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00화 (200/226)

< 80, 무공 좀 봅시다. (2) >

무림은 일견 자유분방해보이지만, 몇 가지 금기(禁忌)가 존재했다. 존장을 공경하고, 스승을 아비처럼 여기는 것이야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할 도리였다. 대부분의 금기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지켜야 할 행위인 셈이다. 하지만 금기 중에서도 무림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존재했다.

바로 타인의 무공을 훔쳐보는 행위였다.

강호인에게 무공이란 가족보다 우선시되는 영혼과 같았다.

그렇기에 명문일수록 사람을 가려 뽑고, 그 중에서도 선택받은 이에게 비전을 전했다. 하여 타인의 수련을 허락 없이 훔쳐보는 자는 죽여도 좋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내가 지금 잘못들은 건가?”

맹주는 전마의 장난이라고 여겼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정파 무림의 핵심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구파오가는 물론이고, 오랜 세월 정파를 위해 헌신한 맹의 수뇌부가 아니던가. 한데 그들에게 진신무공을 보여 달라니 코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건 취마의 요구입니다. 거절하실 분은 돌아가셔도 좋아요. 요구에 응하신 분에게만 심득을 공개하겠다고 했으니까요.”

맹주를 비롯한 노고수들이 서로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취선관주가 그런 요구를 했을 리 없지 않은가. 관주의 언행이 정사지간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강호의 금기를 모르지 않을 터, 이 무슨 무례한 요구인가?”

입구 쪽에서 누군가 대꾸했다.

악마가 입구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사실이오.”

“그건 그대들의 말일 뿐 취선관주를 봐야겠네!”

“오고 있소.”

누군가 코웃음을 쳤다.

“믿을 수 없는 소리만 계속 하는군. 애초에 취선관주는 제갈세가가 붕괴될 때 함께 묻혔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네들이 곧 올 거라고 하니까 믿고는 있으나,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동감이야. 아닌 말로 신무대회는 이미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취선관주가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무림맹은 조롱거리로 전락할 것이야. 이미 화산연맹에 시기를 양보했을 때부터 말이 많았어. 그걸 억누른 게 신마의 심득을 공개하겠다고 했기 때문일세.”

하나 모든 수뇌부가 이훤에 대하여 성토를 벌인 것은 아니다. 산동악가의 가주와 종남파의 장문인을 비롯한 몇몇은 괴마들을 감쌌다.

“저들이 정사지간처럼 보이나, 허언을 한 적은 없소. 이처럼 무례한 일을 벌였다면 응당 이유가 있을 터, 그것부터확인하는 것이 맞지 않겠소?”

“종남파의 장문인은 취선관주의 수하라도 된 것이오?”

“허허, 무슨 그런 말을! 어차피 화산연맹에 속한 한가족일 뿐이외다.”

맹주는 여전히 침묵했다.

간혹 악마를 곁눈질하는 것으로 보아 무공 수준을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 전마의 어깨를 감싸며 등장한 여인이 있었다.

전마의 아름다움이 갓 피어난 꽃과 같다면 묘마의 아름다움은 위화감이 들만큼 묘했다. 호감과 거부감이 동시에 일어날 만큼 낯선 기세였다.

“대형이 곧 올 거야. 그리고 이 아이가 말을 잘못 했는데 무공을 지금 보일 필요는 없어. 잠시 후 대형이 오면 모든 게 해결될 테니 너희들끼리 친목도모나 하고 있어.”

공동파의 장문인이 인상을 썼다.

“묘마라고 했던가? 우리는 정파의 위명을 떠받들며 오랜 세월 헌신해왔다. 한데 신마의 심득으로 고강한 무위를 익혔다고 장유유서의 도리마저 잊은 겐가?”

묘마의 입매가 학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실룩였다.

‘내가 네 사부의 목숨을 구해준 것만 세 번이다. 집에 가면 녀석이 보은하겠다고 건네준 공동파의 신물도 있어! 우리가 어! 목욕도 같이 하고, 술도 같이 마시고, 여자도 같이 꼬셨는데······.’

이런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악마의 예를 받들어 새 삶을 살고자 마음먹지 않았던가. 결국 그녀는 공동파의 장문인을 향해 슬쩍 목례를 하며 말을 건넸다.

“미안하오. 어쨌든 대형이 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공동파의 장문인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융중산에 묻힌 사람이 올 수나 있겠는가?”

그 때 침묵하던 맹주가 만류하며 나섰다.

“취선관주는 언제 오는가?”

전마는 창밖의 달을 슬쩍 살핀 후 침음을 흘렸다.

“흐음, 이상하네요.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묘마는 입구 쪽을 지키던 악마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 인간이 설마?]

[술 마시러 간 건가?]

동족 혐오에 가까울 만큼 티격태격하는 사이였지만, 이훤에 대한 평가는 대동소이였다.

