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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94화 (194/226)

< 78, 감당할 수 있겠니? >

78, 감당할 수 있겠니?

천공혈륜겁을 통해 하단전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했다.

무형진기로 인해 중단전이 활성화됐다.

결국 하단전이 굳건했기에 중단전이 스스로 개화한 셈이다. 하나 상단전은 천기가 통하는 통로였고, 인위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려운 걸 이훤은 가능했다.

회귀 전 천공혈륜겁에 섞였던 천관심결이 끊임없이 발동했고, 회귀 후에는 백소를 통해 천관심결을 완성시켰다. 그 결과 망아취자의 뚜껑 열린 놈이라는 말처럼 상단전이 열린 게다.

하나 하단전이나 중단전과 달리 상단전은 스스로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좋아졌다는 게 이런 기분이로구나.”

이훤은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천관심결로 인해 상단전이 열리니 뇌의 한계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그 결과 보는 족족 기억에 새겨졌고, 동시에 분류와 조합이 이어졌다. 무작정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세분화하여 습득하는 것이 동시에 이뤄진 셈이다.

결국 이훤에게는 지식이 곧 지혜였다.

그는 송대에 만들어진 주역과 명대에 만들어진 해석본을 비교분석했고, 한나라 때의 천문지리서를 주역에 대입하여 또 다른 해석본을 완성했다.  이훤은 동시에 대여섯 권의 서책을 번갈아가며 읽었고, 독파한 책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만 권에 이를 것처럼 가득하던 서책이 오십 권 남짓으로 줄었고, 새롭게 만들어낸 책이 다섯 권이다.

“이 정도면 된 건가?”

원래 있던 오십 권을 독파한 후 새롭게 만든 다섯 권을 익힌다면 천문에 관해서는 제법 큰 소리를 낼 수 있을 터였다.

“이걸 공개하면 유림과 세상이 뒤집어지겠군.”

이훤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신마의 심득과 달리 천문은 범인에게 상상 속의 경지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에게 무병장수와 예지를 담보해주는 신의 선물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그러니 공개가 된다면 중원의 모든 학자들이 화산연맹으로 몰려올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곧 화산연맹의 도맥과 어우러져 집단 지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흐흐, 이 정도면 스승님한테 술을 진탕 얻어마실 수 있겠어.”

망아취자가 낙안봉에서 은거한 세월만 오십 년이다.

지금껏 그가 수많은 술을 제공했지만, 화산 곳곳에 숨겨둔 술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터였다.

이훤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도 대단한 정보를 공짜로 공개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아쉬움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서책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고 최소한 소천기에 준하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자! 그럼 소천기가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는지 구경해 볼까?”

이훤은 반구형으로 만들어진 동굴 앞에 섰다.

벽에 그려진 괴물들은 산해경을 비롯해 전설에나 나오던 신수들임을 알게 됐다. 그것들을 하나씩 눈에 담은 후 고개를 들었다.

“천총대화라. 그 말처럼 하늘의 모든 것을 띠처럼 연결한 그림이네.”

이제야 무언가 시작된 듯했다.

제갈삭은 자신의 심득을 천총대화로 표현했을 것이고, 그것을 파악하면 또 한 가지의 심득을 얻는 셈이다.

철푸덕-

이훤은 아예 누워버렸다.

그리고 천총대화를 바라보며 그가 깨우친 지식에 대입했다. 아주 작은 실마리만이라도 발견한다면 시작으로 삼기에 충분할 터였다. 그러려면 천문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듯 천총대화를 완벽하게 숙지해야 했다.

‘천총대화의 기본 틀은 소주천문도로군.’

소주천문도(蘇州天文圖)는 남송시대의 천문도로 발견된 곳은 문묘였다. 천총대화처럼 원형의 성도에 별자리와 주극원이 새겨졌고, 특정 지역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일 년 치 운행을 기록했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이것이 첫 번째 실마리인 셈이다.

‘어디서 올려다보고 만든 걸까?’

아마 그곳에 이르면 무언가 등장하지 않을까 예상됐다. 만에 하나 신마의 흔적이 발견된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천총대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천총대화를 넓게 보고 판단했으니 이제는 좁게 보고 세세한 부근을 파고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이곳저곳에 흩어진 채 박혀 있는 여덟 개의 야명주였다. 일곱 개는 중앙을 기점으로 방사형태로 퍼져 있는데 유독 하나의 야명주만 천장과 벽의 경계 쪽에 박혀 있었다.

