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96화 (196/226)

< 78, 감당할 수 있겠니? (3) >

문구 자체는 평범했다.

위협일수도 있고, 경고일수도 있다.

하나 그저 한 줄의 문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훤은 한참동안 바라봤다.

‘악재의 심득은 몸에 진법을 새기고, 지형에 진법을 새겨서 득을 보는데······.’

그러한 경지가 극에 달하면 글자에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철문 위에 적힌 문구를 보면 볼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려 했다.

‘저건 신마가 남긴 거다.’

이훤은 혈륜이 저절로 반응하여 휘도는 것을 증거로 삼았다. 글자의 배치와 주변의 지형지물로 인해 심신이 타격을 입으니 저절로 복구하기 시작한 게다.

그 뿐 아니라 필체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마치 글자로 악재의 심득을 표현하고, 필체에 남궁천운의 심득을 담은 듯했다. 그 말인즉슨 그들이 익힌 십전진뇌공과 무형진기는 아직도 대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겪을수록 희한하군.”

신마의 무공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했다.

하나 당사자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절대적인 믿음만으로 수련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그렇기에 대부분의 것을 알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신마의 진의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저벅저벅-

이훤은 걸음을 내딛었다.

“미몽이 무엇인지, 깨어난 자는 누구인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직접 봐야 아는 거잖아?”

그렇기에 거침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철문 앞에 선 후 혈륜을 끌어냈다.

밀고, 당기고, 젖히는 방법을 알 수 없으니 그냥 뜯어내려는 게다. 한데 혈륜을 흩뿌리는 순간 마치 문지기라도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저절로 문이 개방됐다. 말 그대로 소리조차 없이 조용하게 활짝 열렸다.

‘설마 신마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지녔으면 저절로 열리는 건가?’

지금껏 그가 상대한 수많은 기관진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신기했다. 그가 발을 문 안쪽으로 내딛는 순간 통로 좌우에 저절로 빛이 번쩍였다. 자세히 살피니 기이한 도료를 칠한 야명주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박혀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 순간 철문 입구에 적혔던 문구가 뇌리를 스쳤다.

‘미몽이라······.’

그리고 통로의 끝에서 기묘한 벽을 마주했다.

말 그대로 기묘했다.

마치 진흙을 곱게 펴서 발라놓은 것처럼 매끈한 벽에는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천장과 바닥을 살펴봤지만, 그 또한 특별히 신경 쓸 곳을 찾지 못했다.

혈륜을 뿌렸다.

하나 혈륜은 바람처럼 어디론가 흩어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다 익히고 오라는 뜻인가?”

분명 소천기 제갈삭도 이곳에 왔으리라.

천총대화를 그렇게까지 만들어놨다면 개봉의 철탑을 찾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나 그 역시 이곳까지 오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소천기는 역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자다.”

이훤은 제갈삭의 가짜 시신을 떠올리며 조소를 흘렸다.

제갈삭은 분명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으리라. 본래 지자는 불가해를 용납하지 않는다. 찾지 못할 뿐 모르는 것이라 아니라 믿는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인정하게 됐을 터였다. 그리고 이훤에게 이곳을 보내 자신과 같은 좌절감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으리라.

하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이훤의 호불호(好不好)에서 순위를 정한다면 호에서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술이고, 불호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게 머리를 쓰는 것이다.

“지자의 생각으로 나를 감당하려고 하면 큰 코 다치지.”

술꾼에게는 술꾼만의 방식이 있는 게다.

만약 제갈삭이 천하의 명주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면 신마의 심득이 없더라도 눌러 앉았으리라. 아닌 말로 신마의 심득을 공개한 이유는 제갈세가나 남궁세가와 같이 직접적으로 건드리기 힘든 자들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한데 어쩌다 보니 모든 걸 얻어버렸다.

그러니 무림맹이 무림대회를 하다가 망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나중에 다시 봅시다.”

