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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87화 (187/226)

< 74, 배신자는 누구인가? >

74, 배신자는 누구인가?

반구형의 공간은 꽤 넓었다.

바닥에는 사람이 앉을 크기의 청석이 깔렸다.

그 숫자가 삼백육십이다.

그리고 천장으로 향할수록 호선을 그리는 벽에는 온갖 기이한 형상의 동물을 그려놓았다. 언뜻 보기에 소처럼 보이지만, 다리가 여덟 개였다. 돼지처럼 보이는 동물은 두 발로 서서 책을 봤고, 주둥이가 용처럼 생긴 괴물은 뱀이 아니라 곰의 형상을 취했다. 유달리 짧은 팔다리와 등 뒤의 날개는 박쥐처럼 보였다.

이처럼 기괴한 괴물들의 그림 위로는 수천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점과 점 사이를 이어 기이한 문양을 만들어 놨다. 유독 커다란 점에 적힌 글귀로 보아 천체를 그려놓은 듯했다. 그리고 천장의 정중앙에 박힌 붉은 묘안석을 통해 빛이 내리꽂혔다.

솨아아아-

청석의 정중앙에 앉은 이의 정수리가 붉게 물들었고, 간간히 일렁이며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툼한 장포로 몸을 휘감았기에 체형조차 알 수 없는 괴인이었다.

“죽었는가.”

장포를 비집고 흘러나온 목소리가 공동에 울렸다.

하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괴인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하는 순간 정중앙에 꽂힌 묘안석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퍼져나갔다. 점과 점을 이어가다보니 천장에 꽂힌 묘안석(猫眼石)은 여덟 개임을 알 수 있었다.

“천총대화는 여덟을 의미하나······.”

묘안석은 본래 녹색을 띄지만, 각기 다른 빛을 발산했다.

하나 빛을 뿜어내는 건 여섯 개가 전부였다.

“둘은 아직 보지 못했고······.”

붉은 묘안석 근처에 있는 것이 무색이었고, 천장의 끄트머리에 박힌 묘안석 또한 투명하게 반짝일 따름이다.

괴인의 시선은 천총대화(天總帶畵) 끄트머리에 박힌 묘안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중 하나는 정체조차 알 수 없구나.”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장포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눈을 감고, 호흡을 끊는 순간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들이 사방에서 전해졌다. 아이들이 병정놀이를 하는 것과 누군가 싸우는 소리, 거기에 더하여 폭음과 괴성이 끊이지 않았다. 온갖 잡다한 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가운데 필요한 것만 솎아내기 시작했다.

“호북성이면 무당이냐? 제갈이냐?”

답은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

“둘 다.”

이훤의 말에 괴마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괴마가 아님에도 천룡전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합류한 검후는 호방하게 웃었다.

“하하! 거리 상 무당파에 들렀다가 융중산 제갈세가를 찾아가면 되겠군.”

그녀로서는 천룡전의 음모가 존재하는 이상 강호를 떠날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어차피 보타암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무림맹에서 망아취자를 만나기로 약조하지 않았던가.

백소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내어준 말을 몰며 말했다.

“제갈세가에서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 대별산 까지는 관도가 뚫려 있어서 이동이 용이해요.”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 함께 이동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무당산은 개인적인 볼일이야. 그러니 제갈세가로 먼저 이동해. 무당산이야 하루 이틀이면 끝날 테니까.”

악마와 묘마가 동시에 외쳤다.

“나는 무당으로 갈게.”

“나는 무당산.”

이훤은 눈싸움을 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왜?”

악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너무 잘생겨졌어. 제갈세가에 가면 길보다 흉이 많을 것이야.”

묘마의 이유도 엇비슷했다.

“나는 젊고, 예쁜 여자가 됐잖아. 그 녀석을 만나는 게 창피한 건 아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걸.”

엇비슷한 이유에 어처구니 없는 이유라는 것도 똑같았다.

한데 의외로 검후가 맞장구를 쳤다.

“그도 그러네. 내가 가도록 하지.”

“이유가 뭔데요?”

이훤의 말에 검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이면 알 게 될 일. 괘념치 마라.”

장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하선 했으니 이제는 무당산과 제갈세가로 가는 길이 갈라질 터였다.

“제가 검후를 모시고 갈게요.”

한마가 나섰다.

그녀는 회귀 전과 다른 이유였지만, 같은 별칭을 택했다.

