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괴마가 될 수 없는 자들. >
82, 괴마가 될 수 없는 자들.
야합(野合)이란 나쁜 목적을 가지고 서로 어울리는 행위를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훤과 맹주는 훌륭하게 야합을 이뤄냈다.
“이거면 되겠죠?”
갑은 을에게 최소한 진위 여부만 판단할 수 있는 시연에 동참한다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조건이다.
반면 을은 조금 억울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을은 갑에게 필요할 때마다 오리찜을 제공한다.
을은 갑에게 맹 내에서 유통되는 술을 무제한 제공한다.
을은 갑이 건네 준 매화를 맹주전 앞에 심고, 성실하게 관리한다.
“그래, 이거면 족하네.”
이훤은 붉은 장막 안에서 맹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맹주 또한 손을 펼쳤다.
두 사람의 손이 일 장 거리를 격한 채 내력을 발출했다.
무형의 기운이 흘러나와 부딪쳤다.
하나 이전과 달리 격렬하게 우열을 가리거나,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그저 흘러나온 그대로 섞여들어 두 사람의 기운이 조화를 이뤘다.
이훤의 혈륜은 비록 핏빛으로 번지기는 하나 본질은 자연지기였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11성에 이르렀으니 자연지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데 놀랍게도 맹주의 기운 역시 대자연의 기운이 생동하듯 맞물렸다.
‘절대지경을 넘어 초월경에 발을 들인 셈이로구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정도면 신마의 심득을 익힌 자라고 해도 쉬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악마에게 있어서 맹주와 같은 기운은 상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자연은 규칙이 없다.
그저 하늘의 그물이 그러하듯 그저 알아서 이뤄지는 게다. 반면 악마의 무공은 철저하게 규칙을 지킴으로서 위력을 발휘했다. 아마 악마가 맹주와 생사대결을 벌인다면 끝내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엄청나군요.”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실상 이 정도의 무위라면 애써 이훤에게 저자세를 보일 이유가 없다. 그러니 굳이 불필요한 과정을 거친 이유가 따로 있으리라.
그리고 그건 진위 여부를 판단한 이후가 될 터였다.
“만약 천룡이 이런 기운을 흉내낼 수 있다면 애초에 강호 전체를 피로 물들이지도 않았겠네요.”
통과라는 의미다.
이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되물었다.
“저는 어떤가요?”
맹주의 무덤덤한 표정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자네는 정녕 나이에 비해 노회함이 극에 달했군. 지난 행적을 살펴보면 딱히 고생이랄 것도 없었건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처럼 능숙하단 말이야.”
“그래서요?”
이훤의 물음에 맹주는 순순히 대꾸했다.
“자네도 통과라네. 솔직히 만에 하나 자네가 이 모든 일을 꾸몄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했었네. 그리고 정녕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이 강호를 포기했을 것이야. 의심한 것을 사과하지는 않겠네. 맹주라는 자리에 앉으면 매일 같이 의심하는 것을 일과로 삼게 되거든.”
“술 한 잔 하실래요?”
“오리찜만 먹도록 하지.”
“술 못 마십니까?”
“맹주 자리에 오른 후 금주하고 있네.”
“맹주가 그렇게 좋아요?”
“난 한 번도 맹주가 되고 싶은 적이 없었네.”
이훤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어딘가 모르게 망아취자의 냄새가 났다.
누군가는 불경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나 이훤은 총숙수에게 받아온 오리찜을 가지고 맹주전 지붕에 올랐다. 그 사이 맹주는 선물로 들어온 술 중 가장 귀한 것만 골라서 자리를 잡은 후였다.
“누구는 깨달음을 얻어서 저러고 있는데······. 나는 오리 다리나 뜯고 있으니 허망하기 짝이 없군.”
이훤은 밀봉을 뜯어낸 후 술의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맹의 주축들이 강해지면 맹주도 좋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단계도 아니잖아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한 사람은 술을 마시고, 한 사람을 고기를 씹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나갔고, 흐름은 끊기지 않았다.
“자네를 보면 내 예전이 떠올라.”
“맹주를 보면 화산의 스승이 생각나요.”
