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95화 (195/226)

< 78, 감당할 수 있겠니? (2) >

*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

무인이 생각해야 할 수많은 격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넓은 강호와 많은 기인이사만큼 무림대회도 곳곳에서 개최됐다. 딸을 시집보낼 때 사람들의 축하를 받기 위해 작은 비무대회를 열고, 문파의 개관을 홍보하기 위해 시연을 하는 등 종류도 무궁무진한 편이다. 그 중 으뜸은 누가 뭐라해도 무림맹에서 개최하는 대회였다. 정마가 대립할 때에는 전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무림대회였지만, 평온할 때에는 화합을 위해 즐기는 대회가 대부분이다.

이번 무림대회는 후자였다.

마교는 남북으로 찢겨 흩어졌고, 온전한 정파의 세상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훤이 신마의 심득을 세상에 널리 알린 상태였다. 화산연맹의 발족식에서 드러낸 신위에 강호인들은 환호했고, 무림대회에 대한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신무령(神武令).

무림맹에서 강호에 뿌린 무림대회의 초대장이다.

구파오가를 비롯해 명문거파에게 전달됐다.

하나 중소방파의 주인과 상인, 그리고 허리에 검을 찬 모두가 무림맹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수많은 기인이사가 모일 무림맹에서 새로운 인연을 꿈꾸고, 사업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며, 운 좋게 기연을 얻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부호와 고수에게는 도원경이지만, 약자에게는 수라장과 같은 것이 강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무림맹으로 향했다.

백 년 안에 다시 열릴지 모를 거대한 대회.

운 좋게 신마의 심득을 얻을 수 있을 대회.

매담자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던 고수를 볼 대회.

모두가 웃으며 움직였다.

오직 한 곳만 제외하고 말이다.

한 때 산동무림의 삼정(三鼎)이라 불렸고, 중원 유림(儒林)의 태두(泰斗)로 소림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신공부였다.

신공부주를 비롯한 수뇌부 중 누구도 문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신무령을 받았음에 불구하고, 가겠다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솔직히 가고는 싶었다.

하나 갈 수가 없었다.

신공부주는 일생의 동반자처럼 여겼던 서책을 읽다가 한 숨을 흘렸다.

“하아! 누대에 걸쳐서 소림과 비견되던 신공부가 내 대에 이르러서 이런 개망신을 당하다니······.”

소부주는 황보세가의 셋째 아들의 꾐에 넘어가 개죽음을 당했다. 하여 당시 매화군자였던 이훤을 흉수로 지정하고, 황보세가와 함께 산동악가를 핍박하지 않았던가. 한데 저간의 사정을 알고 보니 소부주를 죽인 건 황보세가였단다. 자식을 죽인 원수와 한 배를 탄 것도 모자라 하수인 노릇을 했으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 광경을 지켜본 자가 무려 수천에 이르렀다.

“이제 와서 악가나 청도대상단에게 고개를 숙일 수도 없고······.”

현재 황보세가는 산동악가와 청도대상단이 내세운 꼭두각시가 가주를 맡은 상태였다. 아닌 말로 산동무림의 힘은 산동악가가 차지했고, 재화는 청도대상단이 독점한 상태가 아닌가. 황보세가의 옆에서 콩고물을 얻어먹던 신공부로서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림대회에 간들 좋은 꼴을 보겠는가.

심지어 무림맹은 화산연맹의 발족식을 위해 무림대회를 미루기까지 했다. 이훤이 등장하는 순간 세간의 시선은 그에게 쏠릴 것이고, 그에게 당했던 이들은 웃음거리로 전락할 터였다.

“빌어먹을!”

유자로서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욕을 입 밖으로 몇 번이나 토설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나 이훤이 원망스러운만큼 신마의 심득이 탐나는 것또한 사실이었다.

그 또한 만매만전으로 인해 성취가 있지 않았던가.

신공부 내에서도 비주류로 칭해졌던 이들이 엄청난 발전을 이뤄 학식을 겨루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놈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아.’

이건 신공부주만의 고민이 아니었나 보다.

수뇌부가 한두 명씩 찾아오더니 결국 회의가 열렸다.

“이훤, 그 놈은 때려죽여 마땅하지만, 신마의 심득을 공개한다면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 누가 갈 거요? 가서 무슨 꼴을 당할지 뻔히 보이는데 가겠다는 사람이 있겠소? 흥! 아니면 그대가 직접 찾아가보시던가.”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보자는 게 아닙니까!”

