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타락영웅(墮落英雄)! (2) >
이번만은 묘마와 악마도 혀를 찼다.
“고금을 통틀어 천하제일인에 근접한 고수 중 저처럼 생각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악마의 말에 묘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한 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무슨 의미야?”
“너나 나나 여벌로 받은 삶이야.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라고. 그런데 평생 해볼 수 없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야. 구미가 안 당기겠어?”
“호오.”
묘마는 힘을 얻은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진짜 공적하고는 다르지. 생각해 봐라. 우리가 무림공적이 된다고 쳐. 그럼 누가 우리를 쫓겠냐?”
악마 역시 회가 동한 듯 입술을 핥으며 대꾸했다.
“신마의 심득을 노리는 자들이겠지.”
“죽여도 되겠어? 안 되겠어?”
“그런 놈들이면 죽여도 되지.”
어딘가 모르게 사상이 어긋난 자들의 대화였다.
하나 이훤과 탈마는 끼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벌써부터 도주 경로를 짜며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추격대를 자극할 방법과 조롱할 방법, 그 밖에 공적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를 기획하며 술병을 비웠다. 한 마디로 비정상의 극을 달리는 자들의 어처구니없는 대화였다.
이 모든 상황의 바탕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 옛 추억도 되새길 겸.
- 형이 하면 나도 해야지.
- 공적, 재밌겠는데?
- 나중에 오해가 풀리면 더 큰 명성을······.
누구도 공적이 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품지 않았다.
괴마들은 일신의 무위가 하늘에 닿아 개개인이 일인군단이라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 무림공적(武林公敵)이라는 굴레를 오히려 유희의 대상으로 여기며 기대감에 부풀었다.
“저기······.”
하나 전마만은 예외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가문이 존재했고, 상재가 뛰어날 뿐 무공에 특출한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괴마의 삶을 택했다고 해도 다른 이들만큼 자유분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훤은 뒤늦게 전마를 바라보고 인상을 썼다.
“네, 맞아요. 저는 상황이 조금······.”
“일단 너부터 바로 움직여.”
전마는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이내 이훤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 마디가 들려왔다.
“전장에 맡긴 돈부터 모조리 뽑아 와. 호화로운 도주 생활을 위해서는 일단 돈부터 챙겨야지.”
“······.”
전마로서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 때 이훤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턱짓을 했다.
“준비 안 해?”
“그게 아니라 저도 가는 건가요?”
탈마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당연하지. 우리는 괴마잖아!”
반면 이훤은 히죽 웃으며 전마를 가리켰다.
“빠지고 싶어?”
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당연히 함께 하고 싶었다.
천하에 손꼽히는 이들과 호형호제하는 기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그리고 저들과 함께 펼쳐나갈 강호행이 기대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청도대상단이 족쇄처럼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불현 듯 한 가지 예상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도 청운루에서의 시험은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교룡세가와 옥화산장의 후계자들을 상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괴마임을 증명했다. 하나 단순히 마음 내키는 대로만 행동한다면 괴마가 아니라 철부지일 터였다.
가족, 사문, 가문, 그 외의 수많은 인연.
지금껏 재산이라고 자부했던 인맥이 오히려 발을 무겁게 만드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시험이라면.’
이훤은 결코 재촉하지 않으리라.
그는 예영영의 결단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재정립될 터였다. 따지고 보면 탈마가 있는 이상 두 사람은 마르지 않은 돈 주머니를 찬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데 굳이 예영영에게 돈을 맡기며 전마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저 예영영이 전마라면 어울리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관계였다.
‘나는······.’
전마는 야유회라도 가는 것처럼 들떠 있는 괴마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들과 함께 고금을 통틀어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호행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돈 찾아 올 게요.”
악마는 멀어지는 전마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대형에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을 줄은 몰랐군. 저 녀석도 이제 이쪽에 완전히 빌을 들였군.”
묘마는 대답 대신 비웃듯 히죽 웃었다.
악마는 발끈하여 미간을 좁혔다.
“뭐가 웃겨?”
“너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아직 순수한 면이 남아 있구나 싶어서 웃었다.”
“뭐라는 거야? 반남반녀 주제에.”
평소였으면 발끈하여 무형검을 흩뿌렸으리라.
하나 묘마는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물었다.
