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매화를 심으면 해결될 거야. (2) >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천공혈륜겁은 기본적으로 심신을 극한까지 단련시켜 완전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에 의술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거기에 십전진뇌공과 천관심결, 그리고 무형진기를 더했으니 타인까지 살피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그가 보았을 때 천암자의 상태는 조금 전과 달랐다. 스스로 다면을 논했듯 그는 감정을 숨기고, 가면을 쓰는데 능숙한 자였다. 하나 혈륜으로 살펴본 몸의 반응은 더없이 정직했다.
‘동요하는군.’
청암은 다행히 무사했고, 백암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장문인이 이훤을 보고 동요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나 대놓고 물어보는 건 하수나 할 짓이었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술 한 잔 하죠.”
제안이나 부탁이 아니라 명령과 같은 한 마디였다.
한데 장문인은 또 그것을 흔쾌히 수락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였다.
“아! 그 전에 이제는 그만 싸워도?”
이훤은 장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씨앗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잠시 방향을 가늠한 후 손가락을 튕겼다. 혈륜에 휘감긴 씨앗은 마치 화살처럼 하늘로 솟구쳤다고 자소궁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그걸로 되겠소?”
“힘은 악마가 위일라도 섬세함은 묘마를 따르지 못합니다.”
장문인은 문도를 불러 말을 전달하고 뒤를 따랐다.
“그도 그렇군. 여인들은 작은 단초로도 많은 걸 알아차린다고 하지 않는가.”
완전히 틀리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묘마는 시간이 흐를수록 여인의 성품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검후는 본래 몸의 주인인 청하의 혼백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한데 장문인의 말은 의외다.
한평생 도가의 성지에서 살아온 사람이 여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술을 마시자는 말에 별다른 내색 없이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그쪽 분야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건가?’
아니나다를까 장문인이 몰래 내온 술은 제법 귀한 종류였다.
“이제 청암 사형의 용태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겠소?”
“그 전에 받아야 것이 있는데.”
장문인인 천암자는 침음을 흘리더니 반으로 뜯긴 서책을 꺼냈다.
“무사히 돌려줄 것이라 믿네.”
“이래봬도 화산연맹에 몸을 담고 있는 처지요.”
“자! 그럼 이제 사형의 상태가 어떤지 설명해주게.”
청암자의 상황을 알게 되면 백암자를 내통자라고 비난한 이유가 자연스럽게 설명될 것이다.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 줄 아는 자였다.
이훤은 술잔을 비운 후 말을 꺼냈다.
“후우, 이번에 남궁세가의 창천평 혈사를 거치며 알게 된 것이 있어요. 강림혼요술의 술법은 알지 못하나, 방식은 알게 됐죠. 그로 인해 판단하면 청암자는 최근 며칠 사이에 강림혼요술을 접했습니다.”
장문인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다만 미간의 주름은 횟수를 더해갔다.
“본래였다면 이미 미혹되어 시전자의 뜻대로 움직였을 겁니다. 하나 그는 저항했지요. 아마 시전자도 아록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지요.”
이훤의 물음에 장문은 짧은 한 마디를 던졌다.
“왜?”
“맞아요. 청암자를 섭혼할 수 있었다면 무당파의 모두를 미혹하는 것도 가능했을 겁니다. 하나 상대방은 오직 청암자에게만 시전을 했지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장문인은 침음을 내뱉었다.
“백암 사형이 무당산을 떠나기 위함인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청암자가 저렇게 된 것이 언제인가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창천평 혈사가 알려진 날 밤.”
“그리고요?”
“삼경 무렵 시동이 발견했소. 귀곡성으로 인해 모두가 모였고, 점혈은 통하지 않았소. 다행히 청암 사형이 스스로 버텨내기 시작했지. 해서 백암 사형이 나섰소.”
예상대로 그 후의 상황은 백암자가 주도했단다.
“그러니까 강림혼요술에 당했다가 아니라 폭주한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말했네. 그리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겼었지.”
