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괴마는 상식을 파괴한다. >
79, 괴마는 상식을 파괴한다.
이훤도 사람이고, 손가락을 깨물면 아프다.
예영영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모자란 막내 동생 같은 느낌이 아닌가. 또래인 백소가 워낙 성숙했기에 더더욱 비교가 됐으리라. 그렇기에 험한 말과는 달리 눈빛은 따스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은 뭔데?’
청운루는 삼층으로 이뤄졌고, 현재 꼭대기 층은 구파오가에 준하는 방파가 통째로 빌려서 연회를 열었다. 그러니 저들 또한 이훤이 있는 이층에 자리를 잡았다.
끼익-
이훤은 슬쩍 일어나 자리를 반대편으로 옮겼다.
그러자 예영영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눈으로는 그들을 살폈지만, 귀로는 주변의 대화를 엿들었다.
“저 사람은 분명 교검수룡 혁련풍이로군.”
“무복을 보아하니 명가의 후예인 듯한데 어디 출신인가?”
“교검수룡이라는 별호를 보고도 모르겠는가? 교룡세가의 이공자잖아.”
오대세가 중 한 곳인 교룡세가(蛟龍世家)는 호남성의 패주로 동정호 전체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세를 자랑했다.
“아! 교룡세가. 장강 이남에서는 가히 비견할 곳이 없다는 거대방파가 아닌가.”
교룡세가는 동정호를 차지한 후 호남성 내에서 화근이 될 싹을 모조리 잘랐다. 한마디로 교룡세가에 반하는 방파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쳐냈다는 의미였다.
“교룡세가의 이공자면 옆에 어피 검갑을 지닌 자들이 천수방과 장도파의 후계자들이겠군.”
이훤은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강호의 모든 이가 몰려들어 즐기는 축제이다보니 견문이 넓은 자가 수두룩했다. 그렇기에 예상대로 귀만 기울여도 돈을 줘야 구할 수 있는 정보가 파도처럼 쏟아졌다.
‘그러니까 교룡세가에 동정호를 맡긴 게 천수방이고, 장강의 지류를 맡긴 게 장도파라는 의미렷다.’
한 마디로 교룡세가가 통행세를 받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니 속가에게 맡긴 셈이다. 그리고 천수방(泉修幇)의 시작은 어부들의 조합이었고, 장도파(長濤波)는 아예 장강수로채의 후신이 아니던가.
이제야 조금은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전마(錢魔) 예영영의 꿈은 천하제일의 상인이 되는 것이다. 천하제일거부가 아니라 상인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했다. 진나라의 파청과 당나라의 유대낭은 여자 상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예영영은 세 번째가 되고자 했다.
한데 몽상으로 끝났을 결심이 현실로 이뤄지는 기회가 생겼다. 황보세가와 신공부가 자멸한 틈을 타 산동악가와 합세하여 산동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훤의 이름값과 청도대상단의 금력이 뭉치니 장강 이북에서의 상행은 파죽지세였다. 하나 그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장강 이북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장강 이남, 즉 장강을 통해 오가는 수많은 물류를 도맡을 수 있다면 역사에 이름을 새기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접대하러 나온 거냐?’
그녀 역시 무림대회를 통해 친목을 다지고, 이권을 확보하려는 게다. 만약 그녀가 교룡세가의 이공자를 회유할 수 있다면 청도대상단의 영역이 장강 이남으로 내려가는 것도 가능했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생각한 것이 맞는다면 이건 전마가 아닌 예영영의 일이다. 그렇기에 때마침 점소이가 가져온 술 병에 신경을 집중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예영영의 목소리가 때맞춰 들려왔다.
“혁련 소협께서는 이 자리를 마음에 들지 않아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명색이 전마인데 너무 저자세가 아닌가 싶다.
“쯧, 일개 상인 따위와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중요한 날이 아닌가? 그걸 모를 리 없으면서 내 중요한 시간을 뺏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교룡세가의 가풍이 느껴지는 오만함이다.
예영영은 혁련풍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자, 목표를 변경했다.
“호 소협, 감사드려요. 호 소협께서 혁련 소협을 설득하셨다고 들었어요. 예 모가 소협께 신세를 졌군요.”
