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무형살(無形殺). >
73, 무형살(無形殺).
이훤이 두 번째로 선택한 건 총순찰이다.
추혼검제 단학이야 언제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뒤로 미뤄도 돼.’
잠시 후 총순찰이 들어섰다.
이훤이 후려친 코는 여전히 퉁퉁 부은 상태였다.
아마 뼈가 어긋났고, 피가 뭉쳐서 숨을 쉬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하나 그는 이훤과 시선을 마주하기 전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대로네?”
이훤의 물음에 주작령 태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천룡전의 사도는 고유의 상을 지녔기에 항상 같은 표정을 유지한다더군. 해서 피륙의 상처는 새살이 솟아나는 것처럼 치유되고, 도저히 복구가 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상이 깨지며 죽어버리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 또한 관주께서 무림맹에 정보를 제공해주셨기 때문이지요. 차후 맹주께서 따로 말씀을 하시겠지만, 저 또한 맹도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를 표합니다.”
그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관주의 말씀대로면 저를 사도로 의심하셨다는 이야기인가요?”
굳이 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하! 얼굴이 이 모양으로 변했는데 감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덕분에 관주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아직은 아니야.”
태위는 한 숨을 내쉬었다.
“휴. 첫 단추를 잘 못 꿰었으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이훤은 상대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묘한 놈이야.’
주작령(朱雀令) 태위(太威).
지난 밤 탈마가 얻어온 정보를 통해 태위의 삶을 엿봤다.
무림맹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태가장(太家莊)의 차남으로 약관의 나이에 입맹했다. 외원의 타격조장과 감찰부를 거쳤고, 부원주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내원에 입성했단다. 그리고 감찰단 부단주를 지냈고, 비선각의 부각주로서도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몇 년 전 무림맹 외원의 순찰당과 각 지부의 순찰대를 총괄하는 총순찰의 자리에 올랐다. 한 마디로 무림맹 내외원의 요직을 역임한 상태였다.
현 무림맹 서열 사 위.
물론 맹주와 문상과 무상을 비롯해 원로원과 장로원은 서열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신분과 나이를 감안하면 고속으로 출세한 입신양명의 상징과도 같은 자였다.
‘천룡전으로서는 적의 심장부에 칼을 가져다 놓은 것만큼 중요 인사겠지.’
이훤은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미안하다는 말로만 때우려는 건 아니겠지?”
태위는 명문의 자제이고, 맹의 요직에 올랐으나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외원에서 오래 알고 지낸 자가 있었습니다. 한데 개미굴 작전 당시 최후의 보루로 동굴 자체를 무너트려야 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하나 무림맹의 이념 상 수많은 사람을 두고 붕괴시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해서 제게 은밀하게 빼내달라고 하더군요. 그 때 문상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가 있었기에 순진하게 내어주고 말았지요. 비록 적의 간계에 당한 것이지만, 책임을 통감합니다.”
잘도 그랬겠다.
태위가 소천뢰를 빼돌린 지인의 인상착의를 전했다. 대충만 들어도 사상사도에 속한 노인 중 하나였다. 녀석이 혼신을 다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모든 변명을 끝냈을 때 맞장구를 쳤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 하나 과거를 되새긴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 미래를 논의해보는 것이 어떻겠어?”
이훤의 말에 태위는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무림대회의가 달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화산연맹의 발족식 덕분에 조금 더 규모를 키우기로 했지요. 해서 비무대회와 기물연, 거기에 명가행렬이라는 것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기물연(奇物宴)은 보물을 감정 받고, 나아가 판매까지 행하는 부자들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리고 명가행렬이라면 예를 들어 구파오가가 무림맹의 연회장까지 행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제가 태가장에서 몇 가지 물건을 가져와 연맹에 기증하는 형식을 취할까 합니다.”
