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괴마는 상식을 파괴한다. (2) >
낯선 이의 등장은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천수방의 소방주는 잠시 멈칫거렸고, 장도파의 후계자가 돕기 위해 슬쩍 몸을 일으켰다.
하나 이훤과 예영영은 혁련풍의 일행을 잊은 것처럼 반갑게 대화를 이어갔다.
“어머! 황보 오라버니.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네요. 알았다면 제가 먼저 찾아갔을 텐데요.”
예영영은 이훤의 등장으로 인해 평정심을 되찾은 후였다.
그녀의 손짓과 호흡, 눈을 가늘게 뜨는 범위와 입꼬리의 각도가 어우러지며 미모를 발산했다. 삼화라 불렸을 만큼 화사한 미모에 주변인들이 힐끔거렸다.
이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전음에는 짜증이 느껴질 정도로 시큰둥했다.
[똥 쌌냐?]
[제가 얼굴 이야기 했다고 삐치신 거예요? 저는 여자 이전에 상인으로 길러졌다고요. 상대의 호의를 이끌기 위해서는 이 정도 미모는 발산해줘야지요.]
예영영의 전음에 이훤은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청도대상단과 내가 남이 아니거늘 누가 먼저 찾아오면 어때?”
“호호, 그것도 그러네요.”
이훤의 연기에 예영영은 능숙하게 받아쳤다.
하나 들려온 이훤의 전음에 한순간 오랜 수련의 결과가 물거품이 될 뻔했다.
[아까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 거리기에 이제는 아예 싼 줄 알았지.]
[이 정도로 배척받을 지도 몰랐고, 저 새끼의 음흉한 속셈도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상인은 어디에서든 이 정도의 무시와 괄시는 받을 수밖에 없어요. 아쉬운 건 내 쪽이니까.]
예영영 또한 속내와 달리 빙긋 웃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소매로 입을 가리더니 눈웃음을 쳤다.
혁련풍의 정혼자인 서우련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이내 소리를 질렀다.
“저 버릇없는 년을 그냥 둘 거예요?”
천수방의 소방주는 이훤을 경계하며 예영영에게 제안을 했다.
“지인과의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게 좋을 거요.”
이대로 가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하, 영영의 친구면 나도 끼어야지.”
이훤이 먼저 슬그머니 한 자리를 차지했다.
[뭐하시려고요?]
[제법 괴마다운 언행이었지만, 부족해.]
[아니, 그럼 길 열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아쉬운 건 우리라고요.]
[상인은 그래도 되지만, 괴마는 그러면 안 돼.]
예영영은 어깨를 으쓱거린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호정청은 이훤의 막무가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예영영을 겁박하기 위해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만 잘 되면 그와 혁련풍은 엄청난 거금을 오랫동안 뽑아 먹을 수 있는 물주를 잡게 되는 셈이다.
“예 소저, 강호의 일은 강호의 법도대로 해결되는 법. 정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아요. 불합리하다고 여겨지고, 손해 볼 것처럼 보여도 납득해야 하는 시점이 있는 거지요. 이번 일이 설령 잘못되더라도 예 소저가 우리에게 보인 호의는 잊지 않을 겁니다.”
예영영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아꼈다.
이번 일을 이훤에게 맡긴 게다.
‘어디 괴마의 방식이라는 게 뭔지 구경해 볼게요.’
이훤은 탁자에 차려진 술을 마시다가 미간을 좁혔다.
“아! 무슨 계약이라도 하고 있었나?”
예영영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훤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훤은 꼬치를 먹어치운 후 나뭇가지로 이빨을 쑤셨다. 그리고 제법 큰 덩어리를 건져내더니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좋지.”
예영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고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하자고. 그쪽도 동의하는 건가?”
혁련풍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예 소저, 저 분의 말이 무슨 뜻인가요?”
예영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보 오라버니의 말처럼 될 거예요.”
호정청은 미소를 짓더니 품에서 꺼낸 계약서를 내밀었다.
아예 이번 일을 계획했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훤은 계약서를 보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무슨 짓이야?”
“이런 건 필요 없지. 강호의 법도대로 말을 했으면 지키는 거야. 자! 계약을 해보자고. 청도대상단은 언제나 장강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교룡세가를 비롯한 속가에서 성의를 보인다. 또 뭐가 있을까? 아! 그래, 상행으로 인해 피곤할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어때?”
