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99화 (199/226)

< 80, 무공 좀 봅시다. >

80, 무공 좀 봅시다.

이훤은 강림혼요술을 거뒀다.

스스로 명분을 자처하는 순간 혁련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아직 섭혼의 경지는 택도 없군.’

그저 얼굴만 바꾼 상태였다.

혁련광은 팔짱을 풀고, 양 손을 들었다.

용조(龍爪)처럼 벌린 손가락 사이로 청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교룡세가의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장룡청린수(長龍靑鱗手)였다. 조공을 펼칠 때마다 용의 비늘이 공간을 점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광오하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말이군.”

솨아아아-

“그만큼 본가와 나를 우습게 여긴다는 의미겠지.”

이훤은 대답 대신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것은 혁련광이 지닌 조롱박 같은 인내심을 휘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죽어라!”

양 팔을 벌린 채 달려들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엄청난 존재감과 함께 청광이 번뜩이며 주변을 휘감았다. 이제 혁련광이 공간을 긁을 때마다 흩뿌려진 청광이 휘몰아치며 이훤을 압박할 터였다.

하나 이훤은 앉은 자리에서 양 손을 과장되게 떨쳐냈다.

‘무형진기를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 순간 허공에서 대기하던 무형진기가 검의 형태로 번뜩였다. 혁련광으로서는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 갑작스럽게 하나하나가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기파가 생성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헙!”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무형검을 향해 빠르게 양 손을 휘돌렸다. 하나 소리도, 흔적도, 형태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도 막지 못했고, 마치 유령처럼 자신의 몸을 관통하여 꽂혀들 것임을 말이다. 그저 끝까지 눈을 감지 않는 것이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다.

하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술 같아?”

혁련광은 침음을 흘렸다.

사술처럼 보였고, 사술인 게 당연했다.

하나 그렇게 말 할 수 없었다.

치기 어린 후기지수들이야 생소한 것을 보면 배척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나 강호의 노회한 고수인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식견과 견문이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정과 달리 이성은 결정을 내렸다.

‘단지 오만하거나, 미친 자가 아니다.’

구파오가의 수준을 벗어난 신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취선관주시오?”

솨아아아-

이훤을 감싸고 있던 강림혼요술의 기운이 사라졌다.

그리고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맞아.”

혁련광의 굳은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갑작스런 패배는 뼈아팠지만, 당대 천하제일이라고 손꼽히는 취선관주라면 한 가닥 자존심은 챙길 수 있으리 여긴 듯했다.

“저 아이가 다소 성정이 편협하기는 하나, 고인을 몰라볼 정도는 아니외다. 한데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신 게요?”

혁련광이 여유롭게 미소를 띄운 것과 달리 이훤은 도리어 표정을 굳혔다.

“이유가 필요한가?”

한 치의 배려도 느낄 수 없는 오만한 한 마디.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혁련광의 숨소리가 조금은 거칠어졌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강호의 일에 매순간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지요. 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훤의 턱짓에 예영영이 나섰다.

“청도대상단의 예영영입니다.”

혁련광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아들이 수천 리 밖 청도대상단의 여식과 만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훤은 어째서 청도대상단의 여식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을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전마에요.”

혁련광은 침음을 흘렸다.

당금 강호에 취선관주는 취마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여러 명의 괴마들과 어울린다고 들었다. 그리고 예영영의 말이 이어질수록 똥을 씹은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한 마디로 만만하게 보고 먹어치우려다가 탈이 낫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멍청한 놈! 하려면 제대로나 할 것이지.’

그 때 한 박자 늦게 옥화산장의 장주가 나타났다.

그는 이훤의 발 아래 깔린 아들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정청아!”

하나 그를 막아선 건 이훤이 아니라 혁련광이었다.

그는 옥화산장주 호구봉의 소매를 낚아챘고, 동시에 발을 막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진정하시오. 취선관주요.”

