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04화 (204/226)

< 82, 괴마가 될 수 없는 자들. (2) >

망아취자가 표홀한 신법과 함께 지붕 위에 올랐다.

이훤은 이미 맹주와 지붕으로 올라왔을 때부터 망아취자의 기운을 감지했다. 망아취자가 기척을 숨기지 않았으니 맹주도 알고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두 사람은 이미 대화를 나눴을 것이라 여겼다.

“어디서 뭘 하시나 했더니 정치하고 계셨어요?”

이훤의 물음에 망아취자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죽을 때까지 은거하려던 나를 끌어낸 게 누구더냐? 네 녀석으로 인해 말년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언제 오셨어요?”

망아취자는 이훤이 건넨 술병을 받으며 말했다.

“네가 신무대회 전날 은밀하게 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흐흐, 하루 사이에 많은 걸 하셨네요.”

“만매만전이 극에 달하니 네가 말하는 천룡전의 느낌이라는 것이 생기더라. 아마 신마의 심득을 익힌 자가 일정 경지에 이르면 서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맹주를 찾아갔지.”

맹주는 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하, 선배께서 좋게 봐주시지 않았으면 오늘 오리찜은 먹지 못했겠지요.”

오리찜은 바닥났지만,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웃으며 말했지만, 참으로 부끄럽구나. 네게만 희생을 강요해야하는 상황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어.”

“그래도 잘만 하시는데요?”

망아취자는 이훤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아는 너라면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맞아요.”

“나는 그걸 알면서도 네가 부탁을 하려 한다.”

“그게 문제입니다.”

“...”

“스승님이 괴마가 될 수 없는 이유. 생각이 너무 많아요. 세상 걱정, 정파 걱정, 화산 걱정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너무 많은 걸 생각하신다고요. 그래서 길이 있음에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망아취자는 탄성을 흘렸다.

이훤의 말은 비단 자신의 부족함이나 이런 상황에서의 압박을 논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 흑의인이 사자림주와 낙안봉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어깨에 짊어진 것이 많기에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은 많이 내려놓았고, 내려놓은 걸 이훤에게 맡기려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단다.

“하아.”

만매만전을 만들고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겼다.

끝을 보았으니 미련이 없어진 게다.

한데 이훤의 말을 듣고 있자니 끝이라고 여겼던 곳 너머로 무한한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망아취자의 귓가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 마디가 꽂혀들었다.

“화약이 있으면 해결하면 될 것이고, 진법이 있으면 깨면 되지요.”

망아취자와 맹주는 눈을 끔뻑였다.

그들은 이 계획을 세우면서도 이훤에게 미안함만 느꼈을 뿐이다. 오히려 계획의 문제점과 다른 돌파구는 찾아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가능하다고?”

이훤은 혀를 찼다.

“쯧쯧, 화산파가 문파의 자리를 벗어던지고 연맹으로 변화했으며 강호의 모든 방파는 그간의 명분과 논리를 벗어던졌어요. 심산유곡에나 있다는 기인이사는 만매만전으로 인해 우후죽순처럼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지금의 강호입니다. 신마의 심득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라 강호라는 체계 전체를 뒤집어엎을 겁니다. 사람이 불을 피워 따뜻함을 알게 되고, 글을 만들어 지식을 전했듯 이 무공 또한 세상을 바꿀 겁니다.”

일장연설은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만매만전을 직접 만든 망아취자도 신마의 심득이 없었다면 응당 천하제일인이라 불렸을 맹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상의 시작인 셈이다.

“신세계가 열릴 겁니다. 정파와 사파, 마도? 그런 구분은 없어요. 신마의 심득은 자연지기에 순응할수록 체득하게 됩니다. 결국 선인과 악인을 가를 필요도 없게 될 겁니다. 선인은 강하고, 악인은 약하니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당연한 결과잖아요.”

이훤은 술이 바닥남과 동시에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넋이 나간 맹주와 망아취자를 뒤로 한 채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겁니까? 좋은 구경 놓치고 싶지 않으면 빨리 따라오세요.”

*

이훤은 십만 근의 화약이 묻혀 있다는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과연 맹주의 말처럼 대연무장 주변에는 묘한 기운이 들끓었다. 일견하기에는 평범한 진법처럼 보이지만, 자연지기를 역으로 휘돌리는 극악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아마 발동만 시킨다면 어지간한 사람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진법 안에서 말라죽었으리라.

“우리가 판단한 건 여기부터일세.”

맹주가 걸음을 멈췄다.

하나 이훤은 망설임 없이 대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오늘도 하루 종일 밟고 다녔잖아요. 새삼 뭘 걱정합니까?”

“허허, 그것도 그러네.”