그래도 아는 사이라고, 마냥 저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예 소리를 차단하고 술을 즐기려던 찰나였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맹 밖으로 나갈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잠시 기분 전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풍아, 그만 표정 풀어라.”
“내가 돈이 없소? 힘이 없소? 아니면 장소가 없소?”
“쯧쯧, 공짜 술과 음식이라는 게 중요하지.”
이훤은 대화를 들으며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왜 낯이 익지?’
그는 뒷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수다쟁이들을 바라봤다.
“저기 혁련풍 옆에 앉은 청년이 누구요?”
“자네야 말로 누군가?”
“설마 우리 말을 엿들은 건가?”
이훤은 그들이 불쾌함을 드러내기 전 두 가지 선택지를 줬다. 오른 손에는 금자를 쥔 채 만지작거렸고, 왼 손으로는 탁자를 슬슬 문질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금자는 조금씩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탁자는 매미 날개처럼 얇게 잘려나갔다.
“크흠!
한 사람이 금자를 챙기고,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부터 느꼈지만, 죽마고우라도 되는 듯 호흡이 척척이다.
“호정청이라고 하는데 강서성 옥화산에 위치한 옥화산장의 소장주요.”
“옥화산장은 신비문파로 알려졌는데 한 자루의 옥빛······.”
이훤의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옥빛 퉁소를 병장기로 쓰는데 내력을 운용하면 구멍마다 자색의 기운이 흘러나오지.”
“아니, 알면서 왜 묻는 거요?”
“크흠, 금자는 이미 주셨으니 돌려드릴 수 없소.”
사내의 말에 이훤은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다 말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도 그럴 것이 금자 한 개면 신무대회가 끝날 때까지 기녀를 끼고 놀아도 여비가 남을 정도의 거금이 아닌가.
하나 이훤은 손을 떠난 금자를 기억에서 지웠다.
오직 호정청이라 불린 청년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평생 동안 몇 명이나 볼까 싶었는데······. 빨리도 만났구나.’
회귀 전 그를 공격했던 열다섯 명의 흉수.
소마가 불러들인 그들은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모였다. 하나 천각대선사가 이훤을 설득하려 하자 자연스럽게 소속에 따라 무리를 지었다.
그 때 사파 쪽에 선 자 중에 옥빛 퉁소를 병장기로 쓰던 놈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놈은 수다쟁이들이 말하려고 했던 것처럼 자색의 기운을 흩뿌리지 않았던가. 물론 자색의 기운을 흩뿌리고는 혈륜에 먹혀 갈가리 찢겼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소마와 더불어 살생부에 올랐던 놈을 이런 곳에서 만나니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더라.
이훤은 연거푸 술잔을 비우면서도 예영영의 자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예영영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괴마의 일이 되었다.
“역시 술 마시러 오기를 잘했어.”
아닌 말로 희박한 확률이었지만, 어찌됐든 적을 만나지 않았던가.
이훤은 히죽 웃으며 점소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열 병 더!”
*
예영영은 안면에 마비가 오는 듯했다.
이훤의 예상처럼 전설적인 여상(女商)이 되고자, 접객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천부적인 상재를 발휘하여 이번 신무대회를 분기점이라고 확신했다. 장강 이북에서는 청도대상단과 산동악가, 거기에 화산연맹까지 더해지니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형국이다. 그렇기에 장강을 틀어쥐고 있는 교룡세가만 설득할 수 있다면 청도대상단은 중원삼대상단의 위치까지 신분이 상승할 터였다.
하여 마련한 자리였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대형의 그림자가 이처럼 거대하구나.’
그녀는 전 날 탈마를 통해 이훤이 제갈세가가 붕괴될 때 함께 깔렸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 묘마나 악마, 그리고 탈마가 그러했듯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본 이훤은 한낱 산사태에 깔려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 홀가분하게 상단을 확장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뭐든 쉬워보였거늘 홀로 있으려니 매순간이 고비였다.
‘젠장할! 교룡세가가 뭐라고 저렇게 으스대는 건지.’
하나 호정청으로 인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 혁련풍과 그녀의 정혼자인 서우련이 문제였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찰 것처럼 얼굴을 구기고 있으니 속안의 말을 내뱉는 것조차 힘들었다.