천관자의 복수를 할 때까지는 바꿀 생각이 없단다.

“스승께서 지난 세월을 논하실 때 검후께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고 했어요.”

어딘가 모르게 효녀 같은 느낌이었다.

이훤은 피식 웃은 후 탈마를 향해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도 가라.”

탈마는 아예 희색이 만연하여 검후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아무리 이훤이 좋다고 해도 매일 같이 수발을 드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것이리라.

‘크큭, 가서 반성 많이 하고 돌아와라.’

검후의 대쪽 같은 성정은 이훤으로 인해 상당 부분 억제되어 있었다. 한데 두 사람이 헤어지면 원래의 성격을 드러날 터였다. 그리고 탈마는 그 때가 되어서야 이훤을 그리워할 것이 분명했다.

“대형, 갈림길이 나타났어.”

악마가 창으로 가리키는 관도의 끝이 둘로 나뉘었다.

“그럼 며칠 후에 보자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길이다.

한데 갈림길을 지나는 순간 일진광풍이 몰아쳤다.

쉬이이이이이이잉-

나무의 잎새가 흩날릴 정도의 바람이다.

이훤은 표정을 굳혔다가 손가락을 들어 바람의 강도를 확인했다.

“말을 타고 걷는 와중에 이만큼의 바람이 분다면······.”

“대형, 무슨 일이오?”

“이백의 협객행이지.”

“설마 지금 술 마시자고요?”

악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제아무리 영웅은 호색이고, 술을 멀리 할 수 없다지만 대형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다.

“협객행의 분위기를 느끼며 한 잔 하자!”

이훤은 호기롭게 외친 후 안장에 묶어 놓은 호리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묘마와 악마가 한 숨을 내쉬는 사이 술 냄새가 관도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

무당파는 정파를 논할 때 빠지지 않았다.

어느 지역의 누구라고 해도 강호의 정세를 이야기하면서 어지 소림과 무당을 빼놓을 수 있겠는가. 그만큼 무당파의 위세는 실제 상황과 관련 없이 언제나 대단했다. 중원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화산파와 중원의 젖줄이라는 호북성의 패주인 무당파는 명성 자체가 달랐다.

“아닌 말로 무당파가 산동악가 수준으로 몰락했어도 어지간하면 무시당할 일이 없을 걸요.”

“산동악가 비하하지 마라!”

“진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렇게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도피하기만 한다면 오대세가는 될 수 없어.”

“지랄하고 있네. 밀염하고 염왕채로 돈을 벌고, 왕부에 뇌물을 바쳐서 남궁세가가 시작됐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냐? 그런데 너희들은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잖아.”

이훤은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저 멀리 나타난 무당산을 바라봤다.

‘직접 올라가서 천관자의 흔적을 살펴봐야 해.’

그리고 개미굴 당시 느꼈던 무당쌍선의 진의도 파악해야 했다. 둘 중 한 명은 배신자일 것이고, 그로 인해 다른 방향에서 천룡을 역추적할 수 있으리라.

“해검지다.”

묘마의 말은 악마는 이훤의 눈치를 살폈다.

소림과 무당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강호, 아니 세상이 바로잡히도록 이바지했다. 그렇기에 강호인들은 소림과 무당을 존중하는 의미로 고유의 행사를 벌였다.

그것이 소림의 하마행(下馬行)이다.

숭산 소실봉 인근에서는 말을 타지 않고, 내려서 걷는 것으로 존경을 표시했다. 하나 당금에 이르러서는 소림의 부탁으로 없어진지 오래였다.

반면 무당의 해검지(解劍池)는 여전했다.

본래 무당파를 찾아온 이들이 공격의 의사가 없음을 밝히기 위해 무당산의 초입에 위치한 연못 근처의 나무 아래 무기를 풀어놓았다.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작은 도관이 세워졌고, 무당의 제자들이 나와 무기를 관리했다.

“대형의 투갑은 어찌할 것이오?”

창천평의 혈겁을 통해 이훤의 신위는 이미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가 쓴 장갑이 기형병기로 변하는 걸 목도한 이도 수백 명이다. 그렇기에 해검지를 지나려면 팔황과 무극을 풀어놓아야 뒤탈이 없을 터였다.

이훤은 단순하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냥 가.”

“형님, 무당파가 가만 있지 않을 텐데요?”

“우리가 지금 무당파에 손 벌리러 왔냐?”

묘마가 악마를 질책하며 투덜거렸다.