*

이훤은 느긋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대별산으로 곧장 올라간다면 벌써 도착했을 시간이다. 하나 그는 생각을 정리할 겸 산을 빙 둘러 천천히 올라가는 중이다.

‘교룡세가주가 아주 좋은 단서를 줬어.’

현재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호기심은 소천기 제갈삭이 꾸몄을 음모였다. 제갈세가를 통으로 미끼 삼아 이훤을 산속에 묻어버리지 않았던가. 최소한 십 년 이상 계획된 음모였다. 그러니 무림맹 내에 어떤 놈들이 숨어들었을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한데 교룡세가주의 말을 떠올리니 어느 정도 답을 찾은 듯했다.

- 다음부터는 진면목을 보여주시오. 이렇게 얼굴을 바꾸고 시험을 한다면 편히 살지 못할 것 같소.

그 말대로였다.

이훤이 얼굴을 바꿨듯 그들도 얼굴을 바꿨으리라.

하여 일단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야 했다.

그 방법을 교룡세가주가 제시한 셈이다.

‘무림맹과 구파오가의 핵심이라면 천하에 널리 알려진 무공을 익히고 있지. 그리고 저들끼리 어린 시절부터 교류하면서 무공 수준을 가늠했을 거야.’

해서 전마를 통해 그들을 모아놓은 게다.

이훤이 그들의 진신무공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닌 말로 강림혼요술이나 역체변형이라고 해도 고유의 무공까지 흉내내는 건 불가능했다.

‘내공이야 영약으로 해결한다지만, 아닌 말로 무림맹주의 무공을 누가 흉내 낼 건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고견이었다.

이훤은 이미 판을 깔아놨음에도 성급하지 않았다.

전마의 일을 해결했고, 천룡전을 상대할 방법도 모색한 후였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의 일을 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나다를까 불야성을 이루던 시전에서 벗어나 들판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저기서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냐?”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아니나다를가 배후에서 횃불이 솟아올랐다.

옥화산장주 호구봉이다.

이훤은 그가 올 것을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 이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열다섯 명의 적은 개개인이 절세고수였다. 하나 그 중에서 호정청은 가장 약했다. 당시 놈의 행적을 보면 욕심은 대해처럼 넓고, 작은 원한에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하여 강호인들은 그를 가리켜 혈해잔소(血海殘簫)라 칭했다.

‘그런 새끼의 아비가 이런 일을 당하고 그냥 돌아갔을 리 없지.’

만에 하나 그냥 돌아갔다면 살려두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다섯 명의 생사대적 중 호정청이 가장 하찮았고, 이미 가장 잔인하게 죽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은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청하러 왔다.

그러니 더더욱 마음 편히 죽일 수 있으리라.

한데 호구봉은 이훤의 속내는 짐작조차 못한 채 청운루에서와 달리 한껏 입꼬리를 올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호정천이 불길을 쏟아낼 것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죽어서 묻히기에 딱 좋은 곳으로 왔구나.”

“설마 복수를 하겠다고 온 건가?”

호구봉은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지금껏 옥화산장은 포양호 일대는 물론이고, 강서성 근처에서 한 번도 무시를 받은 적이 없다. 내가 무림맹에 나타나면 최소한 문상이 마중을 나왔을 정도였지. 한데 너같은 놈에게 모욕을 당했으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느냐?”

이훤은 콧방귀를 뀌었다.

“거짓말하네.”

“무슨 소리냐?”

“복수는 개뿔! 신마의 심득을 독차지 하고 싶어서 내 뒤를 밟았잖아. 아! 복수는 겸사겸사인가?”

호구봉은 입꼬리를 올렸다.

“흥! 자격이 없는 자가 지닌 보물이야 말로 화근이지. 네 놈이 운 좋게 신마의 심득을 익혀 고강한 무위를 익혔다고 해도 오늘 밤을 넘길 수는 없을 게다.”

그가 손짓을 하는 순간 들판 주변에 수백 개의 횃불이 솟아올랐다. 옥화산장의 무인은 수십 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각양각색의 무복을 걸친 자들이다.

그들의 면면만 보아도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 정사지간의 괴인이거나, 사마외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훤은 신무대회에서 신마의 다른 심득을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인즉슨 정파인이 아닌 사마외도라면 참석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한데 만매만전과 달리 이번 심득은 외부로 공표하겠다는 선언이 없었다. 그러니 콩고물을 기대하고 몰려들었던 사마외도는 대별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노렸다. 옥화산장주가 이훤의 등장을 알리자, 사마외도는 개떼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네 놈이 사마외도와 심득을 나눌 리 없지.’

그러려고 했다면 차라리 신무대회에 참석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결국 옥화산장주는 이훤을 죽인 후 심득을 독차지할 자신이 있었기에 나선 셈이다.

