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동화(童話). >
77, 동화(童話).
악마는 하오문의 지부장이 아니라 향주를 끌고 왔다.
지부는 지역을 관장하고, 향주는 성을 통째로 관리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신분은 비밀에 부쳐지고, 외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많지 않았다.
한데 악마는 불과 이각 만에 향주를 잡은 게다.
“호오! 향주라고?”
“지부장을 잡았는데 시종이랍시고 옆에 있는 놈이 더 강하잖아. 그래서 홀라당 벗겨놓으니까 향주의 증표가 떨어지더라.”
“크흑! 어린 놈들이 일신의 무위만 믿고 기고만장한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강호의 무인들이 하오문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겠냐 마는······.”
그 순간 묘마의 손에서 강기가 솟구쳤다.
“더 떠들래?”
향주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침묵했다.
그는 나이에 비해 경륜이 대단한 자였다. 그렇기에 중년의 나이에 향주가 되었으리라. 하나 그런 그조차 갑작스레 강기를 다섯 치 이상 뽑아내는 고수를 본 적이 없었다.
“대형은?”
악마의 말에 묘마는 턱짓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짐작되는 곳이 있나 봐. 이봐! 하오문에서 제갈세가에 생필품을 대줬지?”
향주는 잠시 대답 대신 묘마의 어깨 너머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있었고, 곳곳이 무너지고 불에 탄 상태였다.
“우리 아니다.”
악마의 말에 향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저들의 찔린 구멍과 베인 길이를 보면 이 정도 되는 장검에 당한 듯하군요. 한데 소저는 검이 없으시고, 대협께서는 창을 쓰시니······.”
묘마가 향주의 무릎을 걷어찼다.
“누구는 소저고, 누구는 대협이야?”
향주는 신음을 억지로 삼킨 채 눈치를 봤다.
‘빌어먹을! 계집년의 성질이 대단하구나. 정사지간의 놈들인 듯하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
악마는 만족스런 미소를 띄운 채 쓰러진 향주를 부축했다.
“흉수는 됐고,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들어보지.”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맞습니다. 제갈세가의 생필품은 이곳 하오문 지부를 통해 배송됐습니다.”
묘마와 악마는 이훤과 나눴던 대화를 기반으로 향주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그리고 추리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에 비해 사들인 것이 많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료품이 들어온 것이 사 일 전이면 지금도 창고에 남아 있어야 해. 없더라.”
“아마 죽이기 전에 배불리 먹였나 보네.”
“대형의 말이 맞아. 뭔가 치밀하게 음모를 꾸민 척하면서 빈틈을 너무 많이 보여주고 있어. 더 큰 음모를 숨기기 위한 것처럼 말이야.”
향주가 말을 건넸다.
“두 분께서 괴마임을 확인했으니 하오문은 적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취마께서 처음 등장하셨을 때부터 하오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으며······.”
아무래도 괴마들에게 영업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다.
묘마가 향주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는 사이 갑작스레 굉음이 울렸다.
“뭐야?”
“융중산이 아니야!”
굉음의 진원지는 제갈세가가 아니었다.
묘마는 손가락을 튕겨 향주의 마혈을 짚었고, 그는 짚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묘마와 악마는 빛살처럼 빠르게 굉음이 울린 곳으로 달려갔다. 제갈세가가 있는 융중산의 반대편 산자락이 진원지였다.
두 사람은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뒤집혀 버린 산자락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대형이 갇힌 건가?”
“설마 제갈세가는 이 모든 걸 꾸민 건가? 미친 새끼들이 확실하네.”
굉음은 처음보다 줄었을 뿐 계속됐고, 간간히 땅이 파이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지진을 따라 움직이니 어느덧 제갈세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손쓸 사이도 없이 제갈세가 내원이 주저앉으며 땅 속으로 사라졌다.
콰콰콰콰콰콰쾅!
“좋지 않아.”
묘마의 말을 악마가 받았다.
“대형은 묻어버리고, 증거는 모조리 없앤 건가? 이렇게 된 이상 하오문은 우리를 흉수로 지목할 것이고, 잠시 후 도착할 무당파 또한 증인으로 세우려 하겠군.”
“공적으로 삼기 딱이지.”
두 사람은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훤의 생사는 처음부터 걱정하지 않았다.
얼마나 깊이 묻혔든 깔려서 죽을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탈출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예 산속에 갇힌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생사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일 터였다.
