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배신자는 누구인가? (2) >
제암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켜 보이겠습니다. 이틀 동안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 때 외마디 비명과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암(巖)자 배의 넷째인 수암자(修巖子)다.
그는 입문했을 때부터 심성이 올곧았지만, 병약했다. 그런 그가 무당파의 도맥을 잇게 된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장문인은 문파의 대소사를 수암자와 의논하여 명분에 위배되지 않도록 힘쓸 정도였다.
“장문 사형! 봉문이라니요.”
“사제, 그렇게 되었네.”
수암자는 노구를 이끌고 황급히 다가왔다.
“안 됩니다. 사형에게 저런 일이 생긴 건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한평생 사형을 봐았지만, 천룡전의 하수인이라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러니 더더욱 봉문은 안 됩니다. 당금 강호에서 천룡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취선관주입니다.”
“그렇겠지.”
장문인의 대꾸는 점점 짧아졌다.
하나 수암자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라면 사형이 저리 되신 이유를 알아낼 것입니다. 그에게 맡깁시다. 비록 취선관주에 대한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뉜다지만, 화산에서 벌인 일을 보면 대화가 통하지 않을 사람이 아닙니다!”
쾅!
장문인은 문을 닫고, 돌아섰다.
“화산과 무당은 다르다. 무당은 누대에 걸쳐 강호의 중심이었고, 한 번도 좌도를 걸은 적이 없어. 화산이야 쇠락했다가 부흥하면 그 뿐이겠지. 하나 본파가 흔들리는 순간 정파 무림 전체가 흔들려! 이제 정파의 무인들은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강호의 큰어른이라 할 수 있는 무당의 쌍선도 저 꼴이 됐다. 아비와 어미, 사부와 자식이라고 해도 믿지 않는 지옥도가 열릴 것이야!”
수암자는 탄식했다.
“하아, 하나 진정한 이유는 무당의 위세와 사형의 명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되었네.”
장문인은 수암자를 뒤로 한 채 제암자에게 외쳤다.
“그들을 가리켜 괴마라고 한다지? 본산에 마를 들일 수는 없는 법! 사제는 문파의 총력을 기울여 방비하라!”
“그리 하겠습니다.”
제암자는 장문인이 마음이 바뀔 것을 우려한 듯 빠르게 돌아섰다. 그의 머릿속에 이훤이란 존재는 취선관주나 만환검제가 아니라 취마로 새겨졌다.
*
이훤은 무당 본산의 상황을 알 수 없기에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무당산을 절반이라 올랐지만, 아직도 앞을 막는 자가 없다. 그것은 곧 무당의 문도들이 한데 뭉쳐 있음을 의미했다.
“잘 됐어. 한 번 훑어보기만 해도 나쁜 놈을 모조리 골라낼 수 있겠네.”
악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당파가 그들의 제자를 순순히 내어줄까요?”
이훤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정파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말이 있잖아.”
묘마는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말을 덧붙였다.
“제마멸사는 정파의 근간이니 정세와 친분에 얽매이지 마라는 것이 제일 유명하죠.”
“그래, 그거야.”
나쁜 놈을 때려죽이는데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무당파나 소림사에 있다고 봐준다면 힘없이 죽어간 악당 놈들이 너무 불쌍해지지 않던가.
그러니 공평하게 모조리 때려죽이는 거다.
“그럼 뒷말이 나오지 않지.”
“통쾌하기는 한데 영 적응이 안 되네요.”
악마의 투덜거림에 묘마가 조소를 흘렸다.
“이래서 거지에게 만금을 줘봤자, 쓰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무당파 전에 너부터 꼬치로 만들어줄까?”
이훤은 고삐를 슬쩍 흔들었다.
선두로 나간 후 두 사람을 돌아봤다.
‘꽤 재밌는 관계야.’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온갖 사람들과 어울리기 마련이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가장 더럽고, 치사했던 동행은 죄다 노인들이었다. 특히 고수가 되어 독보강호하기 전에는 노비처럼 부려먹는 자들이 즐비했다.
하나 묘마와 악마는 달랐다.
이훤의 강함을 순수하게 인정했고, 무리의 지도자임을 받아들였다. 저들은 이미 이권과 명예보다 새롭게 주어진 삶을 가치 있게 쓰고자 했다. 일평생 지켜온 가문을 자식들에게 떠넘겼을 정도로 말이다.
