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91화 (191/226)

< 76, 소천기(小天機)의 유산. >

76, 소천기(小天機)의 유산.

신기제갈(神機諸葛).

제갈세가를 뜻하는 말 중 가장 유명했다.

신의 경지에 이른 혜안과 온갖 기술을 집대성한 중원의 머리이자, 상징이었다. 소림과 무당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지도 못하고, 남궁세가처럼 두려움의 대상은 아닐 터였다. 하나 지자를 논할 때에는 빠지지 않았다.

한 부분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였다.

수백 년 간 이어진 위치로 인해 제갈세가의 방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단지 사람만 늘어놓고 경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가 주변에 온갖 기관과 진법을 펼쳐놨다.

“정문 쪽으로 대표적인 게 팔진도를 변형해서 창안한 혼무팔진법이고,  좌우로는 중원 최대의 진법이라는 풍량진이 존재해요. 풍량진 안에는 온갖 기관을 설치해놨는데 독을 발라놨다더군요.”

구파오가가 독을 쓴다면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나 풍량진(風量陣)은 벽을 대신하니 들어온다는 건 월담을 의미했고, 도둑에게 독을 쓴다고 뭐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풍량진에서 나온 자가 없으니 진짜 독을 썼는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일단은 혼무팔진법 쪽이 안전할 거예요. 아무래도 혼무팔진법은 정문을 대신하고 있으니······.”

묘마는 말끝을 흐렸다.

이훤이 제갈세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선의진도 통과했는데 혼무팔진법이나 풍량진이나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악마가 헛웃음을 지으며 뒤따랐다.

“만독불침, 뭐 이런 건 아니겠지?”

“독만 불침이겠냐?”

“부럽네.”

“내 창술도 좀 부러워해라.”

묘마가 악마의 턱 끝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네 얼굴 아래 무형검.”

“야! 이 새끼야.”

악마는 벌레를 쫓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제갈세가가 멸문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 안에 검후와 한마가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나 그들은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다.

오랜 삶의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쏟아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다. 당황하고, 화를 내고, 흥분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다만 웃음 뒤로 잘 벼려진 기감을 한없이 퍼트린 채 걸음을 내딛었다.

이훤은 몸을 휘감는 묘한 기운에 미간을 좁혔다.

선의진을 통과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자연이 만들어낸 진법은 자격을 갖춘다면 언제나 환영해주었지만, 풍량진은 살아 있는 모든 걸 배척하는 듯했다.

‘백암은 자연스럽게 들어갔겠군.’

그 순간 쇠가 맞물리는 듯한 미세한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좌우에서 검게 번들거리는 대침이 수백 개씩 쇄도했다. 피하려면 앞으로 뛰어야 했지만, 혈륜을 휘돌리는 순간 저절로 튕겨나갔다.

철컹-

멀쩡하게 보였던 땅이 움푹 꺼졌다.

아래 수십 개의 죽창을 꽂아놨지만, 그냥 걷는 것으로 통과했다. 이미 외부의 상황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 강해졌으니 그저 무시하고 나아갈 뿐이다.

이훤이 모든 기관을 발동시켰기에 악마와 묘마는 편하게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풍량진의 효과가 사라졌다.

파팟!

이훤은 이제는 당연한 일처럼 담장 위에 올랐다.

제갈세가의 전경은 구릉 위에서 보았을 때와 차이가 없다. 다만 피 냄새가 더욱 짙어졌고, 연기로 인해 잿더미가 된 건물이 보였을 뿐이다.

“세가의 규모를 줄였다더니 진짜였네.”

악마는 주변을 살펴본 후 읊조렸다.

그의 말처럼 정문 쪽의 건물에는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버려진 건물처럼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 오히려 외곽에 있었기에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제갈세가의 인원은 이백 명이 채 못 되었지.”

이백 명이라면 많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인과 시비를 제외하면 몇몇 소수만 남았다는 뜻이다.

“내가 앞장설게.”

묘마가 무형검을 앞세워 걸음을 내딛었다.

외원은 말 그대로 텅 빈 상태였다.

기관이 수십 개나 발동했지만, 무형검을 뚫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내원에 이르러서야 일행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악마는 난도질을 당한 채 널브러져 있는 하인을 살핀 후 고개를 내저었다.

“칼을 수십 방이나 맞았는데 살아 있겠냐?”

묘마의 짜증 섞인 한 마디에 악마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두 사람 모두 백 년에 걸친 세월 동안 정파에 적(籍)을 두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의 죽음이 마뜩찮을 리 만무했다.

“무당파 검술이야.”

이훤은 무당장문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백암자는 스무 명에 가까운 제자를 뽑아서 떠났다고 했다. 그들은 대부분 이대제자였고, 문파 내에서도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강림혼요술에 노출된 스무 명이라······.”

그렇다면 회복은 불가능했다.

“만매만전을 익히면서 사형제들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을 거야. 한데 그들은 만매만전을 익혔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였겠지.”

