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18 대 1. (2) >
문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문맥의 흐름을 물은 것이 아니라 가능의 여부를 질문했으리라. 한데 이훤은 배고프면 밥을 먹고, 심심하면 술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함을 외쳤다.
“다 하겠다고?”
물론 열여덟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아니리라.
하지만 개개인이 한 지역의 패주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다. 쉬지 않고 싸우는 건 불가능할 터이니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끝을 기약할 수 없으리라.
이훤은 창밖을 힐끔 살피고는 조급한 어투로 말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어요.”
날이 밝으면 신무대회가 개최된다.
그러니 남은 시간이라고 해봤자 세 시진 정도가 전부였다.
하여 노고수들은 세 시진을 염두에 뒀다.
그러나 이훤의 뒤이은 한 마디에는 경악의 수준을 넘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오리찜이 반 시진 후면 완성될 겁니다.”
“응? 오리찜?”
“오리찜과 이 일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무림맹 내원의 특식으로 유명하잖아요. 술은 준비됐으니 안주만 만들어지면 된다고요. 그러니 빨리 시작합시다.”
최근 내원의 총숙수로 승진한 자가 오리 고기를 잘 다루기는 했다. 하나 오리찜이 특식으로 유명한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당장 일 년만 지나도 오리찜은 수뇌부 몇 명을 제외하면 얻어먹기도 힘든 음식이 된다고!’
이훤은 입맛을 다셨다.
독천무협 이학주는 이훤의 표정을 보고 입매를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농담이나 허장성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오리찜을 기다리는 듯하지 않은가. 이내 그가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하하하하! 내 생애 이처럼 천변만화하는 상황은 겪어본 적이 없다. 좋아. 그 오리찜이 언제부터 특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끝내고 나도 다리 한 점 얻어먹어야겠구먼.”
맹주가 수락을 했고, 이미 시연을 하기로 결정한 상황이 아니던가. 열여덟 명을 연이어 상대할 이훤이 걱정될 뿐 더 이상의 반발은 없었다.
공동파의 장문인은 복마경천객 대인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뽑았다. 검을 뽑는 순간의 기세만 해도 어지간한 이들은 마주하기 힘들 만큼 서늘했다.
“본파의 무공은 복마대검법이 가장 유명하나, 나 스스로를 증명하려면 칠채기검과 금륜호공일 게요. 이건 최소한 이십 년을 수련해야 내세울만한 절세기공이니까!”
그는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으로 실력으로 보여줬다.
칠채기검(七彩氣劍)은 초식을 일곱 종으로 분류한 후 거미줄처럼 얽혀드는 검법이다. 하여 매초식마다 다른 검법을 펼치듯 기세가 달랐다. 오죽 했으면 한 때 공동파의 칠채기검은 마교에서 전해졌다는 낭설이 돌 정도였다.
고오오오오-
칠채기검이 극에 이르는 순간 대인평의 몸에서 희미하게나마 금륜호공(金綸護功)의 상징인 금빛 선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뱀처럼 길게 늘어져 몰을 휘감았고, 저절로 호신갑의 역할을 했다.
“호오! 전대 장문이 펼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지. 삼십 년 만에 다시 보는 금륜호공이로군!”
“허허, 과연 공동의 무학은 오묘하여 정사지간이라고 오해를 살 만해.”
대인평의 말처럼 칠채기검과 금륜호공은 공동파의 제자가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언제 오려는 건가?”
대인평이 기수식을 펼치며 근엄한 어투로 말했다.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비무를 하자고 했는데 아까부터 수련을 하고 있기에······.”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훤의 말에는 다시 한 번 헛웃음과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 마디로 어떤 무공인지도 보지 않고 상대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갑니다!”
이훤은 가볍게 몸을 띄웠다.
무형검만 흩뿌려도 대인평은 궁지에 몰릴 터였다.
하나 지금은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자리였기에 수고스러움을 무릅쓰고 주먹을 내질렀다. 마지못해 뻗은 주먹이지만, 팔황이 덧씌워지는 순간 강맹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흡!”
대인평은 찰나의 순간 검을 비틀어 투로를 막았다.
평소의 이훤이었다면 혈륜을 이용해 그냥 뚫어버리거나, 상대가 반응하기 전 우회했으리라. 하나 비무의 형식을 택했기에 순순히 밀려났고, 이내 재차 양 주먹을 연이어 찔러넣었다.
파파파파파팟!