백암자는 당장 산문을 걸어 잠그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변했다. 하나 한평생 도가의 틀 안에서 살아온 이들이 강림혼요술을 풀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혼잡한 상황에서 누군가 외쳤다.
“분명 그렇게 말했네. 제갈세가에는 답이 있을 거라고.”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제갈세가는 수십 년부터 출입을 통제하고, 직계라고 해도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출가시켰다. 예전과 달리 모든 지식과 해법은 그들끼리만 공유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제갈세가에 도움을 청하는 쪽으로 대화의 방향이 바뀌었다.
“제갈세가는 오래 전부터 봉문만 하지 않았을 뿐 외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했을 텐데.”
“본파가 위치한 무당산과 제갈세가의 융중산은 가깝지. 거리는 화산과 종남이 더 가까울지 모르나, 친밀함은 따르지 못할 걸세. 아무래도······.”
“그쪽은 머리고, 이쪽은 힘이니까.”
“솔직히 그랬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경쟁할 이유도 없고, 유불도의 도리는 제갈세가도 중시하니 오히려 한 몸처럼 가까웠지.”
이훤은 장문인의 설명을 들으며 검후의 말을 떠올렸다.
신마를 추격하던 당시 후기지수들은 친해질 여유도 없었다고 했다. 각파의 기대주였지만, 갓 장로에 올랐거나 내정되었던 시기이니 공을 세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았다. 그렇기에 몇몇만 교류를 했었고, 그 중 대다수가 절명곡의 생존자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생존자를 골라낸 것도 희한하네.’
어쨌든 검후는 그 중 제갈세가의 소천기 제갈삭과 무당파의 천문자를 챙겼단다. 제갈삭은 무공을 펼칠 수 없어 의기소침한 상태였고, 천문자는 애초에 살상을 즐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장문인의 말처럼 추구하는 바가 다른 문파에 소속됐으며 경쟁할 이유까지 없었던 게다.
“혹시 제갈세가의 생존자인 소천기 제갈삭이 무당파를 찾아온 적이 있나요? 아니면 반대의 경우라도.”
“그건 알 수 없네. 천문진인께서는 오래 전부터 풍천동에 은거하셨고, 무암자가 수발을 도맡았지. 그 후에는 종초홍이 인계받았다네.”
이훤은 침음을 흘렸다.
장문인은 문파를 관리해야 하니 속사정을 모를 수 있다.
하나 무당쌍선은 아닐 터였다.
어용협에서 천관자의 비급을 반으로 찢었을 때의 경우를 보면 명확했다.
문파의 큰 어른이 남기신 유품이 반으로 찢겼다.
하나 두 사람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백암자는 이미 내용을 보았고, 천룡전에 전달했으니 효용을 다했다고 여겼으리라. 청암자는 천문자의 비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으니 그 수밖에 없다고 여겼을 터였다.
‘만약 두 사람이 교류했고, 서로의 심득에 영향을 끼쳤다면?’
그렇다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어쩌면 회귀 전 이훤이 받아들였고, 회귀 후 백소를 향해 전해진 천관심결은 제갈삭의 심득이 섞였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이훤은 심호흡을 했다.
아직 명확하게 정해진 일이 아니기에 더 이상 고민하기를 멈췄다. 지금은 두 사람이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백암자의 행적을 추론해야 했다.
‘내가 절명곡의 생존자들을 밝혔을 때에도 제갈세가는 외부인의 출입은 엄금이라고 표명만 했지. 그렇다는 건 제갈삭 또한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아. 평소였다면 그를 만나는 건 불가능해.’
하나 서로의 모든 걸 알고 있는 막역지우의 제자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절명곡의 생존자는 아니지만, 어찌됐든 천룡 또한 신마의 심득을 익혔잖아.’
제갈세가의 사람이라면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백암자가 제갈세가로 들어갔을 경우를 떠올려봤다.
탁-
이훤은 술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는가?”
“수백 년을 내려온 무당파가 망하게 생겼는데 술이 넘어가시오?”
“그게 무슨 망발인가?”