“그 차이를 누군가에게 들키는 순간 의심받을 상황이었겠네. 이건 단순히 창천혈겁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닌가본데요. 대형의 존재가 저들을 조급하게 만들었어요.”

이훤은 동생들의 대화에 방점을 찍었다.

“조급함은 일을 빠르게 진행시키지만, 그만큼 흔적을 남기지.”

“뭔가 남겼을지도 모르겠군요.”

세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흩어졌다.

천룡이 직접 나타난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으니 함께 있을 이유가 없다.

이훤은 곧장 중심부로 향하는 대신 담장 위에 올랐다.

어차피 그가 찾는 건 검후와 백소였고, 혹은 어딘가 숨어 있을 소천기 제갈삭이다. 지금껏 절명곡의 생존자들이 숨어 있던 방법을 알았기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던 중 중앙에 우뚝 솟은 전각 뒤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그림자처럼 새카만 색의 건물로 전각과 한 쌍을 이뤘다.

‘저게 있으니 근처인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연스럽게 전각 뒤에 위치한 건물로 향했으리라. 하나 무당파의 천문자가 남긴 천관심결은 인위를 부정하고, 부조화를 걸러냈다. 그렇기에 오히려 탁 트인 후원에 위치한 야트막한 가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내려서자 묘마와 악마가 다가왔다.

“살아 있는 이가 없어요.”

“검후와 백소의 흔적도 없습니다.”

만약 백암자가 이훤의 등장을 예상했다면 검후와 백소만으로 막아내기 어려웠으리라. 사신사도의 등장 또한 염두에 둬야 했다.

“흐음.”

“중앙 전각에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평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도들이 죽어 있어요.”

“사인은?”

“무당. 최소한 초절정의 무인들입니다.”

예전 강호였다면 한 방파에 한 명이 있으면 지역을 주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초절정의 고수였다. 한데 지금은 신마의 심득이 공공연하게 퍼져나간 이후 고수들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백암과 스무 명의 문도는 모두 초절정 이상이라고 봐야겠군.”

“어지간한 중소방파는 물론이고, 구파오가라고 해도 이겨내는 게 쉽지 않을 거야.”

이훤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대형,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요?”

“이상한 거라도 있어요?”

그는 대답 대신 시신을 살폈다.

품안의 호패를 꺼내보니 상우청이라 적혀 있었다.

“알아?”

“몰라요.”

시신들의 호패를 모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 육지평. 이 자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요. 남궁세가의 만해각주인 제갈서도가 이 자에게 밀려난 후 본가에 의탁했지요.”

“맞아?”

묘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제갈서도가 말하기를 욕심 많고, 생각이 짧아서 단기전에 강하지만, 일문을 건사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했었죠. 수염이 짧고, 머리카락에 잿빛이 섞여서······. 맞네요. 여기 머리카락을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이훤은 잠시 후 시신을 살피다가 원하는 사람을 찾아냈다.

화산연맹의 발족식 당시 제갈세가를 대표해서 찾아온 자였다. 한때 무림맹 군사부 서열 이 위까지 올랐고, 제갈세가주의 왼팔이라 불리던 풍천목이다.

‘그 때 그 자가 맞아.’

이훤은 시체들을 모아놓고, 생각에 잠겼다.

왜 제갈세가는 가세를 일부러 줄였을까?

왜 제갈세가는 백암을 들여보냈을까?

왜 제갈세가는 이렇게 허무하게 멸문했을까?

어떤 것은 억지로 끼워맞춘 의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훤은 회귀 이후 수많은 협잡과 모략, 그리고 배신을 겪지 않았던가. 제갈세가의 소천기 제갈삭만 잡고자, 백암자가 일을 벌였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었다. 애초에 백암자가 제갈세가와 이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면 이미 예전에 소천기 제갈삭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했을 터였다.

‘왜?’

그 해답을 찾을 수 없기에 의심스러웠다.

그것은 죽은 제갈세가의 문도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아닌 말로 애초에 제갈세가의 문도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해도 잘 먹고 잘 자던 자들이에요. 아픈 곳도 없어 보이고, 멀쩡한데요.”

이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턱짓으로 가리켰다.

“배를 갈라 보자.”

“네?”

묘마와 악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망자의 시신을 훼손하는 건 굳이 정마를 가를 필요도 없다. 인간의 인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던가. 하나 이훤은 망설이지 않았고, 스스로 죽은 자의 배를 갈랐다.

“무나 죽순 같군. 이건 콩인가? 쌀은 없네.”

“대, 대형.”

악마는 이훤을 미친 사람 보듯 했다.

하나 묘마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혀를 찼다.

“좋아요! 내가 주방을 확인해 볼게.”

악마는 헛웃음을 연발했다.

양민의 죽음에 이어 망자를 모욕하는 행위까지 이뤄졌다.

“이건 좀······.”

그 때 주방에서 묘마가 욕설과 함께 튀어나왔다.

“이런! 씨발 새끼들.”

“뭐야?”

그녀의 손에는 솥이 들려 있었다.

“쌀밥이야. 먹은 흔적도 있어. 그리고 주방에 무나 죽순, 콩의 흔적은 없어.”