진위 여부를 위한 비무지만, 누구 한 명 할 것 없이 무인이 아니던가. 만에 하나 이훤을 항복을 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리면 일약 천하제일을 노릴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대인평은 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무공을 펼쳤다.
‘감숙성은 중원의 변경이야. 공동파가 비록 구파에 속했다지만, 실제 권한 미미하지 않던가. 지금은 공동파의 이름을 저들에게 각인시킬 좋은 기회다!’
하나 이십여 초가 흐르는 순간 대인평의 눈동자는 풍랑이 이는 것처럼 흔들렸고, 이내 스스로 물러난 후 검 끝을 내려 공세를 포기했다.
“아직도 더 살펴볼 것이 남았는가?”
이훤은 대인평의 물음에 말없이 손을 모았다.
“후우. 알았네.”
대인평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내비쳤다. 하나 속으로는 이훤과의 공방을 끊임없이 복기하며 성장을 꿈꿨다.
‘내가 닿지 못한다고 해도 후대에는 전해야 한다.’
장문인의 의무란 패배를 슬퍼할 여유도 없이 다음을 생각해야 할 만큼 막중했다.
“다음.”
이훤의 말에 교룡세가의 가주가 나섰다.
이미 청운루에서 안면이 있었기에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후 비무를 시작했다.
채채채채채채채챙!
교룡세가는 장강과 동정호를 주 무대로 삼기에 배 위에서 펼치기에 적합한 무공이다. 실제로도 교룡세가주는 기예에 가까울 만큼 위태로운 자세로 검초를 펼쳤고, 그 여파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터터터터터터텅!
무인들이 저마다 기파를 튕겨낼 때 맹주만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호신강기라도 펼친 것처럼 기파가 저절로 빗겨나갔기 때문이다.
“그만 해도 될 것 같네요.”
교룡세가주의 표정은 대인평과 비슷했다.
짧은 순간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흠뻑 젖은 그와 달리 이훤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후훗, 그래도 살짝 미간을 좁힌 것으로 보아 공동파보다는 위력적이었나보군.’
하나 악마와 묘마는 이훤의 속내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대형, 인상 쓴다.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져서 짜증난 것 같은데?]
[제아무리 대형이라고 해도 생소한 무공의 진위를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묘마가 슬쩍 이훤의 눈치를 살폈다.
[나도 좀 낄까 하는데?]
[사실 나도 그 생각을 하기는 했다.]
악마 또한 엉덩이가 근질거리기는 매한가지였던 상황이다.
“크흠, 천룡전의 주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슨 작당질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가 운을 떼자, 견원지간처럼 다투던 묘마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러니 여러 선배들이 괜찮으시다면 우리도 돕겠습니다.”
한참 어린 녀석들에게 선배 소리하는 건 배알이 꼴렸지만, 그냥 앉아서 구경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당연히 이훤은 반색했다.
“그렇지! 어차피 저 녀석들도 신마의 심득을 여러 개 익혔으니 자연지기의 흐름이 어긋난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을 거야.”
“어허! 관주! 관주가 나선 것 또한 실상 경악할만한 일이외다. 한데 관주의 의제들까지 내보낸다는 건 우리에게 수치를 주려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묘마와 악마가 숨겨뒀던 진짜 실력을 내비쳤다. 한순간 대전 전체에 묘마의 무형진기가 휘몰아치니 노고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악마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저들이 오기 전부터 맹주전 내부의 법보와 역법보를 확인한 후였다. 몸뚱이에 십전진뇌공을 새겼고, 장소마저 파악을 끝냈으니 맹주라고 해도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거 강호의 서열을 정하는 거 아니에요. 노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이훤은 오리찜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만큼 강경함을 버리지 않았다.
“괴마라고 해서 모두 강하지 않아요. 하나 저 둘은······.”
배분으로 따지면 두 단계 이상이고, 너희들의 사부가 굽실거리던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편할 터였다.
하나 그럴 수 없기에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보증합니다.”
이훤은 멀뚱히 서 있는 전마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색마와 탈마를 찾아 봐. 색마는 하오문의 동향을 살피면 행적이 나올 것이고, 탈마는 그냥 불러 봐. 근처에 있으면 알아서 올 거다.]
천룡전에 대한 방비는 순탄하게 진행 중이다.
하나 그들에게 납치됐을 검후와 한마의 행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어도 눈치만 봐야 할 전마를 내보내는 김에 일처리를 맡겼다.
[네!]