이훤은 사람을 대하듯 벽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가 발길을 돌리는 순간 불빛은 저절로 사라졌고, 철문 앞에서 혈륜을 끌어올리는 순간 다시 한 번 문이 열렸다.

편하기는 엄청 편했다.

“흐흐, 자동으로 술을 따르고, 자동으로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술을 즐길 수 있다면 그만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는 개봉에서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진 후 대별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갈삭이 수십 년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갈세가 전체를 감옥으로 삼았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만 알고 있던 비밀을 미끼로 내걸었다.

“삼 일 남은 건가?”

무림맹이 위치한 대별산까지는 하루 거리였다.

일전 산동성으로 향할 때 하남성 북쪽을 횡단했으니 이번에는 남쪽을 횡단하기로 했다.

북부의 술도 맛있었으나 남부의 술도 마찬가지이리라.

‘겸사겸사 그것도 익히고 말이야.’

*

무림맹에서 열리는 대회가 곧 무림대회다.

그리고 무림대회는 당시 중요 안건을 넣어 이름을 지었다. 이번에야 말로 목적이 뚜렷했기에 대회의 명칭은 자연스럽게 신무대회(神武大會)로 정해졌다. 제아무리 신마가 정사지간의 무인이라고 해도 한때 공적이었고, 무림맹이 주관하는 대회에 마를 넣을 수 없다는 반발 때문이었다.

“신무대회라니! 누가 봐도 신마 때문에 열리는 대회이거늘 이거야 말로 눈 가리고······.”

“어허! 신무나 신마나 뭐가 다른가? 검제가 산동악가에서 화산의 심득을 공표하지 않았는가? 이제 다른 생존자들도 나서야 할 때가 됐어. 지금껏 정파의 협객, 영웅, 군자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큰 이득을 보았는가? 그들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 우리는 잔치 음식이나 먹으면서 절세무공의 구결을 듣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지. 그러니 명칭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노인의 너스레에 객잔의 손님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처음에 불만을 토로하던 이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니 이제 돈벌이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바람잡이가 헛기침을 하더니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검제가 남궁세가에 다녀왔다더군. 창천평의 혈사라고 하던데 말이야. 쯧쯧, 궁금하기는 한데 알 수가 있어야지.”

노인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아! 창천평의 혈사 말인가. 마침 이 몸이 남직예를 유랑하다가 오늘 도착했다네. 창천평의 혈사도 아주 가까이서 지켜봤지.”

“호오! 그렇소? 이야기 좀 해주시오.”

“그러고는 싶은데 먼 길을 왔더니 여비가 다 떨어져서······.”

바람잡이가 먼저 철전을 한 움큼 내놓았다.

그가 주변을 부추기자, 여기저기서 돈이 모였다.

매담자인 노인이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내자, 사람들은 한 번 더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노인이 말끝을 흐릴 때마다 사람들은 기꺼이 철전을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무대회는 축제였다.

목적이 어찌됐든 돈을 쓰고, 즐기러 온 이들이 태반이다.

그렇기에 노인과 바람잡이는 한 몫을 단단히 챙길 수 있었다. 한데 모든 이가 즐거워하는 와중에 한 사람만이 등을 보인 채 술을 마셨다.

개봉에서 방금 대별산에 도착한 이훤이었다.

하나 이훤은 위명에 비해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노인은 배려를 하듯 말을 건넸다.

“이보게. 젊은이. 신무대회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잔치라고. 혼자 궁상떨지 말고, 이쪽에서 함께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재미도 없고, 거짓투성이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소.”

매담자인 노인은 그냥 있는데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상대의 말은 곧 그들을 바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상대가 슬쩍 돌아앉는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에 신세를 진 벽 국주가 생각나는 얼굴이군.’

‘어린 시절 헤어졌던 동생 놈도 살아 있다면 저렇게 생겼을 텐데······.’

