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무형살(無形殺). (2) >
*
만매만전과 천관심결, 그리고 십전진뇌공.
이훤이 본래 지녔던 천공혈륜겁에 이어 세 가지가 더해졌다. 그리고 남궁세가에서 묘마와의 논검을 통해 무형진기(無形眞氣)를 터득했다.
- 형체가 없는 진짜 기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논하자면 며칠밤을 새워도 모자랄 터였다. 하나 묘마가 장담했고, 이훤이 인지했듯 무형진기는 곧 자연지기를 뜻했다. 상세히 논하자면 자연지기를 아무런 대가없이 쓸 수 있는 기예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무림맹 위무대의 수장이 돌아갔으니 우리도 편히 쉴 수 있겠군.”
“제검백가의 배신자들과 의원들의 접촉을 철저하게 금해야 해. 아직은 쉴 때가 아니라고.”
그렇기에 경계를 서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등 뒤로 지나가는 이훤을 인지할 수 없었고,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확인이 불가능했다.
‘흠, 무형진기 또한 신마의 심득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천공혈륜겁은 토대(土臺)였다.
그렇기에 이훤은 혈륜을 무형진기의 방식으로 휘돌리면서도 조금의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하나 신마의 심득 중 가장 신기한 것을 고르라면 무형진기도 천공혈륜겁도 아닌 천관심결일 터였다.
‘회귀 전에 익힌 건 천공혈륜겁에 섞인 천관심결이었지. 거기에 백소에게 받은 천관심결이 더해지니······.’
예언자나 선지자는 못 되어도 꽃길과 가시밭길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단학에 대한 신뢰가 그러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게 끌렸다.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할 것만 같았다. 만에 하나 이대로 삶이 이어진다면 그 끝에 단학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백소까지 느꼈을 정도라면 눈여겨 봐둬야겠어.’
이훤은 단학에 대한 생각을 잠시 미뤄둔 채 남궁세가를 벗어나 수십 리를 달렸다. 하나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머릿속으로는 탈마가 알려준 관도가 지도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목표가 구릉을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찾았다!’
눈을 빛내는 순간 목표는 코앞에 이르렀다.
*
무림맹의 순찰당은 감찰단의 하위 조직으로 알려졌다.
맹 내의 문제는 비선각에서 조사를 하고, 감찰단에서 처리를 했다. 그렇기에 순찰당은 감찰단이 행동할 때 머릿수를 채우는 역할을 맡았다. 하나 순찰당의 권한은 맹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빛을 발했다. 중원십삼성에 퍼져 있는 지부는 모두 순찰당이 관리했기 때문이다. 총순찰은 지부장이 지부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였다.
그렇기에 총순찰이 움직일 때에는 각별히 경계에 힘쓰는 것이 당연했다.
“반 마장만 가면 예정된 마을이 나타난다. 마지막까지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라.”
총순찰 직속인 경무대(警武隊)의 대주가 외치는 순간 화려한 마차를 호위하던 서른 명의 무인들이 대답 대신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모두 고생했으니 마을에 도착하면 번을 정한 후 반 병의 술을 허락하겠네.”
마차 안에서 들려온 경쾌한 한 마디에 경무대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손짓을 하자, 대원들 또한 웃음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연발했다.
하나 마차 안의 분위기는 달랐다.
온갖 화사한 내부와 달리 태위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태위가 말하자 그의 입을 통해 기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야 할 것이다.
홀로 두 사람의 목소리로 대화하는 광경은 더없이 기괴했다. 하나 태위는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알렸다.
“심증만 있으니 궁금해서라도 무림맹에 오게 될 겁니다.”
“이번 일에 천룡전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사신사도가 천룡께 충성하는 한 이번 일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태위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음성이 흘러나올 때마다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다시 한 번 눈동자가 검게 물들며 다음 명령이 하달됐다.
“모든 것을 지울 때까지는 너희들끼리 반목해서는······.”
목소리가 끊겼다.
동시에 태위의 눈동자는 검게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죠?”
“크흑! 놈이다. 놈이 왔다. 이훤이······.”
태위는 눈을 부릅떴다.
천룡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지금껏 이런 경험은 없었다.
그렇다면 천룡의 말처럼 이훤이 왔다는 의미였다.
태위는 황급히 마차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나 마음만 동했을 뿐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젠장!’
사신사도는 다른 감각사도와 달리 사도의 총화 같은 존재였다. 흑의인이 그렇게 꿈꾸던 사도의 완제품이며, 천룡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괴물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움직이면 당한다.’
태위는 태가장의 무공을 익혔지만, 언제부터인가 수련ㅇ르 멈췄다. 대신 천룡이 원래 익혔던 무공을 토대로 강림혼요술과 천관심결, 그리고 최근에 만매만전을 더했다.
그 결과 그는 맹주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보이고, 모든 것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누구도 자신을 해할 수 없으리라 믿었다.
한데 그 절세의 기감이 오늘은 족쇄처럼 느껴졌다.
‘와라. 차라리 와라.’
태위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평소였다면 귓등으로 흘렸을 경무대원들의 나직한 대화마저 거슬렸다.
하나 이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한줄기 기파로 마차 주위를 휘돌 뿐이다.
“후우. 후우.”
태위는 정신을 집중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 번만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 때 마차를 벗어나 반격을 취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설령 패배한다고 해도 경무대가 있는 이상 이훤이 나설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너는 큰 실수를 했어.’
자신이 힘든 만큼 이훤도 힘들 터였다.
