의 행적이 드러나는 순간 멀리서 기회를 엿볼 걸.”
이와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다.
먹음직스러운 만큼 날카로운 이빨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여 대별산 인근과 하남성 일대에는 날 선 기운이 가득했고, 어느 쪽으로든 폭발할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인생 역전과 인생 마감.
강호인이라면 생사(生死)의 선택지를 받아들었을 때 전자를 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정작 공적으로 몰린 당사자는 여유로웠다.
“아! 저런 곳이 있었나?”
이훤은 관도 근처에 위치한 간이 주루를 보고 슬쩍 운을 뗐다. 악마는 골이 아픈 듯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한 숨을 흘렸다.
“대형, 신무대회 때문에 이 근처에 설치한 간이 주루만 수백 개요. 그리고 우리가 대별산 인근에서 먹고, 마신 주루만 해도 벌써 여섯 곳이오. 이러다가는 오늘 대별산을 못 벗어난다니까?”
묘마 역시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이훤의 주충에는 학을 뗀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장강으로 달려가 호화로운 배를 타고 유람을 떠나고 싶었다. 하나 그녀의 심리 상태 최상단에는 악마를 짓밟겠다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겁나? 빨리 대별산을 떠나고 싶어?”
“뭐라는 거야?”
전마가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색마 오리버니께서 이미 하오문을 통해 우리가 대별산을 벗어났다고 거짓 정보를 퍼트렸잖아. 조금 전에 지나간 녀석들도 저들끼리 공적 이야기만 할 뿐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고요. 그러니 지금 당장은 대별산을 떠나는 것보다 잠시 이곳에서 숨을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이훤이 전마를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그래! 내 말이 저 말이다.”
괴마들, 그리고 전마조차 이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섯 명 자리 된데요!”
탈마는 이미 간이 주루에 들어가 주인과 협상을 끝낸 상태였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주인을 보고 있자니 최소한 다섯 동이의 술을 시켰나 보다.
악마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탈마란 이훤의 강렬한 욕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영혼이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망상이었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담겼기에 입안의 혀처럼 굴 수 있는 거지?’
악마가 마지막으로 엉덩이를 붙였다.
이훤은 벌써부터 술병을 입에서 떼지 않았고, 탈마는 주변을 살피는 것으로 보아 목표를 물색하는 듯했다. 묘마는 탁자 위에 찻물로 배를 그리며 혼자 해괴망측한 웃음을 연발하고 있었다.
반면 전마는 침착했다.
상재가 뛰어난 그녀는 언제나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괴마들에게 맡겨뒀다가는 목적지인 형산에 언제 도착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일단 몇 가지만 염두에 두고 있으세요.”
“어, 그래.”
진정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
하나 전마는 익숙한 듯 머릿속의 생각을 풀어냈다.
“지금쯤 무림맹 외원의 타격대가 출동했을 거예요. 그리고 동시에 비선각에서 우리의 용모파기를 내걸 겁니다.”
맹주는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한평생 협의지심을 품고 살았기에 취미 또한 검소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금기서화에 출중한 능력을 보였는데 이 기회에 그림 실력을 뽐냈다. 그가 직접 괴마들의 얼굴을 그렸으니 실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 때부터는 이처럼 느긋하게 움직이면 안 되요.”
“뭐 어때? 몇 놈 손봐주면 알아서 길을 열 텐데.”
전마는 묘마를 향해 당부하듯 말을 건넸다.
“언니, 우리는 포위당하기 위해서 공적을 자처한 것이 아니잖아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강호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해요. 무림맹이 자체 정화에 성공할 때까지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건 지양해야지요.”
묘마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배를 타야겠군!”
기승전배에 전마의 입매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화 내는 거야?”
“그럴 리가요. 어찌됐든 대형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해야 할 일을 정리해봤어요. 첫 째, 강호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둘 째, 형산에서 발견됐다는 천룡전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셋 째, 행방이 묘연한 축융노도가 접근하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수십 년 간 종적이 묘연했다면서요. 그 분이 정말 우리를 찾아올까요?”
악마는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절명곡의 생존자 중 가장 유약했다. 제갈삭은 외모로 인해 독기를 품었고, 악재, 크흠! 악 대협도 산동악가의 부흥을 위해 잔뜩 날이 섰지. 남궁세가야 특유의 오만함으로 인해 제멋대로였고, 화산파는 당시 존장의 원한을 갚기 위해 문파 전체가 달려든 상태였다. 무당파는 유약하다기보다 관조하는 입장이었어. 하나 그는 유약했다. 주도하기보다 끌려가는 성향이었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 적이 없을 정도였어. 그런 그였기에 만약 살아있다면, 또는 스스로 행방을 숨겼다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대형과 의논을 하려고요.”
“그래, 그는 책임지는 일을 하지 않아. 강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지.”
전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이미 산동악가에서 대형이 공론화를 했을 때부터 기회가 많았잖아요. 지금까지는 왜 안 오고요?”