맹주는 손에 묻은 오리기름을 쪽쪽 빨아먹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내가 강호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지. 운 좋게 좋은 스승을 만났고, 무공의 성취 또한 빠르게 성장했어. 선인과 악인을 고루 만났지만, 제법 멋진 강호행이었네. 그만큼 잘나갔거든. 당연히 협객과 영웅을 꿈꿨고. 겉으로 보이는 위세나 위명, 명분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지. 철부지라고 욕을 먹고, 사파나 다름 없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어. 하나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해하고, 안심하면 그것으로 족했네.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었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맹주가 됐습니까?”
이훤의 물음에 맹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맹주가 되면 세상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어. 한데 자네는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군중 앞에서 무공을 펼쳤는지 알고 있는가?”
“글쎄요.”
“한 번도 없다네. 내가 하는 일은 장로회의에서 다툼을 중재하고, 각 부처 간의 알력을 조율하며, 욕심쟁이들을 빼놓지 않고 만족시키는 것이야. 아닌 말로 내가 가장 많이 한 건 수결을 하거나, 인장을 찍는 거였지.”
“······.”
“보람이 없는 건 아니야. 어찌됐든 정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유지는 하고 있으니까. 하나 바람처럼 살다가 산처럼 머물러야 하니 힘들었어. 그래서 자네에게 관심을 가졌는지도 몰라. 자네의 행적을 쫓으며 가슴이 두근거렸고, 어처구니없는 해결책에 웃기도 했어. 그 즈음 자네야 말로 이 강호의 진짜 주인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만매만전을 공표하고, 다른 생존자들을 압박한 건 정말 회심의 한 수였어. 나를 포함해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나는 자네를 좋아하는 한편 불안했네.”
제갈세가마저 통째로 천룡전에게 넘어간 형국이다.
매일같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해서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이 모든 문제와 답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훤의 정체가 더없이 궁금했으리라.
“이해합니다. 그래서 어땠나요?”
“의논하고 싶어졌네.”
맹주는 오리 뼈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맹주라는 자리에 있으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어. 하오문과 개방, 비선각은 물론이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지. 그리고 제갈삭이라는 자가 세가 전체를 함정으로 삼았다는 말에 몇 가지를 전해 듣게 되었네.”
“뭔가요?”
“놈들이 신무대회를 통해 뭘 얻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뭘 할지는 대충 짐작이 가.”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룡전의 목적은 신마의 심득을 모두 모으는 것이리라.
그러니 소천기 제갈삭에게 이훤이란 감금의 대상이 아니라 고문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신마의 심득을 토설하게 만들어야 할 상황인 게다. 하나 놈은 이훤을 산아래 가둬버렸고, 종적을 감췄다.
“신무대회를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신무대회가 열리는 곳의 보수와 관리, 최소한 오십 년 동안 무림맹 안에서 일어난 대소사 중에 제갈세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검토했네.”
“허어.”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맹주는 별 것 아닌 듯 털어놓았으나, 이것이야 말로 정파무림의 지주인 무림맹만이 가능한 대업이었다.
“뭐가 나왔습니까?”
“제갈세가가 규모를 축소하고, 가솔들을 방출했지. 몇몇 선택받은 이들만 받아들였기에 강호의 이목이 쏠렸지. 하나 우리는 방출한 이들에게 집중했네. 그리고 최소한 사십 년 전부터 수많은 이들이 무림맹에서 일했음을 파악했지.”
여기까지는 놀랄 일이 아니다.
제갈세가의 엄격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해도 어지간한 지자보다 나을 터였다. 그러니 무림맹을 비롯한 수많은 방파의 머리를 자처했으리라.
“아.”
“그래, 천룡전은 그렇게 방출된 이들이 외부와 연결되면서 시작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만은 제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네요.”
맹주는 이훤을 힐끔 보며 웃었다.
“빚을 지웠다고 하기에는 이쪽도 상황이 별로 안 좋아. 맹 내에서 근무한 이들의 행적을 모두 쫓는 건 불가능했어. 해서 특정 근무지와 특정 장소에 관한 것만 모아서 분류했더니 저곳이 나오더군.”
그는 맹주전 너머로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가운데 홀로 불야성처럼 환하게 빛나는 곳을 가리켰다.
“신무대회가 열리는 대연무장이로군요.”