신공부주는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이마를 짚었다.

수하들의 대담을 듣고 있자니 골이 울리는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때 담담한 어투로 누군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어차피 신마의 심득은 만인 앞에 공개하기로 했으니 사람을 보내서 몰래 보면 되잖아. 게다가 이삼 일이면 필사본이 낙엽처럼 뿌려질 텐데 뭘 걱정해.”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렇군.”

이훤이 진짜를 발표한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보니 이것이야 말로 묘책이었다. 아니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남을 믿지 못하기에 떠올리지 못한 게다.

“좋은 방법이야!”

“한데 누가 이 중요한 회의에서 예의에 어긋나게 하대를 하면서······.”

웃고 떠들던 이들이 뒤늦게 체통을 찾았다.

하나 그는 말끝을 흐려야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쇠똥구리가 똥을 굴리면서 지나가도 들릴 것처럼 고요했다.

신공부주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수하들과 같은 꼴이 됐다.

“어, 네가 왜? 아니, 당신이 여기에 왜?”

이훤은 창틀에 앉은 채로 히죽 웃었다.

그리고 신공부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보러 왔지.”

신공부주는 눈을 끔뻑였다.

이곳은 신공부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죽림의 한복판이다. 수십 명의 호위가 쉴 새 없이 오갔고, 유림을 존중하는 의미로 명문거파들이 진법과 기관을 설치하지 않았던가.

‘하긴 저 놈에게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신공부가 비록 봉문에 가까운 상황이라지만, 강호의 정세를 살피는 건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산동성을 떠난 이훤의 행적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신공부주는 잔뜩 굳은 몸에서 힘을 뺐다.

상대와 하늘과 땅만큼 격차를 보이니 오히려 두려움이 사그라지는 듯했다. 자연재해를 두려워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지 않던가. 그 말처럼 피할 수 없으니 즐기지는 못해도 담담하게 마주하는 건 가능했다.

“후우, 우리 사이에 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이오?”

“빚 갚아야지.”

이훤의 말에 신공부주는 미간을 좁혔다.

“비록 신공부가 산동악가의 일에 개입하기는 했으나, 이름을 보태는 정도였소. 실제로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지금은 자중하고 있으니 빚이라고 할 게 없을 게요.”

“그거 말고. 내가 방금 너희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줬잖아. 왜? 마음에 들지 않아.”

수뇌부랍시고 모인 자들은 하나 같이 시선을 피했다.

하긴 이훤이 눈알을 부라리며 묻는데 누가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칩시다. 하나 신공부는 그대에게 줄 게 없소.”

“알고 싶은 게 있으니까 대답을 해줘야겠어.”

신공부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목적이 따로 있었으니 회의가 없고,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어도 마주하게 될 상황일 터였다. 그러니 차라리 빚을 갚는 식으로 대답을 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내심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이훤 정도 되는 이가 질문을 하면 답을 할 사람은 차고 넘칠 터였다. 한데 굳이 산동성까지 달려온 걸 보니 신공부의 위엄이 아직은 남아 있는 듯했다.

신공부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뭐가 궁금하오?”

“소주천문도.”

이훤의 말에 신공부주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소. 소주의 문묘에서 비각을 발견했는데 그곳에······.”

“나는 소주천문도가 어느 하늘을 보고 만들었는지 알아야겠어.”

신공부주는 눈을 끔뻑였다.

“응?”

수뇌부를 돌아보니 그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이훤은 혀를 찼다.

“쯧, 소주천문도는 천체의 운행을 일 년 내내 기록한 후 겹쳐놓은 것이 아니냐? 그러니 한 자리에서 하늘을 살펴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게 어디냐고!”

신공부주가 한 박자 늦게 웃었다.

“허허, 아! 그거 말이군. 크흠! 지금 갑자기 물어보니 조금 애매하구려. 좀 살펴봐야 할 듯한데······.”

시간을 달라는 뜻이다.

하나 이훤은 한 숨을 흘렸다.

꼴을 보아하니 이쪽으로는 아예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수백 년 동안 누적된 천문의 정보가 있지 않겠는가. 그걸 어떻게 조합하여 활용할지 모르는 것뿐이다.

“하아!”

이훤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신공부주가 쓰던 문방사우 중 붓이 저절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는 붓으로 수십 명이 모여앉은 거대한 탁자에 낙서처럼 선을 긋기 시작했다.

