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89화 (189/226)

< 75, 매화를 심으면 해결될 거야. >

75, 매화를 심으면 해결될 거야.

이훤의 말에 장문인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강림혼요술을 표출하고 있는 괴노인은 청암이 분명했다. 한데 어찌 무당산을 떠난 백암을 내통자로 의심한단 말인가.

“백암 사형은 제갈세가로 떠났네. 바로 청암 사형을 고치기 위해서지. 머릿속에 담은 지식과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으로는 천하제일로 손꼽히는 제갈세가로 말일세.”

이훤은 혀를 찼다.

“쯧.”

무당파 문도가 이훤의 무례함을 탓하려는 순간 나직한 신음과 함께 허물어졌다. 그뿐 아니라 주변에 숨어 있던 무인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꼴이 되었다.

장문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동자만 굴려 문도들을 살폈다.

‘허공을 격하고 마혈만 골라서 점혈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그리고 이훤의 행동은 의미하는 바가 분명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장문인의 물음에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무당은 화산과 다르네.”

“무슨 의미인가?”

“화산이었다면 동료를 구하겠답시고 달려들었겠지. 하난 당신은 잠깐의 생각으로 내 의도를 짚어냈잖아.”

이훤의 말은 칭찬이자, 탄식이었다.

장문인은 자신의 예상이 옳았음을 확인했기에 이훤을 달래듯 말을 건넸다.

“일문의 장문은 여러 얼굴을 지녀야 하지. 그리고 문파의 세를 확장하고, 유명해지고, 깊어질수록 그 숫자는 늘어난다네. 화산의 연맹주도 그런 과정을 밟는 게지.”

강호의 경험은 조급함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메워질 것이라는 충고였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당파의 장문인인 천암자는 그의 말처럼 여러 얼굴 중 하나를 내비쳤을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적인 호감보다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자! 취선관주께서는 문도들을 재워놓고, 내게 어떤 고견을 들려주시려는가.”

“자소궁 앞에서 보니까 나보고 취마라던데? 언제부터 관주가 된 거요?”

천암자는 여유로움을 유지한 채 대꾸했다.

“선의진을 지났을 때부터.”

선의진은 자소궁 주변의 풍광이 신선의 옷자락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진정 신선이 걸치는 천의처럼 자연스럽게 항마의 기운을 발산했다.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이훤은 혀를 찼다.

‘역시 노회한 강호인과 대화하는 건 피곤하군.’

그러니 빙빙 돌릴 필요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뭘 해주겠소?”

“뭘 해줄 수 있는가?”

“청암의 치료, 배신자의 처벌, 향후 연맹과의 관계 개선.”

천암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첫 번째만 혹할 뿐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마뜩치 않군. 어차피 본파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훤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세 번째는 제안이 아니외다.”

명령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취선관주의 언행은 종잡을 수 없다더니 그 말은 틀리지 않았군. 그렇게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본 파는 더더욱 따를 수가 없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장문인은 다면상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어차피 우리끼리만 알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

“고작 자네의 기분을 만족시키고자?”

이훤은 턱짓으로 자소궁 밖을 가리켰다.

“동생들이 무당파 문도들을 막기 위해 생사를 걸고 있소. 그러니 나도 대형으로서 선물은 가져가야지 않을까?”

“만약 자네의 동생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본 파의 문도가 공을 자랑하기 위해 벌써 도착했겠지. 그리고 본 파의 문도들이 죽었다고 해도 찾아왔을 게야. 내가 나서야 할 테니까. 그 말인즉슨 자네 또한 본 파와 끝을 보려 함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화산연맹과 다른 길을 가시려오?”

장문인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만들어낸 절진, 선의진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눈앞에서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는 그러한 선의진을 장막처럼 걷어내고 들어온 상대였다.

“함께 하지. 하나 고하를 나누지 않겠네.”

이훤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무당파와 대등한 관계라면 충분했다.

“천문진인이 남긴 심득을 봐야겠소. 그리고 천문진인이 귀천한 이후 그의 일대기를 무당파에 남겼을 터, 그것도 봐야겠소. 그리고 백소는 내 동생이 되었으니 더 이상 무당의 개입을 원하지 않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문인은 이훤이 내민 주머니를 보고 탄성을 흘렸다.

“허! 그 소문이 진짜였던가?”

“벌써 소문이 났소?”

“산동악가와 종남파는 물론이고, 자네가 거쳐 간 모든 방파에 매화를 심었다더군. 하면 그 주머니 안에는 매실이 들어있지 않겠는가?”

이훤은 처소를 나선 후 풍광 좋은 자리를 골라 발을 굴렀다. 바가지를 수십 개나 채울 법한 흙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안에 씨앗을 던져 넣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매화를 심었으니 모든 게 해결될 거요.”

“자네가 마음먹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은유적 표현인가?”

이훤은 눈을 흘겼다.

“평소 재미없다는 말을 많이 듣지 않소?”

장문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여러 얼굴 중 농담을 하는 역할은 없다네.”

“한데 장문인은 청암자와 막역으로 알고 있는데 표정이 꽤 밝군요.”

장문인은 쓴웃음을 흘렸다.

“자네가 여기까지 와줘서 솔직한 속내로는 안심하고 있다네. 장문의 입장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자네를 인정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아! 그리고 나도 만매만전을 읽었네. 많은 도움이 되었다네.”

“공짜 좋아하면 벌 받소.”

“표정이 풀어진 걸 보니 청암 사형을 살펴보는 게 끝났나 보군.”

“당신은 최근에 본 사람 중 가장 재미없고, 눈치 빠른 사람이오.”

“농담이라도 배워올 테니 사형을 부탁하네.”

