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소천기(小天機)의 유산. (2) >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다.
제갈세가의 모두가 죽은 상황에서 빈사 상태의 청년이 등장하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너 뭐야?”
고작 해야 절정이나 될 법한 청년이다.
위험의 수준을 논하자면 먼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적, 적.”
이훤은 귀찮음을 감수하고 청년의 등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녀석은 검붉은 피를 서너 번이나 한 움큼 토했다. 회광반조의 현상이라고 해봤자 몇 번의 호흡이 전부였다. 청년에게서 정상적인 대화를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연기를 했다
“그분은! 그분은 어찌되셨느냐?”
가산에서 이어진 통로의 끝은 가늠하기 힘들었다.
대신 반 장마다 꽂힌 횃불의 숫자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백여 개에 이르렀다. 그 후로는 길이 꺾이니 어디까지 뻗어나갔을지는 가늠할 수 없을 터였다. 이 정도의 비밀공간이란 소천기 제갈삭의 은신처를 제외하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니나다를까 청년은 혼미한 와중에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약을······. 돌아가는 길인데······. 적이······.”
예상대로 제갈삭의 수발을 드는 자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괜히 능력도 없는 녀석의 생각이 담긴 말을 들었다가 헷갈리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녀석의 등에 댔던 손을 떼는 순간 숫자를 헤아릴 여유도 없이 절명했다.
“흐음, 뭔가 있기는 있네.”
이훤은 입꼬리를 올린 채 걸음을 내딛었다.
백암자의 무위는 최소로 잡아도 절대지경일 터였다. 그리고 수하들의 무위는 이미 초절정임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시중드는 자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했다.
“그만큼 소천기를 찾기 위해 다급했거나, 일부러 살려뒀다는 뜻인데······.”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제아무리 지하 공간의 길이 미로처럼 뻗어있다고 해도 이훤의 기감이라면 어렵지 않으리라.
“직접 확인하면 될 일!”
*
백암진인은 그 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놈이 올 겁니다.”
하나 동굴의 중심부에 앉아 있는 괴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반구형의 공간을 가득 채운 기괴한 동물의 그림을 살펴봤고, 천장에 새겨놓은 천문을 관찰하며 간간히 숨을 내쉴 뿐이다.
“놈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 변하는 건 없었다.
백암진인은 자신 앞에 깔려 있는 청석을 내려다봤다.
사람 한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청석이 무려 삼백육십 개나 깔려 있었다. 하나 그를 비롯한 수하 중 누구도 청석 위에 발을 올리지 못했다.
“주작이 당했고, 청룡과 현무는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지금은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야 장포를 덮어 쓰고 있던 괴노인의 얼굴이 움직였다.
천장에서 내리꽂히는 기광으로 인해 정수리 부근은 붉게 번들거렸고,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뻥 뚫려 깊이를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검은 무언가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두려운가?”
“두렵지 않습니다. 일이 잘못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괴노인은 다시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체의 운행을 천문과 주역에 더하여 만들어낸 천총대화(天總帶畵)였다. 하나 그 안에 박힌 여덟 개의 묘안석은 여전히 여섯만 빛을 발했다.
“나는 두렵다.”
“······.”
“신마의 심득을 흡수하여 신마처럼 달려오는 그가 두렵다.”
그가 뼈만 남은 앙상한 팔을 들자 기사가 벌어졌다.
천장에 박혀 있던 묘안석이 저절로 뽑히더니 느릿하게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묘안석을 갈무리한 후 옆의 청석을 가볍게 눌렀다.
그그그극-
기관이 발동하면서 위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떠나라.”
“당신께서는······.”
“나도 갈 것이다. 청룡과 현무가 그러하듯 백호는 주어진 일을 마무리하라.”
백암진인은 고개를 조아린 후 수하들과 함께 계단을 따라 사라졌다.
“신마처럼 두렵기에 너 또한 신마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다. 가짜가 진짜처럼 행동하면 파탄이 일어나는 법, 너는 진짜가 되기 위해 이 함정을 지나치지 못하리라.”
괴노인은 기원을 하듯 읊조린 후 청석을 눌렀다.
그러자 그가 앉아 있던 청석들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위에 앉아 있던 괴노인마저 완전히 사라지기 전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러니 지금이야 말로 너를 가둘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리라.”
잠시 후 청석은 하강했을 때처럼 상승했다.
한데 청석 위에는 여전히 괴노인이 앉아 있었다. 다만 이미 절명하여 피 냄새를 서서히 퍼트리고 있는 것이 달랐다. 피 냄새가 퍼져나가는 와중에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훤은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미로를 한참동안 헤매야 했다. 이곳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장소가 아니었다. 최소한 수백 년에 걸쳐 조성된 것이 분명했다.