“그 유약한 자가 사람들이 운집한 곳에 스스로 나타날 리가 없지. 만약 찾아온다면 야심한 틈을 타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이다.”
악마의 말에 묘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지.”
전마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가 모르게 전해들은 것보다 훨씬 더 실감나는 평가가 아니던가. 탈마가 전마의 표정을 슬쩍 보더니 지나가는 개를 평가하듯 말했다.
“벽력창 악재와 제룡검존 남궁천운이야.”
갑작스럽게 까발려진 정체였지만, 놀란 전마뿐이다.
그녀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천운이라는 분이······.”
“어, 남자야. 그리고 지금은 여자야.”
악마가 창대를 들었다.
그리고 까무러친 전마는 악마의 창대에 기댄 채 한참 동안 코를 골았다.
“이 년도 제정신은 아니야.”
“피곤했을 거다. 이 녀석은 너처럼 반쪽 여자가 아니라 진짜 여인이니까 가족 걱정에 심란했겠지.”
“그래, 그리고 너는 멍청이에 허약하지.”
이훤은 미간을 좁히더니 전마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지풍을 날려 마혈을 자극하는 순간 전마가 벌떡 일어났다.
“헉! 제가 지금······.”
탈마가 키득거리며 말을 건넸다.
“꿈이 아니야. 현실이야.
전마는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검후와 한마라는 분이 걱정되네요.”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명백하게 묘마 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놈들의 화약을 날려버린 이상 천룡전은 더 이상 전면전을 장담할 수 없지. 그렇게 된다면 인질인 검후와 한마의 중요도가 더 올라가게 된다. 결코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거야.”
전마는 이훤의 말에 탄성을 흘렸다.
“역시! 대형의 깊은 뜻은······.”
탈마가 말을 잘랐다.
“······라고 망아취자께서 말씀하셨지. 형님은 그냥 술만 아는 바보야.”
그리고 이훤은 탈마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이 얄미운 새끼야.”
전마는 두 사람의 우애 가득한 모습에 빙긋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무림맹에서 청도대상단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작하겠다고 천명했어요. 맹 차원에서 청도대상단을 감시하는 이상 어지간한 이들은 제 가족을 건드릴 수 없게 되었지요. 대형께서 신경을 써 주신 덕분이에요.”
이훤은 히죽 웃으며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하! 괴마끼리 당연히 도와야지!”
모두 술잔을 비우며, 웃고 떠들었다.
하나 악마만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내가 맹주에게 부탁한 건데······.’
*
무림공적이라면 응당 뒤따르는 상념이 있다.
초췌한 표정과 궁핍한 생활, 그리고 주변 모든 것을 의심하며 서서히 말라죽는 광경을 떠올릴 게다.
회귀 전 이훤의 공적 생활이 그러했다.
다른 무림공적에 비하면 훨씬 편했고, 안정적이었다. 하나 그래도 마음속의 불안을 털어낼 정도는 아닐 터였다.
한데 회귀 이후의 공적이란 유희와 같았다.
이훤과 괴마들은 당당하게 대로를 거닐었다.
신야 쪽을 지나 호북성에 들어서는 순간 날선 시선들이 사방에서 꽂혔다. 이미 용모파기가 수없이 모사되어 퍼진 상태가 아닌가. 게다가 하오문에서 신야 방면으로 도주했다는 소문을 퍼트렸기에 수많은 무인들이 운집한 상태였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이름 모를 노인이었다.
그가 등장하자 많은 수의 무인들이 탄성을 흘렸다.
꽤 이름을 날리던 노고수인 듯했다.
“놈!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쭈글쭈글한 얼굴로 근엄하게 말해봤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는 악마가 내지른 창질 한 번에 옆구리를 한 움큼 뜯긴 채 도주했다.
“이름이 뭐래?”
“몰라요.”
“그래도 공적 생활 첫 대결이잖아. 기념주라도 한 잔 했어야 했는데······.”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괜찮은 주루가 어디 있냐?”
탈마는 지도를 펼쳤다.
색마가 하오문의 보고에서 꺼내온 지도로 군부에서 사용할 만큼 상세했다. 그리고 지도 곳곳에는 붉은 점으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각기 한 개에서 세 개까지 점이 찍혔다.
오래 전부터 중원제일루라 불렸던 악양루나 등왕각의 경우 점 세 개가 찍혀 있었고, 제법 이름을 날린 주루의 경우 점 한 개를 찍었다.
“색마도 1점짜리 주루가 이십 리 밖에 있어요.”
“그래? 가자!”
이훤은 대뜸 경공을 펼쳤다.
탈마와 묘마가 그 뒤를 따랐고, 악마는 창을 내밀었다. 전마는 매미라도 된 것처럼 창대에 매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마가 발자국을 깊게 남긴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 도망친다!”
“쫓아!”
강호인들은 악마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부리나케 경공을 펼쳤다. 하나 강호의 견식이 깊은 무인들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노골적으로 따라오라는 것처럼 찍힌 발자국.
‘이걸 도망친다고 볼 수 있는 건가?’
< 84, 나는 무림공적이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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