‘천문에 의하면 하늘의 중심은 북극성이라 했지.’

북극성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세 개의 야명주를 한참동안 살쳤다. 그리고 누운 상태로 몸을 돌려서 여러 각도로 살핀 바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삼원이잖아.”

도가의 태청과 옥청, 그리고 상청을 가리켜 삼청이라 하며 하늘의 으뜸으로 친다. 본래 천문과 도가의 교리는 떼려야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세 개의 야명주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삼청에 대응하는 삼원이 떠올랐다.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이다.

자미원(紫微垣)은 북두성 북쪽의 위치한 도가의 이상향을 의미하며 하늘의 궁궐로 알려졌다. 하여 자미원의 북쪽으로 연결된 선을 따라 시선이 돌아갔다. 천장을 지나 벽에 이른 선은 놀랍게도 산해경에나 나올법한 괴이한 동물과 연결이 됐다.

‘곰과 용을 섞어놓은 듯한 괴물이라.’

태미원(太微垣)은 천제가 다스리는 궁정으로 업무를 보는 장소였다. 그곳 또한 천문의 방향에 따라 선을 연결 지으니 사자와 곰, 여인을 한데 뒤엉킨 기괴한 동물에 이르렀다.

‘이 새끼, 시간 끌려고 엄청 꼬아놨네.’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소천기 제갈삭은 이훤의 시간을 뺏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기에 난해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삼원의 마지막은 천시원(天市垣)은 천제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 장소였고, 사내와 뱀으로 연결된다.

“천문에서 삼원의 등장은 곧 완벽을 의미한다지.”

완벽이란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그 말인즉슨 삼원의 비밀을 파헤치는 순간 타인을 대할 때 완벽한 모습을 내비칠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가 마음 속 깊숙이 원하는 진짜 누군가로서 나타나니 홀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강림혼요술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실마리가 나타났다.

하나 이훤은 콧방귀와 함께 강림혼요술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신마의 진의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머릿속에는 천문에 대한 정보로 가득했다.

“삼원으로 완벽하니 빛이 완성되고, 조화를 위해 그림자가 나타나야 하니 외곽의 28수가 뒤따른다고 했어.”

이훤은 근처에 놓인 네 개의 야명주를 바라봤다.

애초에 삼원으로 고른 세 개의 야명주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네 개의 야명주는 각기 동서남북을 가리켰다. 28수는 하늘의 방향에 따라 7개씩 나뉘지 않던가. 그러니 네 개의 야명주는 각 방향에서 대표되는 성좌를 의미할 터였다.

“그런데 저게 문제야.”

이훤은 따로 동떨어져 있는 야명주를 응시했다.

저것은 천문의 묘리로 살펴봐도 존재 의의를 알 수 없었다. 결국 규격 외이자 불가해를 의미했고, 본래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의미했다.

“어.”

잠시 생각하다가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 모든 설명에 부합하는 건 본인이 아니던가.

이훤은 히죽 웃으며 누워 있던 그대로 몸을 튕겼다. 가벼운 반동만으로도 삼 장 높이의 천장에 닿았다. 그는 그대로 야명주를 뽑았다가 다시 끼웠다. 그리고 홀로 동떨어져 있는 야명주를 같은 방식으로 살펴본 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놨다.

눈으로 보고 나니 알겠다.

여덟 번째 야명주는 나중에 꽂힌 것이 분명했다.

즉 이훤이자 천공혈륜겁인 셈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특별했다.

제갈삭이 천룡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그들은 절명곡의 생존자가 여덟 명임을 알고 있었다.

‘만약 놈들이 천공혈륜겁의 역할이 뿌리임을 알고 있다면······.’

적의 정보력을 칭찬하기에 앞서 이 또한 단서가 될 터였다. 삼원이나 북극성이 아니라 외곽의 천공혈륜겁을 의미하는 야명주로부터 시작을 했다.

그곳에서 퍼져 나온 선을 따라 천기를 살폈다.