악마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아.”

묘마는 황급히 다가와 통 안에 든 고기를 씹었다.

흙을 씹는 것처럼 인상을 구기더니 땅바닥에 뱉어버렸다. 이훤이 검으로 사자의 위장에서 들어 올린 고기의 흔적 또한 땅에 내려놨다.

“제가 먹은 건 양고기에요.”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고기의 색깔이 검붉고, 잘 소화를 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건 개고기다.”

악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신의 발견된 장소에서 발견된 먹을거리와 사자가 먹은 것은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훤은 대답 대신 죽은 자의 호패를 확인했다.

“제문당주 혁련위속이네. 제문당이 뭐하는 곳이지?”

“제문당은 강호의 하오문과 개방에서 날아온 정보를 분류하고, 선별하여 가주에게 전달하는 곳이야. 씨발! 세가의 수뇌부에 속한 자가 주방에서 먹는 밥도 못은 걸 보면······.”

묘마의 말에 악마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훤이 입매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다 가짜다. 이제야 제갈세가가 수십 년에 걸쳐 가세를 줄인 이유를 알겠어.”

“그게 뭡니까?”

묘마는 악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직도 모르겠냐? 본래 제갈세가의 인원은 이천 명이 넘었어. 하지만 지금은 이백 명 밖에 되지 않아. 그 중 하인과 시비를 제외하면 오십 명도 많지. 이천 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오십 명 정도는 가능해.”

“그게 어떻게 가능해?”

“생각해 봐라. 햇빛이 들어오는 뇌옥에 오십 명을 가둬놓고, 밥도 먹이고, 잠도 재우고, 아프지 않게 돌봐줘. 그리고 때가 됐을 때 원래 있던 자들은 빠져나가고, 뇌옥에 가둬놨던 자들을 죽여서 늘어트려 놓는 거지. 그럼 이곳에 온 이들은 제갈세가가 멸문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아!”

악마는 탄성을 흘리며 말했다.

“아! 금선탈각의 계책이로구나.”

“응?”

“멍청한 년. 그냥 금선탈각이라고 했으면 이해했을 텐데 말을 배배 꼬니까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대형! 어떻게 할까요?”

묘마가 억울한 듯 발끈하려 했지만, 이훤이 황급히 손짓을 하며 말을 건넸다.

“아직까지는 다 가설이야. 그걸 증명해야겠어. 하오문과 제갈세가가 밀접하니 식량도 놈들이 대줬을 거야. 가서 데리고 와.”

“누구요?”

이훤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냥! 제일 높은 놈. 반각 안에 오라고 해. 안 오면 오늘부터 천룡전이고, 뭐고 간에 하오문의 지부만 찾아다니면서 다 죽여버린다고 해.”

악마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제갈세가를 뒤로 했다.

괴마들, 그 중에서도 특히 취마는 할 것 같은 자가 아니라 해버리는 자였다. 지금껏 이훤의 정보를 일선에서 모아온 하오문이라면 귓등으로 흘리지 못하리라.

“너는 악마가 돌아오면 그걸 확인해.”

“만약 이백 명이 먹을 식량 이상이 조달됐다면 가짜들을 숨겨놨다는 게 증명되겠군요. 그럼 악마가 돌아올 때까지 옥주와 한마의 흔적을 찾아볼게요.”

“좋아. 나는 소천기의 처소를 찾아볼게.”

이훤은 심처로 향했고, 묘마는 남았다.

“조심해요.”

“무슨 뜻이야?”

“대형도 오래 전에 겪었겠지만, 천관심결을 익힌 이후 감이 좋아졌어요. 근데 이곳은 뭔가 이상해요. 아직도 숨겨진 비밀이 많은 것 같아. 꺼림칙해.”

“천룡의 손길이 닿았을지도 모르는데 어딘들 그렇지 않겠어.”

이훤은 손을 흔든 후 처음 목적했던 가산(假山)으로 향했다. 후원의 조경을 위해 가짜로 만든 산은 겉으로 보기에 이상한 점이 없었다.

“제갈세가니까 기관일 텐데······.”

이훤은 가산을 살피다가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갈세가 내에서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데 미약하게나마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고, 귀를 기울이는 순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호흡이 잡혔다.

“후우!”

이훤은 눈을 감은 채 혈륜을 흩뿌렸고, 그것은 무형검의 형태로 가산을 둘러쌌다. 그리고 일제히 가산 속으로 파고들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무형검은 가산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과 만날 때마다 멈췄고, 모든 무형진기가 활동을 멈추니 가산 내부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폭약은 없고, 기관은 복잡하니.’

이훤은 주먹을 들었고, 그대로 가산을 찍었다.

콰직!

주먹에 실린 기운이 반 장 이상 파고들었고, 서너 방을 연이으니 사람이 들어갈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직진이 제일 편한 법이지.”

이훤은 슬쩍 입꼬리를 올린 후 가산에 들어섰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기치 못한 상대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 76, 소천기(小天機)의 유산.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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