“아! 진짜 더럽네.”
제갈세가 내에서도 극비인 장소.
소천기 제갈삭이 숨어 있기에 제격이다.
하나 이훤이 짜증을 낸 이유는 크기나 복잡함과 관련이 없었다. 길이 아무리 복잡하고, 미로가 넓다고 해도 기감에 의지하면 문제 될 것이 없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어딘가 바람구멍을 내야 했다. 그러니 바람이 흘러들어오는 곳을 따라가면 될 터였다.
한데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였고, 천위와 인위가 뒤섞인 지형은 시시각각 오감을 흐트러트렸다.
그 와중에 본능은 끊임없이 위험을 경고했다.
“쯧.”
이훤은 혀를 찼다.
그는 절명곡의 생존자 중에도 우열(優劣)이 있다고 여겼다. 당시 생존자의 심경과 성향, 그리고 자질에 의하여 신마의 심득이 다르게 작용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실제로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던 벽력창 악재보다 오만하면서 원래 강자였던 남궁천운 쪽이 심득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하여 소천기 제갈삭을 얕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근골이 하품이었고, 머리 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니 어려울 것이 없다고 여겼다.
한데 난이도를 보면 이쪽이 극악이다.
“뭘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다니······.”
단순히 바람을 지우고, 오감을 차단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소리와 기감마저 통제했고, 혈륜을 흩뿌리면 멀리 가지 못한 채 흩어졌다. 마치 이 동굴 자체가 제갈삭의 심득인 것처럼 난해했다.
하나 함정도 없고, 단순히 복잡하기만 한 미로였다.
그렇기에 시간이 필요할 뿐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이훤은 괴노인과 백암진인이 대화했던 동굴에 발을 들였다. 종횡으로 열을 맞춰 깔린 삼백육십 개의 청석, 중앙에 괴노인이 앉아 있었다.
팟-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한줄기 지풍(指風)이 발출됐다. 하나로 시작된 지풍은 수십 개로 갈라져 괴노인의 몸 주변을 스쳐갔다. 동시에 괴노인이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장포가 벗겨졌다.
“죽었나? 이거 곤란하게 됐네.”
이훤은 혀를 찼다.
쭈글쭈글한 노인의 얼굴에는 수백 개의 자상이 넝쿨처럼 얽혀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움푹 파였고, 자상보다 많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자상(刺傷)의 상태로 보아 수십 년 전 생긴 상처였다. 그리고 자상이야 말로 괴노인의 정체가 제갈삭임을 증명했다.
“듣던 대로 정말 추하게 생겼네.”
제갈삭은 희대의 추남(醜男)이었다.
본래 부자와 고수는 미인을 얻지 않던가.
그렇기에 후기지수들은 원래부터 미남과 미녀가 많았고, 무공과 영약을 통해 몸의 조화를 추구했다. 하나 공부를 한 자는 앉아서 생활하니 비대한 체구이기 일쑤였고, 무공을 익혀 노폐물을 배출하지 않으니 호감 가는 인상이기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상황은 신마를 추적하던 중이다.
다른 이들이 경공을 펼칠 때 제갈삭은 말을 탔고, 자랑거리였던 두뇌는 빛을 보지 못했다. 자존감은 바닥까지 추락했고, 적대감만 늘어갔단다.
“뭔가 배경 설명은 참 좋은데 말이야.”
악마와 묘마가 제갈세가를 멀리하고, 심성이 순후한 검후만이 제갈삭을 만나겠다고 수락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게다.
“시체까지 등장하고 나니 더 의심스럽네.”
이훤은 지금까지 괴마들을 통해 들었던 제갈삭에 대한 정보를 기억에서 지웠다.
벌은 꽃을 찾고, 파리는 똥을 탐한다.
그 말처럼 추한 자는 아름다움을 증오하는 만큼이나 동경할 터였다.
저벅저벅-
이훤은 청석 위를 거침없이 걸었다.
함정이나 기관은 발동하지 않았다.
그는 괴노인의 시신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제갈삭은 신마의 심득으로 강림혼요술을 익힌 후 세상 모든 이에게 사랑이라도 받고 싶었던 거라고 주장하는 거냐?”
시신은 말이 없다.
하나 지금까지의 단서를 조합하면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어차피 절명곡의 생존자들은 심득을 교류한 적이 없고, 서로의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단다. 그러니 제갈삭이 강림혼요술을 익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터였다. 아닌 말로 형산파의 무쇄검(霧鎖劍) 축융노도(祝融老道)가 강림혼요술을 익혔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하나 모든 것이 너무 공교로웠다.
이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점과 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하나 그 중 여덟 개의 구멍에 집중했다.