“너도 이제 익숙해져야지. 강호가 힘으로 돌아가는 건 네가 제일 뼈저리게 느꼈잖아. 한데 네가 힘을 지녔으면서도 예전처럼 빌빌 거리면 어쩌라는 거야? 같이 다니는 나도 생각을 좀 해다오. 알았냐?”

악마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하나 무당파의 이름값이 제법 무거운 듯 연방 장창을 쥐락펴락하며 긴장을 풀려고 애썼다.

그 때 해검지 앞 도관에서 제법 정명한 눈빛을 자랑하는 무당파 문도들이 나타났다.

“멈추시오! 어디서 오신 고인들이신가요?”

대답 대신 지풍(指風)을 선물했다.

파파팟!

십여 명의 도인이 널브러졌고, 뒤늦게 모습을 보인 책임자가 명적을 쏘아 올렸다.

삐이이이이익!

그리고 그는 악마의 창대에 정수리를 얻어맞고 혼절했다.

“명적도 울렸으니 알아서 다 모여 주겠구나.”

이훤은 히죽 웃으며 느긋하게 고삐를 당겼다.

세 사람은 느긋하게 산을 올랐다.

*

천암진인(天巖眞人)은 무당파의 장문인이다.

하나 배분이 가장 높지는 않았다.

무당쌍선이라 불리는 백암과 청암이 가장 높았고, 그 아래로 수암자와 제암자가 존재했다. 무당의 일대제자 중 경지에 오른 자만 서른 명에 이르렀고, 그 중 열 명 이상이 절대지경에 발을 들였다.

무당파는 그만큼 성세를 자랑했다.

하나 장문인은 며칠 째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푸석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우, 취선관주가 올라오고 있다고?”

“창천평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의형제를 맺은 악마, 그리고 묘마와 동행 중입니다.”

각기 전대 고수인 벽력창 악재의 제자와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의 무기명제자였다. 하나 창천평에서 보인 신위로 인해 신분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하겠군.”

“그렇겠지요. 호사가들 중에서는 취선관주를 가리켜 당대 천하제일인이라고 칭하기도 하더군요.”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 고약한 자가 등장했군.”

장문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암자(諸巖子)는 침음을 흘렸다. 그는 무당쌍선을 제외하면 무당의 무학을 가장 오랫동안 수련했다. 그리고 만매만전을 통해 중시조인 장삼봉에 근접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 그가 침묵했다.

“자네가 안 된다면 북두천강진은 되려나?”

“글쎄요.”

“무당십학은? 우리가 펼치는 칠성대진은 어떠한가?”

“모르겠습니다.”

장문인은 장탄식을 흘렸다.

“그럼 산문을 열어줄까?”

“그건 불가합니다. 그 자는 무당의 허락 없이 무암의 딸을 빼돌렸습니다.”

“공식적으로 무암자에게 딸은 없네만.”

“비록 본 파가 여 제자를 받지 않으나, 속가의 좋은 문파를 골라줄 수는 있지요. 무암은 제 막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아이의 혼처까지 골라준 후 직접 축원을 하고 싶습니다.”

제암자가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정광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본 파는 취선관주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장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머무는 장소는 무당 본산의 요처라 할 수 있는 자소궁 내에서도 사람이 오가지 않는 비공실(比空室)이다.

“그 이유만이라면 자네와 내가 마주할 이유가 없지.”

끼이이익-

장문인이 비공실의 문을 여는 순간 후원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노인이 백발과 백염을 흩날리며 울분을 토로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고, 이내 눈물을 펑펑 흘리며 탄식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이내 미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하!”

장문인은 희노애락을 동시에 표출하는 노인을 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하아, 누가 봐도 사도가 아닌가.”

제암자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사도가 아닙니다. 사형입니다. 보세요. 사도의 감정을 표출하나 몸은 미동조차 없습니다. 지금 사형은 강림혼요술에 대항하고 있는 겁니다!”

장문인은 제암자의 결의를 뒤로 한 채 노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버티실 수 있겠소?”

장문인의 물음에 노인은 괴성을 지르면서도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이틀인가.”

제암자는 노인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고,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말을 건넸다.

“백암 사형은 이틀 안에 돌아오실 겁니다. 그리고 제갈세가라면 분명 해법을 줄 거예요.”

장문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부터 무당파는 이틀 간 봉문 한다.”

< 74, 배신자는 누구인가?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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