“나는 무형진기로 대형의 위치를 살펴볼게.”
“내가 무당파를 맞이하지.”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마주한 후 빠르게 좌우로 흩어졌다.
파팟!
*
이훤은 그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여겼다.
주제도 모르고 나대거나, 자만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회귀 전에는 소문만 들려도 도주하게 만들었던 당대 최강의 고수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신마의 심득이 더해질수록 확신은 더해졌다.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인외비경의 고수가 남긴 심득은 곧 고강함의 척도가 아니겠는가.
이훤은 그 중 다섯 가지를 익혔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나 세상 누구라도 두렵지 않았으나, 한 가지만은 이길 수 없다는 걸 깨우쳤다.
“이건 진짜 못 이기겠다.”
이훤은 동굴 전체를 메운 돌덩이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대자연의 위엄은 신마의 무공이라고 해도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신마(神魔)라고 새겨진 벽 쪽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진짜 준비 많이 했네.”
이훤은 제갈세가에 들어선 이후 마주한 천룡전의 흔적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당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여겨질 만큼 엄청난 계획이 아닌가.
시간과 장소, 거기에 돈과 사람까지.
무엇보다 이훤이 잘못생각한 것이 하나 있다.
놈들은 처음부터 이훤을 죽일 생각이 없었거나, 죽일 수 없다고 확신했으리라. 어차피 지금껏 사도들의 정보를 공유했다면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렇기에 죽이는 대신 가둬두려 했을 터였다.
그들이 진짜 하려는 것을 끝낼 때까지 말이다.
이훤은 걸음을 내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수틀리면 다 때려치우고 탈출할 수도 있으니 제대로 준비해놨어야 할 거다.”
하나 동굴을 걷는 내내 실망스러웠다.
좌우에 서가를 두고 수많은 서책이 빼곡하게 꽂혔다.
“이걸 내가 왜 봐?”
술을 만드는 방법이라도 적혀 있다면 모를까 어렵기만 한 서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 하나 천룡전, 혹은 소천기는 생각보다 이훤의 성향을 제대로 꿰고 있는 듯했다.
통로가 끝나는 곳에서 나타난 반구형의 공동이 증거였다. 바닥에 청석이 깔리지만 않았을 뿐 소천기 제갈삭이 있던 공동과 똑같았다, 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동물과 형상들이 가득했고, 천장에는 점과 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그리고 여덟 개의 커다란 구멍에는 각기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야명주가 박혔다.
그 아래 적힌 한 줄의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 신마의 완성은 결국 천총대화다.
문구를 보고 하늘의 문양을 살폈다.
아무래도 천제의 운행과 천문의 관계를 새겨놓은 듯했다.
“소천기가 익혔다는 천총대화라······.”
고개를 돌리니 통로의 좌우를 가득 채운 서가가 보였다.
그곳에 꽂혔던 서책은 주역과 천문에 관한 것이 아니었던가.
“보고 해석하라는 거냐?”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있어서 천공혈륜겁은 신마의 심득 중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신을 극한까지 단련하여 신마와 똑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후에야 악마의 심득으로 진법을 몸에 새기고, 천관심결로 상단전을 개화하며, 무형진기로 중단전을 활성화시킨다고 여겼다.
한데 소천기 제갈삭은 심득의 완성을 천총대화(天總帶畵)라고 주장했다. 그 말인즉슨 천총대화가 신마의 심득 중 끝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가짜를 남겼다가는······.”
이훤에게 금세 들킬 터였다.
그는 이미 빙의와 같은 형식을 통해 사자와 감각을 공유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이훤의 신위를 눈으로 직접 보고, 느꼈을 터였다. 그런 자에게 가짜를 던져놨다가는 금세 진위여부를 파악당할 것이 자명했다.
소천기는 그것을 알기에 진짜를 남겼으리라.
그리고 진짜였기에 이훤은 천총대화를 뒤로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강호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은 수두룩했다. 그 중 신마의 심득이라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던가.
“이 새끼! 진짜 머리 잘 쓰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중에 그런 것이 있지 않던가.
바람의 신과 태양의 신이 내기를 하여 길을 걷는 자의 장삼을 벗기려 했다. 바람은 쉴 새 없이 강풍으로 상대를 괴롭혔지만, 그는 옷깃을 여미며 버텼다. 그리고 태양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햇볕을 내리쬐었을 뿐이다. 그러니 상대는 스스로 옷을 벗고, 땀을 닦았다는 이야기였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건가?”