이훤은 슬쩍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객잔을 떠날 때까지 누구 한 명 그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객잔의 주인이 무전취식을 한 자를 못봤냐며 손님들을 닦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훤은 군중 속에 섞인 후 한 숨을 내쉬었다.

‘쯧, 이거 심각하군.’

그가 방금 활용한 것은 소천기 제갈삭이 익혔을 강림혼요술이다. 천총대화를 통해 신비 동굴을 찾아낼 때까지만 해도 강림혼요술을 ‘따위’라고 여겼다. 굳이 애써서 익힐 이유를 찾지 못한 게다. 하나 신마의 심득을 모두 모아야 한다면 충분히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한데 고작 이틀 동안 익힌 강림혼요술만으로도 세상을 사는 것이 너무 편했다. 강림혼요술만 쓰면 상대는 저절로 호의를 보였고, 이틀 동안 수백 동이의 술을 마셨지만 모두 공짜였다.

‘호의를 가지는 것이 첫 째이고, 얼굴을 바꾸는 것이 둘째 이고, 마지막에 이르면 타인의 얼굴을 바꾼다니······.’

강림혼요술을 익히고는 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건 여전했다. 하나 제갈삭이 지금껏 강호를 뒤집어놓은 걸 생각하면 신마의 심득 중 가장 위험한 종류가 아닐까 싶다.

“후우.”

이훤은 한 숨을 연발했다.

소천기는 제갈세가 전체를 함정을 삼아 수십 년을 버텨왔다. 그러니 신무대회에서 저지르려는 혈겁이야 말로 놈의 최종 목표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지닌 바 모든 능력을 사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자칫 하면 얼굴을 바꾸고 숨어든 놈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이제 신무대회까지는 하루가 남았다.

지금도 식순에 존재하지도 않는 전야제랍시고, 대별산 주변은 불야성을 이뤘다. 군중 속에서 걷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가지 말자.”

무림맹이라고 해서 다를까 싶다.

지금 시간이면 맹 내에서는 수많은 문파의 주인과 명사들이 이합집산을 하고 있을 터였다. 손을 잡고, 적을 만들고, 이권과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리라.

이훤이 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초대하지도 않은 이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훤과 교류하기 위해서 처서 밖을 서성일 터였다. 내일부터는 소천기 제갈삭의 음모를 막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리고 운 좋게 적의 회합같은 걸 볼 수도 있잖아?’

이훤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을 방패막이 삼아 발걸음도 가볍게 나아갔다.

“이곳에서 술이 제일 맛있는 곳이 어디요?”

흥에 겨운 이들은 성심성의껏 대꾸했다.

그리고 열에 일곱은 청운루를 가리켰다.

회귀 전에도 듣지 못한 이름이다.

하나 강호는 넓고, 주루는 많지 않던가.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니면 다른 곳에 가도 되는 거고.’

신무대회가 열려서 좋은 점 중 하나가 수많은 간이 주루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공자, 죄송한데 지금은 자리가······.”

은자 한 냥을 던졌다.

“이런 날에는 합석이 당연하지요.”

평소와 달리 오늘은 합석도 괜찮았다.

조금도 기대하고 있지 않지만, 운이 어마어마하게 좋다면 옆자리의 대화를 통해서 무언가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나 그런 일은 예상했던 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쟤는 어디 가는 거야?’

이층 구석에 앉아서 술과 안주를 기다리던 중 한 무리의 남녀를 발견했다. 호화로운 무복을 걸쳤고, 허리춤의 병장기도 번쩍거렸다. 일견하기에도 명가의 후예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듯했다.

문제는 그 안에 예영영이 끼어 있다는 점이다.

이훤이 회귀 후 받아들인 괴마 중 예영영의 위치는 살짝 애매했다. 애초에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술을 마시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별칭도 전마(錢魔)였다.

한데 무리 중앙에 끼어 있는 예영영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훤은 그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내 돈 관리는 안 하고, 술을 처마시러 다녀?”

< 78, 감당할 수 있겠니?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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