그녀마저 맹주전 밖으로 나서니 더 이상 눈치를 볼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주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화산연맹주과 종남파, 산동악가와 남궁세가는 처음부터 이훤의 뜻을 따랐지만, 공동파와 교룡세가마저 은근슬쩍 숟가락은 얹었다. 어차피 자신들은 끝이 났으니 수치심 따위야 알 바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하세.”
맹주마저 결정을 내리니 대전 내에는 세 개의 공간이 만들어졌고, 동시다발적으로 비무가 시작됐다.
“헙! 방금 그것이 무엇인가? 마치 내 초식을 읽고 있는 듯하군. 혹시 청우선사라는 분을 알고 있는가?”
악마의 법보와 역법보는 존재하는 모든 변수를 차단하는 것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게 공방의 투로가 막혀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그 녀석. 크흠! 여기서 그 녀석이란 청우선사라는 분을 뵐 때 함께 있었던 친우를 말하는 것으로······.”
악마가 구차하게 변명을 했지만, 이미 그의 실력은 검증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격하게! 지금 여자라고 무시 하냐? 제대로 펼치지 않으면 팔을 잘라버릴 거야!”
묘마의 일갈에 상대방은 이를 악 물고 덤벼들었다.
손녀 뻘인 여아에게 욕을 먹는다는 수치심보다 완벽에 가까운 무공을 접한다는 압박감에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무형진기뿐 아니라 검도창을 두루 사용하며 상대를 짓눌렀다. 심지어 그녀는 천하제일세가이자, 검중제일가인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가 아니던가. 강호에 유명한 무공에 대한 견식이 넓었고, 무형진기를 이점으로 삼아 자연지기의 흐름을 엿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화려한 건 악마였지만, 상대가 느끼는 패배감은 묘마 쪽이 위였다.
이훤은 문상과 무상을 동시에 상대했다.
문상의 천풍와류공(天風渦流功)은 선법을 극한까지 발달시킨 절예였다. 무상의 철혼도(鐵魂刀)는 도제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도법의 끝을 연상케 했다.
하나 그래서 더 쉬웠다.
이 정도 극한까지 단련한 사람들을 흉내낸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첫 수를 보자마자 진짜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압!”
이훤은 평소와 달리 기합을 내지르며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어갔다. 그 순간 한쪽은 혈륜이 대붕의 날개처럼 펄럭였고, 다른 쪽은 신장이 금빛 창으로 대지를 꿰뚫듯 번뜩였다.
단 일합이었다.
문상은 부채를 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경련으로 인해 부채를 놓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무상의 상태도 조금 더 심각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호흡에 탁기(濁氣)가 어린 것으로 보아 약간의 내상을 입은 듯했다.
“길어질 듯해서 조금 무리를 했어요. 죄송합니다.”
결국 오리찜에 밀렸다는 뜻이다.
하나 문상과 무상은 말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단 한 번의 부딪침이었지만, 절대지경의 고수답게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후우, 오래 기다렸다네!”
맹주가 뜨끈한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이훤이 느낀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자신을 짓누를 듯한 이런 기운이 얼마만이던가.
기분 좋은 만큼 혈륜을 끌어냈다.
그그그그그그그극-
독천무협 이학주의 미소가 한순간 사라졌다.
“크흠,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바른 후학은 아니로군.”
반면 이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맹주께서 우리 편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표정을 보아하니 괴마로 영입이라도 하고 싶은 듯한데 말이야.”
“그 자리부터 버리고 오시면 생각해보지요.”
이학주는 피식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자네의 오리찜을 빨리 먹어보고 싶기는 해. 하나 이곳에서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듯하군.”
이훤은 대전 내부를 둘러본 후 수긍했다.
“그건 그러네요.”
대전에 모여 있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느 순간부터 가부좌를 튼 채 상념에 잠긴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절대지경에 근접했거나, 이미 올라선 고수가 아니던가. 그들의 무공을 눈앞에서 보았고, 천하제일인이나 마찬가지인 자와 무공을 섞었다. 그러니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에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지 못할 만큼 모자란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정파의 기세가 한층 더 강세를 떨치겠군요.”
“클클, 이 또한 자네의 덕분이라고 해야겠군. 그럼 뒤뜰로 갈까?”
하나 이훤은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 순간 그를 중심으로 붉은 장막이 안개처럼 흩뿌려졌다.
맹주는 등허리가 서늘해짐을 느끼며 인지했다.
이훤이 공간 전체를 장악하여 외부와 단절됐음을 말이다.
맹주는 헛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오리찜은 원하는 만큼 줄 테니 적당히 손만 섞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 81, 18 대 1.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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