무형지기는 막대한 심력과 내공을 소모하지 않던가. 오히려 이훤 쪽이 먼저 쓰러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는 버티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쉴 새 없이 자신을 독려했다.
‘이 몸은 수십 년 동안 인내해왔다. 차라리 무림맹에 순순히 왔더라면 고통 없이 죽었을 것을······.’
그 순간 마차 주변을 휘돌던 기파가 스며들었다.
태위가 내력을 운기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벽이 만들어졌고, 검처럼 꽂혀들던 기파는 다시 마차 밖으로 튕겨나갔다.
‘어린 네 놈은 이 고통에 결코 익숙해지지 못하리라.’
이훤은 술병을 기울였다.
원봉밀주라는 것으로 말벌로 만든 술이란다.
맛은 비리고, 속은 쓰렸다.
다만 향기가 없기에 선택한 술이다.
이훤은 마차를 따라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에 한 번씩 술병을 기울이니 마치 고즈넉한 밤에 산책을 나온 듯 기분이 좋았다.
“새끼, 고생하네.”
멀어지는 마차와의 거리를 다시 좁힌 후 술병을 기울였다.
그리고 간간히 무형검을 쏘아냈다.
태위는 그것만으로도 곤욕을 치르고 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무형검을 쏘아낼 때마다 마차 내에서 묘한 기운이 치솟았다. 잔뜩 날이 선 상태로 자신의 공격에 대비하려는 모양새가 훤히 보였다.
“후훗, 그래도 네 덕에 좋은 경험한다.”
본래 이훤은 태위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것으로 보아 놈이 죽어도 무림맹에서의 음모는 진행될 터였다. 그렇다면 거슬리는 놈을 미리미리 죽여 놓는 건 당연한 선택이다.
하나 무림맹의 실체를 까발리려면 자제해야 했다.
그렇기에 복면이라도 쓰고 난입을 하려 했으나, 마차 안에 있는 놈을 보는 순간 무형진기를 떠올렸다
묘마는 무형진기를 단순히 무형검으로 사용했고, 심검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훤은 다방면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가 삼 장 남짓한 거리를 두고 뒤따르고 있지만, 경무대의 무인 중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다.
“어! 벌써부터 지치면 곤란한데.”
이훤은 혀를 차며 소매를 두어 번 휘저었다.
그 순간 무형검이 세 방향에서 마차를 향해 쇄도했다.
‘흐읍!’
태위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머리 위와 좌우.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무형검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있는 힘껏 내력을 발산하여 아예 원통을 만들 듯 둘러버렸다.
소리도, 충격도, 흔적도 없다.
하나 세 개의 무형검을 튕겨내는 순간 호흡이 거친 만큼 입꼬리가 올라갔다.
‘막았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진저리를 쳤다.
싸우는 도중 변화를 택한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힘에 부쳤기에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훤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으리라.
“후우.”
얼마나 시간이 흘렀고,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하나 태위는 몇 번이나 무형검을 막아냈고, 상대의 공세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야.’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강호초출처럼 방심했다가 죽어나가는 것을 여러 번 보지 않았던가.
해서 태위의 피는 뜨겁게 휘돌았고, 뼈는 뻣뻣했으며, 근육은 찢어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온 신경이 한계에 이를 때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다.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하나 태위는 만전(萬全)을 자부했다.
무형검은 결코 자신의 호신강기를 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그 순간 이훤이 만들어낸 작은 무형검이 나타났다.
바늘처럼 얇고, 짧다.
그것은 태위의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호신강기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무형검은 이훤의 의지대로 움직였고, 태위의 등 중간부분에 닿았다.
명문혈(命門穴)이다.
목숨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표현처럼 요혈 중의 요혈이다.
해서 내공을 주입해 상대를 살필 수 있고, 여차하면 한 줄기 기운으로 상대를 불구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하나 무형검은 스며들거나, 찌르는 대신 그저 닿았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태위는 갑작스럽게 명문혈에서 낯선 기운을 느끼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육신의 충격이 아니라 정신의 충격으로 만들어진 기사였다.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이훤은 보지 않아도 마차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쯧쯧, 만매만전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더냐. 한계에 이르면 스스로 조절하여 가라앉히라고 말이야. 겉핥기식으로 읽었으니 그 꼴이 되지.”
그는 마차 내부에서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발길을 돌렸다. 돌아갈 때를 대비해 향이 깊은 술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입맛을 다시며 마개를 뽑는 순간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자리를 잡았다.
“아! 좋은 산책이었다.”
*
“말은 직접 관리하고, 객잔 전체를 비워라.”
경무대주의 말에 무인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는 수하들이 객잔을 비우고, 경계 태세를 끝낸 후에야 마차 앞에 섰다.
“총순찰.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태 대협. 목적지에······.”
경무대주는 미간을 좁혔다.
태위가 잠을 자고 있다면 숨소리가 들려야 했다.
한데 마차 내부에서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를 가셨나?”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당겼다.
그리고 돌이 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대주, 뭐하십니까?”
조장이 다가와 옆에 섰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마차 내부는 마치 다른 시간 대에 존재하는 것처럼 기이한 상황이 펼쳐졌다. 주작령 태위의 온 몸은 혈관이 터진 것처럼 푸르딩딩했고, 피부는 바짝 말라버린 고목처럼 갈라져 있었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변한 후 가닥가닥 잘려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경무대주는 조장들의 중얼거림에 눈을 끔뻑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은 없었고, 타살의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휴, 급사라니. 차라리 다행이로군.’
< 73, 무형살(無形殺).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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