어차피 기감을 퍼트리면 주변에 숨어 있는 이들을 찾아낼 수 있다. 다행히 맹주가 호위까지 물렸기에 주변 오십 장 안에는 사람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작하죠.”

이훤은 대뜸 연무장에 깔린 청석을 뽑아 내던졌다.

“뭐하세요? 다 뜯어내야 밑에 뭘 깔아놨는지 알 것 아닙니까?”

그 때부터 믿기 힘든 광경이 일어났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촌부처럼 허리를 굽힌 채 청석을 뽑았고, 무림맹의 맹주라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 구석으로 던졌다. 그러면 화산의 전전대 고수이자, 세수가 백세를 넘긴 망아취자가 청석을 받아 차곡차곡 쌓았다.

“허허.”

맹주는 자신이 생각해도 상황이 우스운지 연방 헛웃음을 터트렸다. 불과 반 시진 전만 해도 강호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라고 여기지 않았던가. 한데 이훤에게 털어놓은 이후 모든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불현 듯 지난 밤 망아취자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 망아취자는 이훤을 가리켜 한 마디로 정의했다.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지. 천성이 선하여 망둥이처럼 날뛰는 듯 보여도 정에 굶주려 결코 악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괴마의 방식대로 행하는 과정이 엉망진창일 뿐 결과물은 늘 훌륭하지 않았던가.

“이제 다 되었네.”

맹주는 일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서인지 본능적으로 이마를 훔쳤다. 물론 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으나,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자! 어디 한 번 볼까요?”

이훤은 양 손을 털었다.

손목에 휘감겨 있던 팔황과 무극이 채찍처럼 축 늘어지더니 땅에 박혔다. 그리고 혈륜을 끌어올리는 순간 대연무장 전체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 이보게!”

하나 망아취자는 맹주를 향해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저을 뿐이다.

“이것도 그냥 내버려두라고요?”

오십 장 내의 사람은 물렸으나, 만에 하나 폭발한다면 무림맹의 칠 할 이상이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맹 내에는 몇 시진 앞으로 다가온 신무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밤을 새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구그그그그그극-

이훤이 마침내 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쟁기로 밭을 갈 듯 깊은 고랑이 생기며 흙과 모래가 떠밀려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은 바람을 타고 대연무장 외곽으로 휘말려 사라졌다.

“어!”

맹주는 입을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깊이가 저마다 다른 가운데 수많은 항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하들이 조사한 바와 일치하는 광경이다. 한데 이훤은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항아리는 건드리지도 않은 채 흙과 모래만 퍼 올렸다.

“허허.”

맹주는 사람의 몸통만한 항아리를 눈으로 확인한 후 말을 잇지 못했다. 저런 항아리가 묻히는 걸 몰랐다는 무지함에 자책했고, 이런 흉악한 짓거리를 준비한 적의 잔악함에 놀랐으며, 이훤의 신위에는 그저 경탄할 따름이다.

“한데 저게 된다면 청석도 그냥 치울 수 있지 않았나?”

망아취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이렇게 구경하는 꼴이 마뜩찮았던 게지.”

“허허, 부럽네요. 저도 맹주가 아니었다면 괴마가 되어 함께 어울리고 싶을 정도랍니다.”

맹주의 혼잣말에 망아취자는 묘한 미소를 띄웠다.

그 때 대연무장 밖에서 다섯 명이 등장했다.

맹주전을 지키고 있던 묘마와 악마, 그리고 동료를 찾으러 나섰던 전마가 탈마와 색마를 데리고 왔다.

“이게 다 뭡니까?”

“어! 터트릴 거야.”

“우와!”

탈마는 벌써부터 술을 구하러 나갈 기세였다.

한마 백소를 제외한 모든 괴마가 모인 게다.

이들 중 가장 침착한 악마가 물었다.

“뭘하면 됩니까?”

뭐가 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하겠단다.

그리고 이훤 역시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십전진뇌공을 극성으로 펼쳐줘야겠어.”

“법보? 역법보?”

“법보. 기왕이면 기운이 뭉쳐드는 곳이면 좋겠다. 호리병의 입구같은 장소를 찾아봐.”

악마는 고개를 끄덕인 후 눈을 감은 채 대연무장 주변을 살폈다. 묘마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헤죽거리며 다가왔으니 이훤의 손짓에 입술을 삐죽이며 물러서야 했다.

“여기 창고 알지?”

탈마는 맹주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중정석하고 사람의 치아나 뼈, 그리고 형석, 석회와 동을 있는 데로 훔쳐 와.”

이훤의 말에 탈마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훔치다니요. 가져오는 거지요.”

“까불지 말고, 빨리 가.”

색마는 이훤이 손짓을 하자마자 바람같이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읊조렸다.