하나 이훤은 그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회귀 전 호정청이 자신을 습격했을 때 써먹었던 방법을 이번에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이훤은 히죽 웃으며 외쳤다.

“다 죽이고 눈 한 번 깜빡이면 기억도 안날 것들만 골라서 잘도 모아왔구나.”

호구봉은 길게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놈의 팔다리를 자릅시다!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하면 심득을 토해낼 것이오!”

이미 사마외도는 숨을 헐떡이면서 욕망과 살기로 점철된 눈동자를 번들거린지 오래였다. 호구봉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백 여 명의 사마외도가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이훤은 검은 물결처럼 밀려오는 적을 보며 혀를 찼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니 죽어도 누구를 원망하겠냐?”

“놈! 고루굉마께서 네 놈의 팔을 친히 잘라주겠다!”

이름까지 외치며 멋들어지게 내리꽂히려던 괴노인은 허공에서 다섯 조각으로 잘린 채 흩뿌려졌다. 선두에서 몰려오던 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나 뒤에서 밀어붙이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이훤은 살심이 동한 상태였다.

“그냥도 죽이려고 했는데 악당이라면 더 잘 됐지!”

이훤은 혈륜을 끌어올리며 양 팔을 뻗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혈륜과 무극이 낫처럼 허공을 베며 교차했다. 그 순간 무형진기는 낫에서 튕겨나간 무형의 강기가 되어 반달의 형태로 전방을 휩쓸었다.

촤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락!

걸리는 건 모조리 잘렸다.

절정의 무인도 초절정의 무인도 둘로 나뉘었다.

병장기나 호신갑은 무용지물이다.

십여 장을 뻗어나간 무형진기로 인해 백여 명이 죽었다.

뒤늦게 누군가 찢어져라 비명을 외쳤다.

하나 이훤은 이미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양 어깨를 뒤로 하는 순간 어깻죽지가 닿을 만큼 팽팽하게 밀려났고, 다시 한 번 양 팔이 교차하는 순간 붉은 기운이 업화처럼 대지에 내리꽂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이훤을 널뛰기를 하듯 껑충 껑충 뛰었다.

그가 뛸 때마다 방향을 가리지 않고 강기가 튕겨나갔다.

“으앆!”

“살려줘!”

하나 강기는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애초에 아군이 없기에 마음 편히 사방으로 흩뿌렸다.

이훤은 그렇게 쑥대밭을 만들어놓은 후 호구봉 앞에 섰다.

“어, 어!”

그래도 옥화산장의 장주라는 자가 이훤의 진면목도 모른 채 날뛰는 꼴이 우습기만 했다. 이훤이 일부러 시간을 내주자, 호구봉은 황급히 소매를 걷어올리더니 이훤을 향해 암기를 발출했다.

무무력진통(霧無力盡筒)이라는 암기였다.

호구봉은 전방으로 희뿌연 연기가 흩뿌려지는 순간 크게 웃었다.

“크하하! 방심했구나. 놈! 이건 일반적인 산공독과 다르다. 근육 자체를 녹여버리기에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해도 견딜 수 없을 것이야!”

비슷하기는 했다.

회귀 전 이훤은 호정청을 죽이려고 했을 때 이미 무무력진통을 맞았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팔 성에 이르렀음에도 한순간 정신이 혼미했을 정도였다. 금방 놈의 사지를 찢어발겼지만, 무무력진통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하나 무림맹의 맹주라고 해도 이걸 맞으면 당장 해독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하나 이훤의 성취는 이제 십일 성이다.

그 말인즉슨 만독불침에 이르렀고, 무무력진통처럼 상고의 암기라고 해도 무용이라는 의미였다.

이훤이 손을 휘돌리는 순간 사방으로 퍼져나가려던 안개가 한데 뭉쳐들었다. 그리고 이훤은 민들레 홀씨를 불 듯 가볍게 숨을 흘렸다.

후-

무무력진통이 호구봉과 호정청을 덮쳤고, 두 사람은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몸이 마비되고, 근육이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우리라. 하나 입을 열리지 않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어이차!”

이훤은 두 사람의 발을 잡은 후 휘휘 돌려서 시체더미 한복판으로 내던졌다.

“옥화산장은 차후에 쓸 만한 놈을 보내서 잘 써줄게.”

콰직!

팔황과 무극이 땅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훤이 혈륜을 극한까지 끄집어낸 후 흩뿌리는 순간 대지가 비명을 지르듯 요동을 쳤다. 그리고 그가 양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들판 전체가 뒤집어지며 두 사람과 수백 구의 시체를 먹어치웠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이훤은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크큭!”

이제 고금을 통틀어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차례였다. 무림맹주와 구파오가의 주인들이 자신 앞에서 무공 시연을 할 광경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크하하하하!”

< 80, 무공 좀 봅시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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