“그래, 저곳에서 내가 개회사를 하고, 비무대회를 하고, 감정연도 할 것이고, 자네가 신마의 심득을 지닌 이들과 함께 나서기로 했지.”
“설마?”
이훤의 뇌리에 지금까지 마주했던 천룡전의 주구들과는 달랐던 제갈삭의 행적이 스쳐갔다. 그 또한 신마의 심득을 욕심냈으나, 더 큰 원한을 지니고 있었다.
추한 외모로 인해 스스로 키워낸 자괴감.
그리고 그 복수의 대상은 절명곡의 생존자들이었고, 또한 강호의 밝음을 만끽하며 돌아다니는 무인들일 터였다.
“대연무장 아래 십만 근의 화약이 묻혀 있네. 그리고 내원 주변에는 천살대진이 펼쳐져 있어. 이미 눈으로 확인을 했네.”
“하아, 화약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진법은 아무도 몰랐던 겁니까?”
“본래 맹의 내원과 외원의 경계는 여러 진법이 설치되어 있네. 비밀리에 설치했기에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묻혀 있는지도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아. 하나 진법과 기관이란 결국 누군가가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저들은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진법과 기관을 변형했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폭발과 연계되어 무림맹 전체를 뒤집을 천살대진이 되었지.”
“미친놈.”
“맞아. 제갈세가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했을 자가 어째서 이런 결말을 꿈꿨는지는 모르겠어. 그러니 미친놈이 맞지. 하나 그 미친놈이 꾸며놓은 함정에 날이 밝으면 최소한 삼 만 명 이상의 무인들이 몰려올 걸세.”
“해체는요?”
“불가능해. 오직 한 가지 방법이라면 신무대회 자체를 취소하고, 저들을 모두 되돌려 보내는 거라네.”
“그럼 그래야지요.”
맹주는 한 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럴 수 없다네.”
“설마 무림맹의 이름값 때문인가요?”
“부인하지는 않겠어. 무림맹의 요처에 적이 침투하여 저 짓거리를 해놨다는 것이 알려지면 정파는 풍비박산이 나네. 무림맹이 존재함으로서 유지되던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고, 사방에서 사마외도가 준동하겠지. 또한 실상을 알린다고 해도 그 말을 몇 명이나 믿겠는가? 나조차도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네. 대별산에 모인 무인들은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아.”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어찌 보면 강호가 개판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귀 이후에는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강호 자체는 애증으로 가득했다.
“꿍꿍이가 있었기에 제 뜻을 순순히 따라줬군요.”
“부정하지는 않겠네.”
“그래서 어쩌고 싶은 건데요?”
맹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발목까지 덮은 장포를 걷어낸 후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무림공적이 되어주게.”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맹주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심지어 그 어떤 희열감이나, 불쾌함, 안쓰러움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요?”
“모든 사람의 자네의 입만 바라보며 모여들었어. 자네가 떠난다면 천룡전도 기껏 준비해놓은 걸 허공에 날리지는 않겠지.”
“그럼 그냥 떠나면 될 일, 공적은 무슨 말입니까?”
맹주는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건 조금 전 무림맹 수뇌부에서 천룡전의 주구가 끼어있음을 알게 된 후 생각해낸 것일세. 자네가 그들을 죽여 공적이 된다면 무림의 시선은 온통 자네에게 쏠리겠지. 그 사이 무림맹은 대연무장의 함정을 해결하고, 지금껏 파악한 맹 내의 간자들을 색출할 생긱이네.”
“그래서 제가 얻는 건요?”
이훤의 물음에 맹주는 목소리를 낮췄다.
“천룡전의 위치일지도 모르는 곳.”
“그게 조건입니까?”
맹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 마디를 흘렸다.
“나는 자네에게 부탁을 하는 거야. 거래가 아니라네. 우리가 파악한 장소는 형산일세.”
절명곡의 생존자 중 유일하게 행적이 파악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쇄검(霧鎖劍) 축융노도(祝融老道)다.
“자네가 거절을 한다 해도 좋네. 그렇게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 아이는 수락할 걸세.”
이훤은 이미 제 삼자의 등장을 인지한 후였다.
그렇기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이훤을 바라보며 말했다.
“클클, 그래서 안 할 거냐?”
< 82, 괴마가 될 수 없는 자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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