옥화산장주의 노기는 여전했으나, 조금 전처럼 달려들 수 없었다. 장강 이남은 강호의 변경이라 할 수 있기에 강북에 대한 정보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최근 그가 접한 특급 정보 중 팔 할 이상이 이훤의 행적과 일화였다.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자였고, 설령 가까워진다면 고개를 숙인 채 마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을 냈다. 한 마디로 소나기 같은 존재이니 무조건 피하는 것이 낫다는 정보단체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래를 하기로 했소!”

이훤이 웃으며 말하자, 혁련풍이 발악을 하듯 외쳤다.

“아버지! 개소립니다.”

“닥쳐라! 이 놈. 거래라니요?”

장강에 대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혁련광은 물론이고, 함께 온 이들까지 표정을 굳혔다.

“그걸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 여기시오?”

이훤은 혁련광의 뜨거운 눈빛을 가볍게 받아넘긴 후 말했다.

“받아들이라고 한 적 없는데.”

“무슨 뜻이오?”

“내가 하겠다면 하는 거야. 아까 들었잖아. 내가 곧 명분이고, 괴마는 상식을 신경쓰지 않아.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우리의 상식이지.”

혁련광은 이훤의 단호한 한 마디에 예영영으로 칼끝을 돌렸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나 전마임을 받아들인 예영영은 거침이 없었다.

“그건 그쪽이 신경써주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 배려는 잊지 않도록 하지요.”

이미 사건의 시작은 호정천이었고, 혁련풍은 방조했다. 개심의 여지가 충분했고, 이 정도까지 끌고올 문제는 아닐 터였다.

하나 이훤이 개입하는 순간 문제가 되었다.

“강호인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게요.”

전마가 대신 깔깔 웃으며 대꾸했다.

“개미굴을 파헤치고, 화청궁을 불태웠으며 구파오가 중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곳을 뒤집어엎은 사람이에요. 강호인들이 가만 있을까요? 들고 일어날까요?”

이훤은 전마의 명쾌한 해설에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다. 누군가는 정파의 대협으로서 천하제일인이라 추앙했고, 누군가는 사마외도나 다름 없다면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나 특이하게도 이훤을 공적으로 삼거나, 음해하는 자를 찾기 어려웠다.

만매만전(萬梅萬傳).

그것이 이훤의 언행을 어느 것이든 정당하게 만들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만매만전을 익혔고, 신무대회에서 공표할 또 다른 신마의 심득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누가 이훤을 욕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 자리에 있는 혁련광과 옥화산장주 역시 만매만전을 정독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뤘고, 절세신공을 공표한 이훤을 비웃었다.

한데 그것이 이렇게 돌아와 목을 죌 줄은 몰랐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련광은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였다면 오히려 기회로 삼아 이훤과 친분을 다졌을 터였다. 하나 장강의 물길을 열어줬다는 소문이 퍼지면 교룡세가의 반석 같은 위세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여 인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화산에 관주의 처소가 있다고 들었소. 지금껏 화산파는 오랫 동안 정파의 태두로서 협의와 인예를 설파하며 강호인들을 이끌었소이다. 그곳에 터를 잡은 당신이 이런 일을 벌인다면 화산의 명색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이훤은 혀를 차며 술 잔을 비웠다.

“일단 화산파가 병신 같이 몰락했을 때 모르쇠로 일관했던 새끼가 이제 와서 어쩌고 하는 꼴에 배알이 꼴린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는 정파인이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거든. 그러니 거래가 끝날 때까지는 참겠어.”

쿠쿠쿠쿠쿠쿠쿵-

하나 참겠다는 말과 달리 청운루 전체가 요동을 쳤다.

“어! 어! 기둥이 뽑힌다!”

“지진인가? 청운루 전체가 솟구치고 있어.”