쾅!
호정천이 탁자를 후려치며 일어났다.
“너! 뭐하는 새끼야? 지금 이게 장난 같으냐?”
천수방의 소방주와 장도파의 후계자가 벌떡 일어나 이훤에게 다가오려 했다. 하나 그들은 채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두 사람 모두 오른발 무릎에서 피가 솟구쳤다.
“으으, 내 다리.”
이훤은 나뭇가지로 박자를 맞추듯 탁자를 건드리며 호정천을 올려다봤다.
“앉아. 거래 중이잖아.
지금까지와 달리 서늘한 목소리에 호정천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불합리하다고 여겨지고, 손해 볼 것처럼 보여도 납득해야 하는 시점이 있다며? 그게 지금이다.”
“우리가 누군지나 알고 하는 짓이냐?”
이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번 일을 통해 교룡세가와 옥화산장이 보인 호의는 잊지 않으마.”
혁련풍은 뒤늦게 이훤을 주목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상대가 나뭇가지를 흔들 때마다 두터운 탁자가 두부처럼 으깨졌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치 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않은가.
“호!”
그는 호정청에게 경고를 하려 했지만, 이미 이훤을 향해 달려든 후였다. 그리고 기세 좋게 달려든 것과 달리 저 혼자 꼬꾸라진 후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끄어어어어.”
이훤은 호정천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린 채 예영영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사정하지 않는다. 물건을 판다고?”
“······.”
“그럼 강매를 해라. 상대의 사정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우리는 그걸 위해 모인 거다.”
예영영은 말을 아꼈다.
이훤은 상인과 괴마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줬고, 선택지를 보여줬다. 이제 그녀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이훤은 개의치 않으리라. 이런 제안 또한 그녀가 어찌됐든 전마라고 불렸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뭔가 팔고 싶다면 강매(强賣)를 하라니.
하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그 사이 혁련풍이 나직이 한 마디를 건넸다.
“황보면 산동의 황보세가 출신인가? 교룡세가를 우습게 보는군. 정파의 한복판에서 괴이한 사술을 부리다니 제 명에 죽고 싶지 않은가 보오.”
이훤은 히죽 웃은 후 나뭇가지를 튕겼다.
촤악!
혁련풍은 교룡세가의 후계자답게 한순간 반응했다.
검을 뽑아 사선으로 올려쳤다.
나뭇가지가 쪼개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나뭇가지를 후려친 순간 손의 감각이 사라졌다.
검이 부러지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뼈가 으스러졌고, 손목과 팔꿈치가 어긋났다. 통증은 어깨를 지나 온 몸에 퍼졌다.
“으어어어어!”
이훤은 그대로 탁자를 걷어찼다.
혁련풍은 탁자와 함께 나뒹굴며 비명을 쏟아냈다.
“풍 오라버니!”
서우련이 검을 뽑았다.
하나 이훤의 손짓에 검은 창밖으로 날아갔고, 한순간 다섯 번의 따귀를 맞아야 했다.
쫘악!
“아악!”
동시에 박수가 들려왔다.
이훤은 박수를 치는 예영영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 네 몫이었나?”
“아니요. 저는 때리는데 취미가 없어요. 그나저나 술 한 잔 받으세요.”
“내가 저들의 방수를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예영영은 피식 웃었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게 우리의 방식이잖아요.”
이훤은 대답 대신 빈 잔을 내밀었고, 예영영은 술을 가득 채웠다. 이미 청운루의 이층은 텅 빈 상태였고, 혁련풍의 일행 중에서도 운신할 수 있는 자는 도망친 후였다.
“계속 그러고 계실 거예요?”
“얼굴 까면 덤비겠냐?”
“못 말리겠네요.”
“그래서 괴마인 거다. 괴마는 상식을 뛰어넘지.”
예영영은 이훤의 너스레에 깔깔 웃었다.
“대형의 주량처럼요?”
이훤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야 대화가 좀 통하는구나.”
혁련풍은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신음했다.
무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오른팔을 다친 이상 예전의 무위로 돌아가기란 요원할 터였다. 그렇기에 원독한 눈빛으로 이훤을 노려봤다.