“대형의 손발이 되고자, 이 부족한 동생이 하오문을 접수해왔습니다. 이제 대형의 말은 곧 진실이 되어 강호에 퍼져나갈 것이고, 원하시는 자가 있다면 제가 희대의 패륜아로 만들어 강호에서 매장시켜버리겠습니다.”

이훤조차 색마의 결의 앞에서는 질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아. 그런 건 필요 없고, 가서 소문 좀 퍼트려.”

“네!”

색마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소문의 내용을 전해 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허허, 무림맹의 경비 체계가 이렇듯 허술했던가?”

망아취자는 맹주의 넋두리에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내려놓으시게. 깊이 생각하면 밤에 잠만 안 올 뿐일세.”

“허허, 이것 참.”

“그리고 괴마가 되고 싶었다고 했지? 나도 그랬네.”

그 때 이훤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외쳤다.

“안 껴줘요.”

망아취자는 그 모습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봤지. 우리가 괴마가 될 수 없는 건 협객의 마음이나 영웅의 도리, 강호의 안녕과도 같은 짐을 짊어졌기 때문이 아닐세. 그냥 처음부터 우리와는 다른 녀석들이야.”

이훤은 망아취자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귓등으로 흘린 채 전마에게 읊조렸다.

“너는 하산해서 좋은 자리와 장소를 선점하고, 돈 끌어 모을 준비해.”

천룡전의 음모가 코앞까지 닥쳐왔다.

그리고 그것을 은밀하게 해소하는 자리였다.

한데 갑작스럽게 돈 문제가 어찌 끼어든단 말인가.

맹주는 희희낙락하며 자리를 뜨는 전마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렇군요. 강호의 모든 사람과 다르네요. 고금을 통틀어 괴마라 불릴 수 있는 건 저들이 전부일 겁니다.”

“우린 그래도 공짜로 구경하고 있으니 운이 좋다고 여기시게나.”

망아취자는 어느새 연무장 주변에 자리를 잡고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맹주는 스승과 제자가 술로 묶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입맛을 다셨다. 하나 무림맹의 주인이자, 정파의 책임자로서 술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아쉬움을 달래며 말을 건넸다.

“저는 차를 좀 가져오겠습니다.”

*

“준비 됐냐?”

이훤의 물음에 악마는 두 자루의 창을 일 장 간격으로 꽂았다.

“이곳이 최상급 법보에요. 대지의 기운이 바람을 타고 솟구치는 장소지만, 산세의 기운으로 인해 비스듬히 밀려나 서선으로 뻗어나갈 겁니다.”

이훤은 눈대중으로 창과 창 사이의 공간을 확인한 후 혈륜을 끌어 모았다. 그러던 중 눈을 끔뻑이며 몇 번이나 한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일대장관이 펼쳐질 텐데 좀 아쉬운 걸?”

“사람의 이목을 얼마나 끄시려고요?”

“이거 다 터지면 백 리 밖에서 보일 걸? 그러니 처음부터 보여주면 좋잖아. 기왕이면 천룡전 새끼들한테 외치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야.”

이훤이 속내를 밝히려는 순간 탈마가 끼어들었다.

“야! 이 새끼들아. 너희들의 오십 년이 폭발하고 있다!”

그는 히죽 웃으며 이훤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요?”

“재수 없는 놈.”

이훤은 탈마의 엉덩이를 걷어찬 후 자세를 바로 하며 숨을 골랐다.

“악마야. 여기 펼쳐진 진법의 사문이 어디냐?”

악마는 대충 주변을 살폈다.

이미 진법의 조예로만 따지자면 제갈세가도 그를 따를 수 없는 경지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잠시 눈대중으로 살피더니 한 쪽 벽을 가리켰다.

“저기가 시작이자, 끝이네요.”

이훤은 고개를 끄덕인 발끝을 벽 쪽으로 향한 채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텅!

그 순간 혈륜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다가 방사형으로 폭발하며 벽을 덮쳤다. 그리고 진법의 사문을 산산조각 내는 순간 귀곡성과 함께 음습한 기운이 몰려왔다.

이훤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다시 한 번 발을 굴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그 순간 대연무장 주변의 벽이 모조리 가루로 변했고, 흙먼지가 비산했다. 그리고 진법을 감싸던 기운은 보이지 않는 파장이 되어 끝없이 뻗어나갔다. 대별산 아래의 불야성까지 멈추지 않고 뻗어나가는 순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뭐지?”

“방금 땅이 흔들린 것 같은데?”

“대별산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소!”

혼란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려는 순간 모든 불신과 걱정을 일소하듯 굉음이 울렸다.

쿠쿠쿠쿠쿠쿵!

그리고 대별산 방향에서 하늘을 향해 녹빛 불꽃과 연기가 축포처럼 흩뿌려지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 82, 괴마가 될 수 없는 자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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