“백암자가 청암자를 이용해서 제갈세가로 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자네의 말이 맞는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보면 병을 고치러 갔을 리가 없으니······.”
장문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설마 소천기의 심득을 노리는 건가?”
무당쌍선이 천룡전의 주구가 된 것도 망신 중의 망신이다. 하나 백암자가 만에 하나 소천기를 해하기라도 한다면 무당파는 오랫동안 지탄의 대상이 될 터였다.
“맙소사!”
이훤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먼저 가겠소.”
장문인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장탄식을 흘리더니 외쳤다.
“청료! 청료! 밖에 있느냐? 일대제자를 모두 모아라! 지금 당장 제갈세가로 갈 것이다!”
*
자소궁 밖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했다.
악마가 십전진뇌공을 펼친 이상 무당의 문도만으로 막아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일대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매화의 씨앗이 날아왔다. 이훤의 예상대로 묘마의 무형진기는 지붕을 넘어 날아온 씨앗을 놓치지 않았고, 적당한 시기에 악마를 만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무당파의 자존심은 완전하게 구겨지지 않았고, 죽은 자도 없기에 더 이상 악마를 핍박하지 않았다.
“클클, 아까 봤지? 내가 봐준 거야.”
악마는 그대로 충분히 만족했다.
아닌 말로 일대제자들은 천관심결과 만매만전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들 모두에 싸운다면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웃으며 상대하기는 곤란했으리라. 무엇보다 적진에서 유독 약한 그가 아닌가. 하나 백 년 동안 이어진 삶으로 축적한 내공을 활용한다면 마지막에 서 있는 건 그였으리라.
“제발 닥쳐줘.”
“역시 사내들끼리 땀을 흘리며 병장기를 주고받아서 그런지 상쾌하군.”
묘마 또한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위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십전진뇌공이 멋들어지기는 했다.
“너만 그렇게 생각할 걸? 무당파 문도들이 널 씹어 먹고 싶어 하는 표정이 안 보이냐?”
“허허, 사내들은 그렇게 꽁하지 않아.”
“웃기네. 내가 장담하는데 앞으로 무당파와 산동악가가 교류할 일은 없을 거다.”
이훤이 나타난 건 그 때였다.
악마는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웃으며 다가가 꼬리를 흔들려고 했다.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며 술을 마실 생각에 회가 동했으리라.
“제갈세가로 간다!”
“어, 갑자기?”
“검후와 한마가 위험해!”
악마와 묘마의 표정이 돌변했다.
검후는 몇 남지 않은 지인이었고, 한마는 드디어 생긴 막내가 아니던가. 두 사람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이훤을 따라 경공을 펼쳤다. 반각 후 장문인을 필두로 무당파의 문도 백여 명이 산자락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삼마(三魔)의 신형은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빠르다.
파파팟!
하나 그 중 취마의 속도는 뒤따르는 묘마와 악마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마의 심득 중 대부분을 체득한 상태가 아니던가. 암천군림보는 천하제일경공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안 되겠다. 먼저 간다!”
악마는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마치 지금까지 두 사람과 발을 맞춘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훤은 그 말을 증명하듯 한차례 더 가속하여 내달렸다. 그리고 열을 헤아리기 전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쯧! 너랑 발맞추다가는 한세월이겠다.”
묘마마저 악마를 향해 혀를 차더니 속도를 올렸다.
조금씩 뒤처지던 악마가 표정을 구긴 채 일갈을 내질렀다.
“나는 창을 들어서 그래!”
악마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두 사람을 뒤따랐다.
무당산과 융중산은 같은 산맥의 지류였다.
그렇기에 방향만 맞춘 채 내달리면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왜 멈췄어? 길을 잃었나?”
악마는 열 호흡 정도 차이로 도착한 자신의 경공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두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 웃음기를 지웠다.
“빌어먹을.”
산 아래 보이는 제갈세가의 거대한 전경 어디에도 불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있자니 코끝에 피 냄새가 맴도는 듯했다.
“늦은 건가?”
< 75, 매화를 심으면 해결될 거야.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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