‘아버지가 근처에 계신다. 소식을 전했으니 금방 달려오실 터, 너희 연놈은 지금이라도 실컷 웃어둬라. 곧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로 만들어주마!’
그리고 잠시 후 청운루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하나 마치 모든 것이 사라진 듯 고요해졌다.
‘왔구나!’
혁련풍은 입꼬리를 올렸고, 계단과 창문을 통해 들이닥친 무인들을 보면서 크게 웃었다. 교룡세가뿐 아니라 천수방과 장도파, 거기에 더하여 호정청의 가문인 옥화산장의 무인들까지 들이닥쳤다. 안으로 들어온 자들만 백여 명이니 밖에는 그보다 많은 숫자가 포위망을 펼쳤으리라.
“공자!”
교룡세가의 장로가 황급히 혁련풍을 부축했다. 혁련풍은 자신을 치료하려는 장로를 밀쳐내며 외쳤다.
“저 새끼부터 잡아!”
챙챙챙챙챙챙!
흉수가 지목됐으니 사방에서 살기가 들불처럼 피어올랐다.
하나 이훤은 여전히 예영영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음미할 뿐이다.
“이거 몇 병 사서 올라가자.”
“제가 동이 째로 준비해놓을 게요.”
“네 돈으로 사는 거지?”
“당연하죠. 저도 빚을 지고는 못 살거든요.”
예영영의 응수에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상인의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쇄애애애액!
그 순간 한 자루 장검이 이훤을 스쳐갔다. 혁련풍을 부축하던 장로가 던진 검이다. 그래도 정파의 무인이라도 등을 보인 상대를 공격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뭐야?”
이훤의 짜증 섞인 물음에 장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과 귀가 있다면 수백 명이 포위했음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자신이 있거나, 미친 자가 분명했다. 한데 어느 쪽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공자를 이렇게 만든 게 그쪽인가?”
“어. 대화는 여기까지. 가주 오라고 해.”
“이 놈! 공자를 습격한 것도 모자라 가주를 능멸하려 하다니! 그냥 두지······.”
장로는 말끝을 흐렸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등골이 서늘했다.
“일부러 보여준 거야. 숨기려고 했으면...”
이훤이 히죽 웃는 순간 장로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자신의 무릎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고통이 밀려왔다.
“크흑!”
“용 장로!”
교룡세가의 무인들은 장로가 신음을 흘리자, 앞뒤 가릴 것이 없이 이훤을 공격했다. 장로가 말릴 사이도 없이 십여 명의 무인이 피를 토하며 튕겨나갔다. 마치 호랑이가 개미를 짓밟듯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만! 그만! 가주를 모셔 와라.”
장로의 일갈에 몇몇 수하들이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다.
그는 수하들을 내보낸 후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물었다.
“어디의 고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이오?”
만매만전이 공표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절세의 심득을 익혔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사람도 있고, 서서히 변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당금 강호는 유례가 없을 만큼 기인들이 속출했다. 수백 년간 강호를 유지하던 힘의 균형이 완전하게 무너진 게다. 이제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었고, 굳이 구파오가를 찾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오히려 시비를 피했고, 몸을 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듯 해도 실상 어떤 고수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해가 있었네.”
“오해?”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는 거래하는 중이었어.”
혁련풍이 악을 쓰듯 일갈을 내질렀다.
“거짓말 하지 마라! 장강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이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장로는 여유로운 이훤을 보며 경계의 끈을 늦추지 못했다.
“당신 누구요?”
그 때 누군가 청운루의 이층을 오르며 외쳤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파의 본산이며 강호인의 축제에서 명분 없이 이러한 악행을 저질렀으니 곧 죽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호랑이 눈에 곰의 얼굴을 지닌 자가 이훤을 노려봤다.
교룡세가의 주인인 혁련광이다.
그는 이훤을 보며 선고를 하듯 외쳤다.
“명분 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을 때에는 각오를 했겠지!”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명분이 없다고 누가 그래?”
“뭐라?”
혁련광은 이훤의 도발적인 언사에 미간을 좁혔다.
하나 이훤은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는 진리를 논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내 존재가 곧 명분이다.”
< 79, 괴마는 상식을 파괴한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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