“공적이 되고자 했지만, 실상 이 또한 우리의 목적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어. 천룡전의 말살과 심득의 규합. 그걸 위해서라면 전마는 후방으로 빼돌려 강호의 자금 흐름과 무림맹과의 연결 고리로 삼는 것이 이득이야. 실제로 색마는 불러들이지도 않았잖아. 아마 녀석의 하오문을 이용해 정보를 과장하고, 조작하고, 말살해서 득이 되는 쪽으로 활용하려는 거겠지. 그런 전마를 대형이 데리고 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악마는 조금 전처럼 환하게 웃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 없는 한 마디를 흘렸다.
“우리는 괴마니까?”
“우리가 연애 하냐? 뭘 매 순간 붙어 있으려고 해. 전마는 말이야. 입구야. 우리에게 올 수 있는 입구.”
묘마의 의미심장한 말에 악마는 인상을 썼다.
“뭐라는 거야? 여인네의 화법 말고 사내답게 탁 털어 놓고 말해 봐!”
“멍청한 놈. 그냥 너는 평생 진법이나 외우고, 새기면서 살아라. 대형!”
그녀는 이훤을 불렀다.
“왜?”
“전마를 왜 데리고 가는 거요?”
이훤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우리가 공적이랍시고 돌아다닌다고 쳐. 어느 미친놈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겠냐? 그러니 전마라도 끼어 있어야 인질로 삼아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겠어?”
묘마는 악마에게 턱짓을 하며 읊조렸다.
“가서 몸에 법보나 새겨라. 머리가 나쁘면 몸뚱이라도 튼튼해야지.”
악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해야 했다.
잠시 후 탈마가 뒤늦게 깨달은 듯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언제부터 공적인 건데요?”
“날 밝으면.”
*
신무대회의 분위기는 유례가 없을 만큼 화기애애했다.
강호 곳곳에서 무인들이 모였으니 밥 먹듯 유혈사태가 일어났을 터였다. 하나 대부분의 무인들은 이훤이 퍼트린 신마의 심득을 자신에 맞게 체득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이미 심득 자체가 공개되었기에 서로 의견을 나누고, 도움을 받았다.
마치 강호의 이상향과도 같은 상황.
무(武)를 숭앙하는 자들이 모여 발전을 논하니 어찌 훈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나 이른 아침부터 묘한 소문이 저자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봐, 들었나? 신마의 심득이 완전한 게 아니라는 말이 있던데······.”
“무슨 개소리야! 조금 전에도 풀죽이나 쓰던 점소이 놈이 대오각성을 했다며 별을 쫓아야 한다며 뛰쳐나갔다네. 한데 놈의 눈빛이 범상치 않았어. 오늘 아침만 해도 벌써 난리라고. 그런데 완전하지 않다니?”
“왜 화를 내고 그래? 아침을 먹는데 누가 그러더라고.. 완전하지 않다고. 윗 놈들은 벌서 다 안다고 말이야.”
“예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지금 취선관주의 명성은 맹주마저 뛰어넘을 정도라고. 헛소리하다가는 조리돌림을 당할 수도 있네.
그저 그렇게 흰소리처럼 치부됐다.
하나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신마의 심득이 불완전하고, 이훤은 믿을 수 없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졌다. 무엇보다 신마의 심득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불만 섞인 투정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계속 익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찜찜한데.”
“무림맹에서는 뭔가 이야기가 없나?”
“빌어먹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저들끼리 좋은 걸 익히고 짜투리만 우리에게 뿌린 건 아니겠지?”
이훤의 농담에 의하자면 땔감이 충분히 모인 상태가 아니던가. 이제 불씨만 당기면 불을 피우는 건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다.
그리고 무림맹이 불씨를 당겼다.
“맹 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소. 장로원에 속한 영법유자 좌인경과 용호권사 강찬홍, 그리고 내원 집법당의 부당주인 철판관 이인렴이 살해당한 채로 발견됐소. 한데 이들이 살해당한 시각에 주변을 오간 이가 흉수로 지목됐소이다. 그는 취선관주 이훤이외다.”
맹의 내원주가 직접 나서서 수백 명의 무림인을 대상으로 혈사를 발표했다.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강호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천하제일인에 근접했으며, 온 강호의 추앙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살해당한 장로들은 취선관주의 의도를 의심하였고, 맹주의 밀명을 받아 비밀리에 조사를 하고 있었소. 그리고 그들이 실마리를 잡았다고 보고한 후 살해당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소이다.”
소요가 일어났다.
이훤이 잘못되면 그들이 얻은 심득 또한 잘못된 게다.
그러니 사람들은 내원주의 발표를 믿지 않았고,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의심했다.