혁련광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수하들의 말대로라면 이훤은 지금 청운루 전체를 띄워 올리려고 하는 셈이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멈춰야 했다. 아닌 말로 띄웠다가 추락한다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화산연맹, 그리고 옛 화산파. 그들 모두 화산에 기대어 살던 이들이다. 그들이 어찌 살았건 그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건 화산의 존재다. 아닌 말로 언제부터 장강이 네 것이었더냐? 내가 교룡세가를 가루로 만들고, 내 것으로 삼으면 사람들이 싫어할까?”

혁련광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만약 이훤이 장강에 터를 잡는다면 대부분의 무인들은 반길 것이다. 이훤이 돌아다니지 않는다면 사고를 치지 않을 것이고, 향후 신마의 심득을 전해 받을 때에도 편리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진동이 멈췄다.

이훤은 술잔을 비운 후 한 마디를 건넸다.

“거래는 그대가 오기 전에 성사됐다. 부정하는가?”

혁련광은 수치심으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신 부탁이 있소.”

조건 대신 부탁을 거론한 건 주효했다.

이훤은 애초에 나쁜 사람이 아니지 않던가.

“이 일을 비밀리에 부쳤으면 좋겠구려. 본가의 마지막 자존심만은 남겨주시오.”

“수하들을 통제할 수 있겠어?”

“최선을 다해보리다.”

“후후, 내 말을 믿지 않았군.”

혁련광은 눈을 끔뻑였다.

이훤은 턱짓으로 혁련광의 수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막을 펼쳐놔서 우리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수하들은 신경 쓰지 말고,  그 울상이나 어떻게 하지?”

혁련광은 헛웃음을 지었다.

무형검도 문제였지만, 기막을 펼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아닌 말로 절세고수를 마주한 강호초출이 된 것처럼 의욕이 사라졌다.

“그렇구려. 관주, 그럼 우리의 관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여겨도 되겠소?”

“득도 실도 사라지고, 거래를 했으니 웃으면서 헤어지면 되지 않겠어?”

“그럽시다. 다음부터는 진면목을 보여주시오. 이렇게 얼굴을 바꾸고 시험을 한다면 편히 살지 못할 것 같소.”

혁련광의 너스레에 이훤은 잠시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군. 알았어. 뒷일은 실무자들에게 맡기자고.”

이훤이 고개를 끄덕이자, 혁련광이 먼저 포권을 했다.

그리고 아들을 부축하며 자리를 떴다.

옥화산장주는 자신의 아들과 이훤의 발을 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새끼가 제일 악질이니까 십 년 간 폐관. 어때?”

“십, 십 년이요?”

“아직까지 괴마를 건드리고 살아 있는 놈이 없어. 좋은 날이잖아. 불만인가?”

이훤의 으름장에 옥화산장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합시다.”

그는 반쯤 넋이 나간 호정청을 데리고 떠났다.

“십 년은커녕 하루나 할까 몰라요.”

“알게 뭐야. 어쨌든 집밖으로는 안 나오겠지.”

예영영은 잠시 이훤을 바라보다가 폭소를 터트렸다.

속이 이처럼 뻥 뚫린 경험은 생전 처음이다.

“가시죠. 악마와 묘마가 맹에 있어요. 제가 오늘은 거하게 살 게요!”

하나 이훤은 턱을 매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뭔데요?”

“혁련광 때문에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무림맹 수뇌부에서 가짜를 골라내는 방법이야. 그러니 네가 힘 좀 써줘야겠다.”

전마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다가 히죽 웃었다.

“재밌겠네요.”

그 날 밤 무림맹 수뇌부 한정으로 통문이 돌았다.

괴마의 이름으로 보내진 서찰이며 신마의 심득을 선 공개하겠으니 당장 모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맹주의 처소는 늦은 밤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 모이셨나요?”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가 누구였더라?”

전마는 평소였다면 하늘처럼 우러러봤을 맹주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지요. 일단 여기 계신 분들의 무공 좀 봐야겠어요. 자! 보여주세요.”

< 80, 무공 좀 봅시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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