이훤은 웃었다.
그런 동화의 마무리를 알기 때문이다.
권선징악은 절대적이다.
“동화를 원한다면 동화처럼 끝내주마.”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천총대화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
검후가 물었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겐가?”
맞은편에 앉은 제갈삭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빛 한 점 들지 않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듯 간간히 침음을 내뱉었다.
“나는 신마의 심득과 관련이 없네. 그러니 자네의 경쟁자나 숙적도 아니겠지. 그러니 내게는 사실대로 이야기해도 좋지 않겠는가?”
검후는 슬쩍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마혈을 잡힌 채 혼절한 백소가 누워 있었다.
“저 아이의 천관심결은 천문의 영향을 받았기에 깊고도, 넓지. 그대보다 저 아이가 걱정이었어. 혹여 미심쩍은 기운에 변수를 만들 몇 안 되는 존재이니까. 하나 결국 오게 되었군. 그 덕에 저 아이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자 힘을 많이 뺐다네.”
“듣고 있자니 자네에게도 천문의 심득이 전해진 건가?”
제갈삭은 머리까지 뒤집어쓴 장삼을 당기며 키득거렸다.
“클클, 오랜만에 자네를 보고 있자니 오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해. 그래서 죽이지 못했던 걸까? 옛 친우를 만났으니 내기라도 할까?”
검후는 불과 얼마 전에 이훤과 내기를 했다가 코가 꿰인 적이 있지 않던가. 하나 자신의 예상보다 강한 백암자에게 당하여 포로가 되었으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지금은 상대의 뜻에 따라주는 편이 나을 터였다.
“뭔가?”
“내가 천관의 심득을 언제 얻었을 것 같은가?”
제갈삭의 말에 검후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검후가 망설이자, 말을 이었다.
“정답을 맞힌다면 자네의 한 가지 질문에 답해주겠네.”
“듣기에 취선관주는 개미굴 때 백암에게서 심득의 유출을 걱정했다더군. 하나 그 때라면 자네가 굳이 내기를 하지 않았겠지.”
“클클.”
“하나 내기에서 이기고자 내 신념을 굽힐 수는 없다네. 내가 가진 정보를 토대로 답을 하자면 개미굴 이후 백암자에게서 건네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검후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다.
제갈삭은 고개를 들어 검후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목소리뿐 아니라 눈빛조차 흔들림이 없다.
“그대는 여전하군.”
“무엇이 말인가?”
“오십 년 전의 올곧음이 변하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솨아아아아아아-
검후의 표정이 일변했다.
제갈삭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마차 안을 벗어나지 않았을 뿐 검후의 모든 것을 통제하기 위해 스며들었다. 오감이 뒤틀리고, 숨이 막혀왔다. 점차 생각조차 느릿해지면서 백치가 될 것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그대의 올곧음은 변하지 않았으나, 다른 이들도 그러할까?”
제갈삭의 기운은 한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때의 그들이 나이를 먹어 그대의 올곧음을 배웠다면 과거의 잘못은 사라지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조롱과 멸시. 약함에 대한 조롱과 추악함에 대한 멸시. 그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기에 생각을 달리할 이유가 없다네.”
“누구도 자네를 추하다 여기지 않았어.”
제갈삭의 입매가 처음으로 비틀리며 서늘한 한 마디를 쏟아냈다.
“그건 자네의 생각이지. 내 생각은 다르다네.”
검후는 허탈함에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고작 외모의 부족함으로 수십 년 동안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대가 천룡인가? 강호인들을 서로 의심하게 만들고, 문파를 뒤집어엎고, 세상을 더럽힌 게 고작 그런 이유에서인가?”
“클클. 슬슬 내가 원하는 반응이 나오는군. 자네는 정말 변하지 않았어. 그 나이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군.”
“그런 치기 어린 생각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을 떠올려보게. 어린 아이라고 해도 자네처럼 그러지는 않아!”
제갈삭은 장삼을 벗고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새겨진 수십 개의 생채기와 자상은 수십 년 전 스스로 새긴 것이다.
“어린 아이가 품은 마음이 언제나 밝을 것이라고 생각지 마시게. 어떤 아이가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그 끝은 천차만별이지 않겠는가?”
< 77, 동화(童話).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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