“도대체 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지만, 이훤의 행적을 보면 욕망의 그림자로 찾을 수 없었다. 하나 무림맹에서 혈사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할 때마다 의심은 곧 현실이 됐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조작된 흉계로······. 실제 만매만전은 이훤이 아니라 화산파의 전대 고수가 집필한 것으로······. 화산파의 전대고수는 이훤에게 암습당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고······. 이훤의 본래 목적은 신마의 심득을 모두 모으는 것이었소이다!”
거짓을 정교하게 짜 맞추면 진실이 될 터였다.
그리고 무림맹 비선각은 그것을 가장 잘 하는 집단 중 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이훤은 신마의 심득을 모두 모으기 위해 만매만전을 미끼로 내걸은 것이외다. 그걸 통해 공론화시키고, 강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명가의 후예들을 압박한 것이오. 결국 협의지심을 품은 명가의 후예들이 신마의 심득을 공개하기로 결정하고, 이훤에게 맡기게 되었소. 한데 그 자는 어제 만인에게 신마의 심득을 적당히 짜깁기 하여 알린 후 동료들과 함께 도주했소이다.”
강호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색마가 하오문을 통해 퍼트린 거짓 정보가 그들의 이목을 후려쳤다.
- 이훤이 신마의 모든 심득을 지녔다.
-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신야로 장강을 건너 남하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마지막내 무림맹주가 나섰다.
“현재 이훤은 취마라는 별호로 각기 묘마, 악마, 전마, 탈마라 불리는 이들과 도주 중으로 괴마라 통칭한다!”
괴마들에 대한 정보는 아침나절부터 색마를 통해 널리 퍼져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전마가 끼어 있다는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고작 해야 약관을 넘긴 여아가 끼어 있다면 도주가 빠를 수 없다. 또한 그런 짐이라면 기회를 엿보았다가 협상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강호인들의 귀에 간절히 원하던 한 마디가 꽂혀들었다.
“이에 무림맹은 맹주령을 발동하여 괴마들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한다. 일각 후 무림맹 외원의 모든 타격대가 추살에 동참할 것이고, 향후 괴마에 대한 어떠한 행위도 불문에 부칠 것을 맹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맹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별산으로 떠나는 이들이 속출했다. 몇몇은 무리를 모으려 했고, 몇몇은 다른 사람들의 뒤를 칠 생각에 음흉한 눈빛을 흩뿌렸다.
‘쯧쯧,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날파리도 아니고······.’
그는 맹주전으로 돌아왔다.
방금 무림공적을 선포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편안한 표정이다. 하나 맹주전에 들어서는 순간 오만상을 지으며 진저리를 쳤다. 아침나절에 도주했다고 알려진 이훤과 괴마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서 교룡세가까지 가는 거야.”
“미쳤냐? 형산으로 가야 한다잖아.”
“멍청아! 축융노도가 아직도 형산에 있겠냐? 우리가 강호의 이목을 집중시킨 채 떠돌다 보면 녀석이 먼저 찾아올 거라니까.”
“그런데 왜 배를 타냐고?”
“오랜만에 배 타고 싶단 말이야!”
“교룡세가라면 저도 찬성이에요. 받을 돈도 있고······.”
“우리 막내가 원하는 거면 오라버니가 다 훔쳐올 수도 있어!”
“교룡세가에 괜찮은 술 있냐?”
이훤은 입맛을 다시다가 맹주가 돌아온 것을 보고 다가왔다.
“잘 하셨습니까?”
맹주는 한 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제대로 불은 지펴놨네. 망아취자께서 계시니 맹 내에 숨어든 간자들을 색출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게야. 자네가 강호를 위해 희생한 점은 결코 잊지 않겠네. 그리고 이 일이 끝났을 때 모든 걸 완벽하게 되돌릴 것을 확약하겠네.”
한데 이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흘렸다.
“이게 희생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지요.”
“그게 무슨 뜻인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이 있죠?”
맹주는 뜬금없는 이야기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알기는 알지.”
이훤은 자신의 방인 양 맹주의 서탁 아래에서 술을 꺼낸 후 창가로 향했다.
“저, 그 말 좋아해요.”
갑작스런 고백과 함께 이훤이 사라졌다.
괴마들도 마치 그림자처럼 이훤을 따라 자취를 감췄다.
하나 홀로 남은 맹주의 머릿속에는 대별산에서 시작된 불길이 천하를 태우는 광경이 스쳐갔다. 그리고 불안한 예감에 방점을 찍듯 이훤의 전음이 꽂혀들었다.
[맹주가 지핀 불은 책임지고 최대한 키워 볼게요.]
< 83, 타락영웅(墮落英雄)!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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