일 년 내내 올려다본 것을 정리했으니 점의 개수는 일정해도 선은 무한했다. 수없이 겹쳐지고, 분리되는 걸 가르는 데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아.”

이훤은 오랜 상념에서 벗어났다.

보통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이곳은 사방이 돌로 막혀 있고, 빛이라고는 야명주와 횃불 몇 개가 전부였다.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말이다.

이훤은 자신이 동굴에 갇히고 정확하게 이십 일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소천기가 어느 정도나 이훤을 가둬두려 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나 적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천총대화를 해석한 건 확실했다.

“훗, 이 정도로 감당할 수 있겠냐?”

듣는 이가 없음에도 혼잣말을 내뱉은 건 그만큼 기뻤기 때문이다.

제갈삭의 심득, 천총대화.

이훤은 고개를 들어 십사일 동안 눈에 담았던 천총대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점과 선이 사라졌고, 누가 닦아낸 것처럼 반질반질한 천장만 남았다.

“친해지고 싶지는 않지만, 똑똑하기는 했구나. 그건 인정해줘야겠네.”

이훤은 제갈삭을 떠올렸다.

증오도 분노도 없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천기 제갈삭은 신마의 심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신마의 존재 의의와 목적에 관해서 궁구했다.

그 결과 몇 가지를 알게 됐다.

“죽지 않았다. 사라졌다. 즐긴다. 그리고 목적은······.”

제갈삭은 이미 신마를 인간의 힘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고 규정지었다. 그렇기에 사라졌다고 여겼으며, 그에게 강호란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총대화로 만들어낸 건 여기까지였다.

“천총대화를 만든 곳으로 가야 알 수 있다는 뜻이렷다.”

이훤은 소주천문도가 만들어졌을 장소에 관한 정보를 떠올리려 했다. 하나 만 권의 책과 회귀 전후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짚이는 바가 없다.

결국 천문지리에 능통한 이를 찾아가야 할 터였다.

“제갈삭에 버금가는 학자이며 천문지리에 능통한 이라면······.”

이훤은 혀를 찼다.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한 사람을 떠올렸다.

소주천문도가 공자를 기리는 사당, 즉 문묘에서 발견됐듯 신공부의 부주라면 연원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간신같이 생겨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보아야 할 것을 보았고, 찾아야 할 것을 찾았으니 나가려는 게다. 수천만 근의 바위와 모래가 쏟아져 내린 상태가 아닌가.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 이만한 구멍을 파내는 건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산을 뚫어서 길을 냈을 터······.”

이훤은 이곳이 융중산의 중심부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탈출은 불가능이 아니라 난해함의 문제였다.

눈을 감고, 기감을 퍼트리고, 혈륜으로 빈틈을 헤매이다 보니 미약한 바람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 흐름에 섞인 혈륜이 바위와 바위 사이에 스며들었고,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그림으로 남아 길을 만들었다.

쉭!

이훤은 주먹을 뻗었다가 회수했다.

그러자 사람의 몸통만한 바위가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가볍게 손을 내젓자, 가루는 바람이 실려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몸통만한 바위가 무너졌음에도 동굴에서 균열의 조짐을 찾을 수 없었다. 바위와 바위가 맞물린 상태에서 없어도 무방한 것만 없앤다면 산을 무너트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할 터였다.

쉭! 쉭! 쉭! 쉭!

반동도, 충격도 없이 바위만 사라졌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메우고 있던 흙과 모래도 경풍에 흩날려 밀려났다.

그렇게 이훤은 이백서른두 번의 주먹질을 했고, 삼백쉰네 번의 손짓을 했으며, 백예순세 번의 걸음을 옮겼다.

쾅!

마지막 주먹질과 함께 바위가 쪼개지듯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녹빛으로 가득한 수해(樹海)가 이훤의 탈출을 반기듯 출렁거렸다.

솨아아아아아-

이훤은 주변을 살피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산동성이 어느 쪽이더라.”

방향을 잡고, 땅을 박차는 순간 몸뚱이는 빛이 되어 사라졌다. 천총대화마저 흡수한 혈륜의 움직임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십일 성에 이른 혈륜이 폭주하는 순간 뛰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처럼 수해를 지나쳤다.

쇄애애애애애애액!

< 78, 감당할 수 있겠니?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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