‘시끄러운 걸 빼면 이 만한 노인네들이 없지.’
탈마의 말에 의하자면 저들은 이틀에 다섯 번꼴로 싸운다고 했다. 그 중 말싸움이 세 번이고, 실제로 무력을 행사하는 건 두 번이다. 하지만 피를 흘리거나, 부상을 입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싸웠던 화제는 다시 꺼내지 않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울렸다.
서로가 아는 게다.
이제 와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거나, 될 수 있는 사람이 몇 남지 않았음을 말이다.
“상청문이 닫혀 있어.”
“봉문이라는 뜻이지.”
악마는 묘마의 대답에 미간을 좁혔다.
“우리가 오는 걸 알면서?”
“괴마를 들여서 본산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거나, 뭔가 켕기는 것이 있다는 증거겠지.”
“너무 극단적인 이유인 걸. 하지만 동감이야.”
강호인들은 이훤을 가리켜 정사지간의 최강자라 불렀다.
하나 창천평에서 명백하게 정파를 위해 헌신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취마라 칭하고, 괴마를 모았음에도 공적으로 몰리지 않았다. 무림맹의 맹주가 직접 초청을 할 정도이니 누가 그를 탓할 수 있으랴.
“세상이 순리대로만 돌아갔다면 신마의 심득이 내게 전해졌을 리 없지.”
이훤은 히죽 웃으며 상청문 앞에 섰다.
하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걸?”
“왜?”
“상청문 너머에 엄청난 숫자가 모여 있어.”
“무당이겠지.”
“한데 강림혼요술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 아예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것처럼 순수해. 분명 천룡전과 연결된 놈이 있었는데 말이야.”
악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형이 틀릴 리 없으니······.”
묘마가 말을 받았다.
“무당파에 무슨 일이 생기기는 했군요.”
악마가 먼저 나섰다.
“한 번쯤 정말 해보고 싶었어. 강호에서 으뜸가는 위세를 자랑하는 무당파의 문을 이렇게!”
그가 창을 휘두르다가 내리치는 순간 벼락이 꽂히는 듯했다. 그리고 동시에 무당파의 담장이 굉음과 함께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겁쟁이 녀석. 담장을 부술 거면 말은 왜 하는 건데?”
“생각해보니 무당의 현판을 건드렸다가는 정말 공적으로 몰릴 게야.”
“너 다운 변명이다.”
이훤은 자신들만의 대화를 주고받는 이들에게 손짓을 했다.
“저쪽도 신경 써줘야지.”
자소궁 앞에는 무당파의 문도가 가득했다.
그 숫자가 백오십여 명에 이르렀다.
일대제자가 모두 나섰고, 무당의 자랑이라 불리는 십학 또한 저마다 제자들을 거느렸다.
하나 이훤과 일행들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뭐하자는 거지?”
“싸우자는 건가?”
적암자가 앞으로 나섰다.
“악가와 남궁의 제자라면 본 파가 봉문 중임을 파악했을 터. 무도한 자들처럼 난입한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 대형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더군.”
“돌아가라. 본 파에 중요한 일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떠난다면 오늘의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
이훤이 턱짓을 했다.
“무당쌍선은 보이지 않는군.”
“그대와 상관없는 일이다.”
“천룡전이라면 상관이 있지.”
적암자는 일갈을 내질렀다.
“닥쳐라! 도가의 본산에서 천룡전이라는 삿된 이름을 거론하지 마라!”
쾅!
이훤이 발을 굴렀다.
그 순간 이십여 장에 걸쳐서 깔려 있던 청석이 물결치듯 요동쳤다.
“막아라!”
무당십학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막으려 했다.
하나 그들은 모조리 피를 토하며 튕겨나갔다.
이훤은 인상을 쓰며 읊조렸다.
“뚫어.”
악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고쳐 잡았다.
“선두는 언제나 나지.”
“원래 아랫것들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법이지.”
묘마의 농담에 악마는 히죽 웃으며 달렸다.
질 낮은 농담에도 웃을 수 있을 만큼 즐거웠다.
한평생 구름 위의 존재라고 여겼던 무당파를 휘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쾅!
악마가 연무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순간 적암자가 외쳤다.
“대천강북두진을 펼쳐라.”
일대제자 두 명이 북두(北斗)의 머리와 꼬리를 맡았고, 서른 네 명의 제자가 길게 늘어섰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밤하늘을 수놓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악마는 일부러 대천강북두진의 한복판에 내려섰다.