태가장은 오대세가에 속하지는 못하나, 맹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사대방파 중 한 곳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들의 선물이라면 응당 희대의 보물일 것이다. 그리고 선물로 인해 연맹의 위명은 더욱 높아질 터였다.
“그뿐 아니라 관주께서 허락하신다면 비무대회의 대진표를 적당히 조율해 보겠습니다.”
대놓고 비위를 저지르겠단다.
하나 무림맹이나 명문에서 주최하는 비무대회라면 대부분 행해지는 관례와 같았다. 초반부터 고수들을 붙여놓는 것보다 결승에 맞붙는 것이 보기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총순찰이 힘을 쓰면 구파오가 중에서도 가장 좋은 대진을 받아 손쉽게 결승에 오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첫 날 맹주께서 대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가 정백평입니다. 그 때 구파오가와 명가의 참석자들이 등장을 하고, 사람을 써 사방에 알릴 예정입니다.”
태위는 지금부터 진짜라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 때 연맹의 등장 순서를 소림의 다음으로 하겠습니다.”
이훤은 태위와 거짓 대화를 이어가는 중임에도 탄성을 내뱉었다. 주인공일수록 늦게 나타나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그러니 태위의 제안은 무림맹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화산연맹을 소림보다 윗자리에 놓겠다는 뜻이다.
“말뿐이라면 곤란한데.”
태위는 입꼬리를 올린 채 장담했다.
“제 실수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미 수뇌부가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사실상 관주가 연맹의 발족식을 위해 무림대회를 미뤄달라고 했을 때 수락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태가장의 장주이신 아버님과 맹주께서는 이 번 기회를 통해 관주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개소리였다.
만매만전을 통해 신위를 증명했고, 다른 심득들까지 모아놓는 중요한 자리가 아니던가. 이훤과의 친분에 따라 심득의 전파 유무가 정해질 터였다. 그러니 무림맹의 선택도 이해는 갔다.
무엇보다 증거가 없지 않은가.
심증만 가지고는 나섰다가는 정파인들이 환장하는 명분에 밀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이훤은 태위의 능수능란한 화법을 귓등으로 흘리며 놈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무림맹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시는 걸까?’
흑의인과 수하들이 죽은 이상 천룡전에게 남은 건 천룡과 사신사도가 전부였다. 그러니 만약에 무림맹에서 음모를 꾸미려면 사신사도는 물론이고, 숨겨놓은 세력까지 총동원을 해야 성사를 장담할 수 있으리라.
‘그 정도로 맹에 오기를 원한다면 가주는 게 예의지.’
이훤은 히죽 웃었다.
“좋아.”
“역시 당금 강호를 선도하는 관주의 과감한 결단에······.”
태위의 아부성 발언은 귓등으로 흘렸다.
“오늘 떠난다고?”
“위무대의 의원과 후기지수들은 며칠 더 있을 겁니다. 하나 저는 강호 전체를 살펴야 하기에 해가 지기 전에 자리를 뜰까 합니다.”
“좋아. 맹에서 보지.”
이훤의 축객령에 태위는 뒷걸음질까지 치며 처소에서 사라졌다. 탈마가 천장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맞은편에 앉았다.
“어때?”
“걸린 듯.”
“그 정도야?”
“정확한 위치는 아니어도 제가 있다는 건 어렴풋이 눈치 챈 것 같아요.”
“그렇단 말이지. 확실히 일반 사도와는 다르군.”
탈마는 이훤이 생각에 잠기자,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건넸다.
“추혼검제가 오래 기다렸을 텐데 데리고 올까요?”
“그 전에 괴마들 오라고 해.”
잠시 후 묘마와 악마, 그리고 백소가 들어섰다.
이훤은 둘러앉은 괴마들을 보며 말했다.
“무림맹에 와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해서 가기로 했어.”
악마는 침음을 흘렸다.
“드디어 맹인가.”
“맹에 뭐라도 맡겨놨냐?”