흔적만 남아있기에 원래 무엇이 박혀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구멍이 여덟 개라면 자연스럽게 절명곡의 생존자와 팔황무극존, 그리고 강림혼요술을 익혔을 누군가가 떠올랐다.
결국 제갈세가의 모든 것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수십 년 동안 가짜를 준비했고, 오랜 세월 계획을 검토했으리라. 계획의 방대함만 따지자면 그럴싸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빈틈이 가득했다. 마치 철저하고 속이려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체를 알려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이쯤에서 이 계획의 빈틈을 발견했다고 거드름이라도 피우기를 바란 건가?”
이훤은 대놓고 시신을 살폈다.
언뜻 보기에는 제갈삭으로 보이는 모든 걸 다 갖췄다.
그리고 죽은 이를 상대로 강림혼요술의 유무를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나 이훤은 확신했다.
‘대놓고 가짜를 놓고 간 이유가 뭐지?’
그야말로 괜한 짓이다.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 중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 제갈삭은 천룡전의 중요 인물이다.
그래서 이훤은 혼란스러웠다.
절명곡의 생존자가 강림혼요술에 걸릴 줄은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지금까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일이 벌어졌기에 의아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러던 중 괴노인의 시신 옆의 청석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에는 모두 먼지가 쌓여 있는데 그곳에만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은가. 노골적으로 함정임을 드러내고 있지만, 망설임없이 눌렀다.
그그그극-
이미 그 어떤 기관이나 독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느긋하게 기관의 발동을 지켜봤다.
괴노인이 사라졌을 때처럼 청석이 통째로 하강했다.
그리고 청석 아래의 공간이 나타났다.
“뭐야? 저건.”
마치 신장이 창을 꽂았다가 뽑은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이다. 깊이는 이십여 장 남짓으로 여겨졌고, 그 아래에서 불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불빛이 비쳐진 곳에는 선명하게 신마(神魔)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도 노골적으로 은신처를 드러냈다.
이훤이 미간을 좁힌 사이 공간 전체가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붕괴할 것처럼 벽이 갈라졌고, 천장에서 흙과 먼지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나 이훤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았다.
혈륜을 극성으로 펼친다면 천장의 구멍을 통해 탈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니 이 함정의 본질은 동굴을 내려가 미지의 무언가를 확인하거나, 포기하고 탈출해야 하는 선택지이리라.
“굳이 지금 함정인 걸 알면서 기어들어갈 이유가 없잖아.”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천장의 구멍을 향해 솟구치려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장의 구멍을 통해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한줄기 빛이 시계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괴노인의 시신과 제갈삭의 진의, 천룡전의 음모와 신마의 흔적으로 찰나간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이곳은 혈륜이 뻗어나가지 못하기에 기감이 현저히 둔해지지 않던가.
그렇기에 신검합일의 상태로 빛살처럼 내리꽂힌 자가 지척에 이르러서야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자림주?”
흑의인의 아비인 사자림주가 칠채(七彩)를 몸에 휘감은 채 한 덩이 강기가 되어 내리꽂혔다. 동시에 동굴 전체가 갑자기 시간의 흐름을 빗겨간 것처럼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함께 죽자!”
사자림주의 목소리는 평범했다.
하나 절대지경을 지나 초월경에 들어선 자가 펼치는 동귀어진의 수법은 평범하지 않았다. 이훤 또한 전력을 다해 일합에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천룡을 찾아가야지. 왜 나를?”
이훤의 짜증 섞인 외침과 함께 혈륜이 붉은 장막처럼 흩뿌려졌다. 극도로 응집된 혈륜에 무형진기의 묘리를 담고, 천관심결의 감을 쫓아 사자림주의 전신을 헤집었다.
촤라라라라라락-
일합(一合)에 사자림주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하나 이훤은 초월경의 고수를 한 호흡에 죽인 기쁨을 표출할 사이도 없이 이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향해 몸을 띄웠다.
“이거 뭐야?”
일견하기에도 오장 남짓한 높이였다.
범인에게는 불가능한 높이였지만, 이훤이라면 한 호흡에 뛰어넘는 것도 가능했다. 하나 칠 장 가까이 솟구쳤음에도 천장의 구멍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미로에서 현혹됐던 오감이 아직까지 흐트러져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이것이야 말로 제갈삭이 만들어놓은 최후의 묘수였으리라. 쉴 새 없이 몰아붙이니 제아무리 이훤이라고 해도 놓치는 것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씨발! 꼭 찾아서 죽여 버린다!”
호기롭게 외친 것과는 달리 동굴 아래로 향하는 구멍에 몸을 던져야 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 76, 소천기(小天機)의 유산.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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