“아니! 이 탁자가 어떤 탁자인데······.”

신공부주를 비롯한 수뇌부들의 바탕은 유자이기에 앞서 학자였다. 그렇기에 이훤이 천총대화의 의미를 설명하며 점을 찍고, 선을 그리자 금세 빠져들었다. 오히려 붓을 휘두르는데 털은 그대로였고, 탁자가 파이는 걸 신경 쓰지 못할 정도였다.

“호오! 그렇다면 조통보의 낙성지리지에 이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었소.”

“낙성지리지라면 밀유법천도와 천관상제록까지 해서 삼문기라 불리지 않소이까. 내가 세 가지를 모두 외우고 있소.”

시작이 힘들 뿐 설명해주는 족족 여기저기서 정보가 튀어나왔다. 이훤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정보를 규합하고, 분류했다.

본의 아니게 신공부의 학자들에게 천문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게 되었으나, 이런 걸 아까워 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개봉입니다!”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확실해?”

이훤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확실합니다. 개봉이 아니면 이곳의 별과 저쪽의 별이 동시에 관측되지 않아요. 일단 삼원을 중심으로 보자면...”

그는 이훤이 손을 내젓자 곧장 말을 끊었다.

이틀 동안 길을 잘들인 듯했다.

“아니면 다시 올 거야. 그리고 다시 왔을 때에는 지금처럼 웃으면서 지내지 못할지도 몰라.”

이훤의 서슬이 시퍼런 한 마디에 신공부주와 신공부 내에서 모조리 끌고 온 학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래도 확실합니다!”

치기 어린 학자 한 명이 외쳤다가 금세 끌려나갔다.

이훤은 신공부주의 처소에 모인 이들을 눈에 담은 후 걸음을 옮겼다.

윽박을 지른 것과 달리 저들의 해석을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에서 머리를 가장 잘 쓰는 이들은 제갈세가였다. 그들은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상황을 개선한다. 반면 신공부는 지식의 보고가 되기를 자처할 뿐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유자(儒者)의 본분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백 년 간 누적된 저들의 지식이 개봉이라는 답을 내놨다면 틀리지 않으리라.

*

개봉은 북송 시대의 수도로 유명했지만, 강호에서는 개방의 총본산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신마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임에도 무림맹이 위치한 하남성에 들어서게 됐다.

‘강호 한복판에 뭘 숨겨놓기나 한 건가?’

이훤은 개봉에 들어선 이후 천문을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다. 신공부의 학자들은 산이 가장 좋지만, 개봉에는 산이 없기에 높은 건조물을 염두에 뒀다. 그리고 그들이 추려낸 지점 중 한 곳에 이르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본능이 외쳤다.

‘여기 같아.’

철탑은 송 대에 세워진 13층짜리 팔각 철탑이다. 높이가 이십여 장에 이르렀고, 주변에는 시야를 방해하는 건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볍게 몸을 띄우는 순간 13층까지 솟구쳤다.

이훤은 꼭대기 층에 들어선 후 눈을 가늘게 떴다.

천총대화가 새겨졌던 동굴의 벽화와 똑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뱀과 사람의 형상.

삼원 중 천시원과 연결됐던 그림이 아닌가.

‘철탑을 북극성으로 삼아 천시원이 있던 방향이라면······.’

이훤은 이곳까지 오며 살펴봤던 지형도에 천총대화를 덧씌웠다. 그는 천총대화의 방향에 따라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고, 벽돌 하나가 빠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곳을 통해 밖을 보는 순간 저 멀리 어둠의 장막에 휩싸인 채 희미하게 솟구친 산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을 응시하는 순간 불빛 한 점 없는 산세가 악귀처럼 히죽거리는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초대장 치고는 기분 더럽게 만드네.”

하나 기분이 더럽다고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훤은 암천군림보를 펼치며 빛살처럼 내달렸다.

그렇게 밤새도록 야산을 이 잡듯이 뒤진 후에야 넝쿨과 햇빛, 그리고 바위에 가려진 좁은 협곡을 찾아냈다.

“하.”

이훤은 한 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돌아다닌 보람이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철문 앞에 선 채로 숨을 골랐다. 세월의 흔적을 무시한 것처럼 녹조차 슬지 않은 멀쩡한 철문이다.

이훤은 철문 위에 새겨진 한 줄의 글귀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자만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 78, 감당할 수 있겠니?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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