“남궁세가는 모를 거다. 정파의 지주라는 무림맹이 얼마나 차별에 익숙한지 말이야.”
묘마는 당연하다는 듯 혀를 찼다.
“훗, 당연히 우리는 모르지.”
백소는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에게 적응을 한 듯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한 달 남았네요.”
“그래, 그래서 그 전에 판을 좀 흔들어야겠어.”
“또 어디를 뒤집어엎으려고?”
이훤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네 명은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러 명에게 전음을 날리는 것이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내용이 너무 파격적이다.
“진짜요?”
탈마의 물음에 악마와 묘마가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얼굴은 한 번 봐야지.”
“난 그 자식 별로였는데.”
이훤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는 걸로 하고. 한 가지만 더 묻자.”
악마와 묘마는 호기심을 보였다.
이훤은 본래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였고, 굳이 동조를 구하지 않았다. 함께 가면 가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마는 게다. 그러니 어찌 보면 독선적인 그가 묻겠다고 하니 호기심이 동하는 건 당연했다.
“추혼검제 단학을 믿어도 될까?”
묘마와 악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백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저를 시험하시기 위한 질문인가요?”
“겸사겸사지.”
이훤의 물음에 백소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말을 건넸다.
“남궁세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악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묘마는 미간을 좁혔다.
“야! 그럼 내 아들은 못 믿는다는 거야?”
하나 백소는 침묵했다.
이훤은 히죽 웃은 후 손가락을 튕겼다.
문이 열리면서 반대쪽 별채가 드러났다. 술과 음식이 가득 차려진 탁자가 그들을 유혹하는 듯했다. 먼저 마시라는 말에 괴마들이 이동했고, 다시 문이 닫혔다.
“하하, 은공! 오래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조금도 지루하거나, 서운하지 않았다오.”
이훤은 단학이 처소에 들어와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단 형. 괴마가 되고 싶지 않소?”
단학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훤의 얼굴에서 진심을 읽었는지 진지하게 대꾸했다.
“후우, 나는 은공이 부럽소. 하고 싶은 게 있고,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어찌 부럽지 않겠소. 하나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모르겠소. 나는 오랫동안 멈춰 있었소. 고개를 숙이고 살았기에 내 앞에 어떤 길이 있는지 보지 않았소. 한데 은공으로 인해 이제야 내 앞에 놓인 수많은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했다오. 나는 일단 그 길을 걸어갈 생각이외다.”
“멋집니다.”
이훤의 말에 단학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짧은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자신을 위해주는 듯했다.
“하하! 오늘은 술이나 한 잔 하시지요. 제가 돈이 많지는 않아도 술을 얻어오는 재주는 탁월하답니다.”
“좋습니다.”
이훤은 빙긋 웃은 후 말을 덧붙였다.
“단 형은 오늘 밤새도록 괴마들과 술을 마시게 될 겁니다.”
“······.”
“저는 밤새도록 단 형과 함께 있었던 겁니다. 그 부분에 이의가 없으시다면 건너가시지요. 술상은 이미 봐놨습니다.”
단학은 헛웃음을 지었다.
“은공은 언제나 나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구려.”
“강호는 시험과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하지만 이처럼 매일같이 생사의 기로는 아니겠지요.”
“그건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닐까요?”
단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밤새도록 은공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려면 만취해서는 안 되겠군요.”
이훤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단학은 술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못 마시니 은공은 제 몫까지 마셔야 할 겁니다.”
이훤은 단학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술에는 몫이 없습니다. 먼저 마시는 게 임자죠. 그리고 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술을 차지했습니다!”
천하군림을 선포하는 듯한 호언장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 날 밤 단학과 괴마들이 함께 하는 술자리가 거창하게 이어졌다. 별채 밖으로 고함과 욕설, 주정이 퍼져나갈 만큼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삼경 무렵 이훤이 사라졌다.
< 73, 무형살(無形殺).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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