“예 소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요. 풍 오라버니는 구파오가의 후기지수들과 선약이 되어 있답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네요.”
서우련은 예영영의 어여쁜 얼굴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가시였고, 송곳이었다. 예영영은 대별산으로 향하는 내내 준비했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장강의 길을 열어주면 청도대상단은 수익의 일 할을 세가에 통행비로 건넬 겁니다. 첫 해에는 크게 실감이 나시지 않겠지만, 삼 년이면 분기마다 은자 사천 냥 이상의······.”
혁련풍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장사치라 그런 건가? 은자 사천 냥 따위에 본가가 넙죽 감사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가? 본가를 너무 우습게 여기는군. 이게 청도대상단의 공식 입장인가?”
예영영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혁련풍이 대놓고 기파를 쏘아댔기 때문이다.
“당, 당신.”
예영영이 더듬거리는 사이 호정청이 끼어들었다.
“풍아! 감정적으로 행할 문제는 아니야. 그리고 예 소저, 내 말을 들어보시오. 이미 조사를 했을 테니 교룡세가는 동정호와 장강을 각기 속가에 맡긴 걸 알고 있을 거예요. 그 이유는 당신도 알다시피 명분 때문입니다. 한데 청도대상단과 거래를 하는 순간 교룡세가는 장강의 수적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되요.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가상의 방파를 하나 만들 터이니 그곳과 계약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청도대상단의 자금은 가상의 방파를 통해 교룡세가로 전해주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호정천은 절묘한 계획이라도 세운 사람처럼 싱글벙글했다.
하나 예영영은 호정청의 사람 좋은 얼굴을 당장이라고 후려치고 싶었다.
‘미친 새끼! 바지를 내세워서 거래를 한다면 교룡세가의 필요에 의해 청도대상단이 끌려 다녀야 하거늘!’
그녀의 생각처럼 정상적이지 못한 거래는 늘 파탄을 동반하는 법이다.
‘애초에 이 짓을 하려고 자리를 만들었구나.’
천수방과 장도파의 후계자들은 고개를 끄덕이 동조했다.
“호 소협의 말이 옳소. 우리의 전례를 따르시오.”
“그것이 청도대상단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겁니다.”
서우련이 콧방귀를 뀌며 예영영을 도발했다.
“흥! 콩고물이나 주워 먹을 것이지, 어디 장강을 넘봐!”
대놓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음에도 만류하는 이가 없다.
예영영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저것들은 성사가 되면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돈줄이 생기는 셈이고, 거래가 깨진다고 해도 예영영을 조롱하면 그뿐이다.
‘애초에 글러먹은 개종자들이로구나.’
예전의 그녀였다면 어쩔 줄을 몰라 했을 터였다.
그것이 상인의 한계였고, 힘이 없는 자의 설움이었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비록 괴마들과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산동악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리고 그 중에는 악마가 전해준 십전진뇌공도 포함된 상태였다.
“쯧쯧, 장강 이남의 촌뜨기들에게 돈맛을 보여주고 싶었거늘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계산은 내가 넉넉하게 해둘 터이니 마음껏 먹고 가거라.”
멸시의 눈빛과 조롱 섞인 한 마디.
이것은 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저 버릇없는 년! 오라버니, 그냥 계실 거예요?”
하나 예영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촌뜨기들은 강북의 말도 못 알아듣는 건가? 한심하군! 이런 것들과 대업을 논의하려 했다니.”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호정천이 눈빛을 보내자, 천수방의 소방주가 벼락처럼 튀어나갔다. 그는 예영영의 앞을 막은 후 가볍게 밀쳐서 제자리로 돌려보낼 심산이었다.
한데 그가 출수하기 직전 누군가 절묘하게 앞을 막았다.
“어! 영영아! 이야, 신무대회가 대단하기는 하구나. 너를 여기서 만나네?”
예영영은 낯선 사내의 친근감 있는 호칭에 미간을 좁히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나다.]
이훤의 목소리에 작아졌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대형!!]
[안다. 알아. 내가 왔으니 걱정하지 마.]
예영영은 전음으로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산에 깔렸다더니 얼굴만 다친 거예요?]
< 79, 괴마는 상식을 파괴한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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