[깨끗해도 너무 깨끗해.]
이훤의 전음의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만약 강림혼요술이 아니라면 무당파는 아군이다.]
악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지 않겠소.]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산동악가의 벽력신기창법으로 무당의 대천강북두진을 견식해보겠다!”
벽력신기창법(霹靂神旗槍法)은 신마의 심득인 십전진뇌공으로 인해 완전히 탈바꿈한 상태였다. 하나 오늘의 일로 인해 산동악가의 무공이 무당파를 넘어섰다고 소문이 퍼질 것이다.
“오라!”
악마의 일갈과 함께 대천강북두진이 펼쳐졌다.
묘마는 악마가 적진의 한복판에 있음에도 느긋했다.
“암자 배는 확실히 강하네.”
“몇 명이지?”
“복장으로만 보면 대부분 있어. 한데 장문인과 도맥의 수장, 그리고 무당쌍선이 보이지 않네. 대형의 말처럼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이훤은 연무장 너머에 우뚝 선 자소궁을 보며 물었다.
“무당파에 온 적이 있어?”
“저 녀석들이 코흘리개일 때 자주 왔었지. 남궁세가는 제갈보다는 무당과 가까웠으니까.”
“무당파 경내에 장문인의 처소를 제외하고, 외인의 눈에 띄지 않는 특별한 장소가 있을까?”
“무당은 정파의 태두야. 조사전과 비고까지 모두 공개되어 있지. 자부심의 발로야. 하나 오직 한 곳만 외인의 출입이 불허해.”
“장문인의 처소군.”
묘마는 고개를 끄덕인 후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하지만 자소궁 뒤편에는 선의진이 펼쳐져 있어.”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회귀 전의 기억까지 더듬어도 생소한 진법이 아닌가.
하지만 묘마의 설명을 듣고 보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본래 무당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자소봉이 아니라 천주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소봉에 문파를 세운 까닭이야 말로 선의진(仙衣陣)을 위함이었다.
대자연의 은혜로 만들어진 천혜의 진법.
장문인만이 출입 방법을 알고 있는 무당파 최후의 보루였다. 강호에서도 몇몇 사람만이 알고 있고, 절대 알리지 않는 비밀이었다.
물론 묘마가 된 남궁천운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에 대형이라고 해도 전력을 다해야 걸음을 옮길 수 있을 거야. 그 때 공격을 받으면 어찌될지 모른다고.”
우두둑-
이훤은 손가락을 꺾으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왜 대형인지 보여줘야겠네.”
그리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한 걸음에 오장 씩 내달린 후 허공으로 솟구쳤다.
[쓸데없이 기운 빼지는 말고요.]
묘마의 전음과 함께 허공에 작은 회오리가 휘돌았다.
무형검을 보내 공간을 자극하여 바람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훤은 무형검으로 만들어낸 계단을 밟고 한숨에 자소궁을 뛰어넘었다.
“능공천상제!”
“허공답보를 눈으로 보게 되다니.”
한순간 비현실적인 광경에 암자 배의 무당제자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자소궁 후원에 펼쳐진 선의진은 이훤을 막지 않았다.
십 성의 천공혈륜겁은 자연지기 그 자체였다.
이훤은 선의진을 통과하여 그대로 내려섰다.
“멈춰라! 이곳은 무당의 절지다! 외인의 출입은······.”
장문인이 문도의 경고를 막았다.
“되었다. 선의진을 통과한 이상 우리는 그를 막을 수 없다.”
장문인의 말대로 하늘의 뜻이 되었든, 무력이 되었든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
“무당쌍선은?”
이훤은 불문곡직하고 쌍선의 행적을 물었다.
장문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 숨을 흘린 후 문을 열어 후원을 공개했다. 그곳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희노애락을 무의미하게 표출하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강림혼요술이 폭주하는 듯하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청암자인가?”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우, 수십 년을 함께 했으나, 사형에게 이런 비밀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장문인 내 책임이야.”
“이상한데. 배신자가 바뀌었어.”
“그게 무슨 소리더냐?”
이훤은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천룡전과 내통하는 건 청암이 아니라 백암이다. 저 노인네는 그저 술 좋아하는 파계도인일 뿐이야.”
< 74, 배신자는 누구인가?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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