이훤은 그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섰다. 청암진인을 생각할 때마다 덩달아 떠올랐던 술 냄새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저 기괴한 신음과 썩은 내가 진동할 뿐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이 없는데.”

청암진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희노애락을 표출했다. 일견하기에도 그는 지금 강림혼요술에 대항하는 상태였다. 강호에서 흔히 사람의 마음을 미혹(迷惑)하는 사술이었다면 청암진인을 곤란하게 만들지 못했으리라. 하나 신마의 심득으로 만들어낸 강림혼요술은 사술의 경지를 넘어 절대적인 섭혼술(攝魂術)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마음이 아니라 혼백 자체를 먹어치우는 것이 강림혼요술이었다.

한데 청암진인은 그러한 섭혼술에 대항했다.

지고의 경지에 오른 고인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행복해야 하는데.”

서글픔이 잔뜩 스며든 한 마디였다.

장문인은 이훤의 등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술을 즐기지 않지만, 청암자와 이훤의 공통 관심사를 알기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저 자가 저렇게 서글퍼 하는 것을 보니 사형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구나.’

비록 거래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진심으로 취선관주에게 빚을 진 것처럼 여겨졌다.

하나 그건 이훤의 표정을 보지 못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이훤의 표정은 장문인에게 보여준 진중한 표정도 아니었고, 서글퍼보이지도 않았다.

‘이게 웬 떡이냐?’

이훤에게는 천룡전이라는 숙적의 제거도 중요했지만, 신마의 심득을 완성하는 것도 목표 중 하나였다. 그리고 후자를 이뤄내는 순간 전자는 자연스럽게 달성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제갈삭과 축융노도, 그리고 천룡의 심득이 필요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여덟 개의 심득을 모두 모으면 신마의 진의(眞義)를 알 수 있을 듯했다. 절대 죽었을 리 없는 자가 죽음을 가장한 이유를 말이다.

하나 그 과정은 지난했다.

제갈삭은 수십 년 째 자신을 가뒀고, 축융노도는 행방불명이며, 천룡은 진체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견문지식은 필수였다.

그 중 하나인 강림혼요술을 몇 번이나 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뭐라도 할라치면 상이 깨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데 드디어 단초가 나타났다.

이훤은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로 청암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살아 있는 강림혼요술이라니!’

본래의 청암진인이라면 절대로 강림혼요술을 버텨내지 못했으리라. 하나 두 가지 이유에서 지금까지 한줄기 이성을 부여잡은 채 버틸 수 있었다. 첫 째는 강림혼요술에 걸린 지 오래되지 않았고, 둘 째는 만매만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최대한 버텨주시오.’

자신이 강림혼요술을 파고들 수 있도록 말이다.

성공을 자신했다.

신마의 심득 중 팔황무극존이 깨우친 천공혈륜겁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생존자들의 심득마저 담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넓은 땅이었다. 또한 신마가 제아무리 제각기 다른 깨달음을 전했다고 해도 사람이 생각하는 건 대부분 비슷했다. 그렇기에 신마의 심득들은 아예 다른 것처럼 여겨지지만, 서로 얽히는 부분이 존재했다.

이훤은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솨아아아아아-

그가 청암진인을 중앙에 두고 양 손을 뻗는 순간 팔황과 무극이 번뜩였다. 동시에 금빛과 핏빛이 동시에 일어나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하나 종래에 이르러서는 붉은 안개만이 일렁이며 이훤과 청암진인을 휘감았다.

그리고 청암진인의 신음과 비명이 사라졌다.

*

천암자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훤을 믿는 것과 별개로 청암자에 대한 걱정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불과 이각이 흘렀음에도 수십 일을 서 있었던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기운이 바람에 실려 서서히 흩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웃음과 울음, 노호성은 들리지 않았다.

청암진인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게다.

‘아!’

천암자는 그제야 묘한 광경을 눈치 챘다.

이훤이 만들어낸 핏빛 기운은 더없이 음습하고, 끈적거렸다. 조금만 휘감겨도 평생 동안 떨쳐낼 수 없을 것처럼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취선관주의 무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당금 강호에는 이훤의 일거수일투족이 끊임없이 회자됐다. 하지만 무공의 연원이나 명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 않던가. 그저 화산의 숨겨진 무공이거나, 만매만전으로 만들어낸 신위라고 여길 뿐이다. 하나 혈기가 번뜩이면서 신위를 드러낼 때마다 사마외도의 무공이라는 비난도 잇달았다. 다만 증거가 없고, 행적이 워낙 대단했기에 묻혔을 뿐이다.

‘사마외도는 아니야.’

이곳은 선의진으로 만들어진 지역이 아닌가.

삿된 기운은 저절로 정화되는 항마의 공간이다.

그 말은 곧 이훤의 기운이 자연지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화산의 숨겨진 무공이라는 가설도 신뢰를 얻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 또한 수백 년 간 정파의 태두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증좌를 남겼다.

그 중 이훤의 무공과 흡사한 건 전무했다.

‘만매만전만으로 저 정도를 이뤄낸 것인가?’

그러던 중 미간을 좁혔다.

너무나 당연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떠올린 게다.

‘여섯에 한 명이 더해졌으면 또 한 명이 더해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러던 중 이훤이 모습을 보였다.

청암진인은 가부좌를 트는 대신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보아 위기를 넘긴 듯 보였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마저 존재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천암자는 환하게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하늘이 도우셨구려. 그리고 취선관주가 본 파와 사형을 살렸소이다.”

속에 품고 있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이훤이 지금껏 비밀리에 간직한 것이라면 폭로됐을 때의 반향도 엄청날 터였다. 천암자는 지금 당장 그 반향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본 파의 은인이 아닌가.’

그런 식으로 회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 75, 매화를 심으면 해결될 거야.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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