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자라나는 새싹은. (3) >
사람은 비밀을 들키면 움찔하는 법이다.
혹은 곤욕스러워하거나, 화를 내기도 했다.
즉 태위처럼 멋쩍게 웃으며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아이가 친구의 물건을 숨겨놓는 장난을 치다가 걸린 것처럼 여유로웠다.
이런 분위기는 결코 정상이 아닐 터였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태위 또한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 떨어져 있으리라. 가히 한 사람의 괴마로 인정받기에 충분할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가주인 남궁혁은 자신이 괴마에 들지 못한 이유를 증명하듯 정상인의 범주 내에서 반응을 보였다. 하나 미친 자가 미친 자와 만나면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미친 상황이 벌어지는 법이다.
파팟!
이훤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비틀며 움직이는 행위가 빛살처럼 빠르게 이어졌다. 그리고 오른 주먹이 정확하게 태위의 안면에 꽂혀들었다.
콰직!
태위는 허공에 핏물을 남긴 채 뒤로 튕겨나갔다.
의자와 함께 나뒹굴면서 음식과 술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일어나.”
이훤의 말에 태위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엉겹결에 얻어맞았음에도 표정은 여전했다.
이훤은 턱짓을 하며 히죽 웃었다.
“이걸로 퉁 쳐줄게.”
태위는 과장스런 자세로 두 팔을 넓게 펼쳤다가 왕을 대하듯 천천히 손을 모았다.
“대협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가 봐. 내일 정오에 술이나 한 잔하자.”
이훤의 말에 태위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연회장은 난장판이 됐다.
하나 이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술을 마셨다. 괴마들 또한 이유를 묻는 대신 화제를 이어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겨졌다.
‘씨벌! 너희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화해하면 뭐하자는 거야?’
남궁혁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한껏 불편하게 만들어놓고, 저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허허, 잘 해결된 것 같아서 다행이군.”
사정을 모르지만, 아는 척했다.
무림맹의 맹도들은 총순찰이 기습을 당하는 순간 이미 검을 뽑은 상태였다. 하나 총순찰이 화를 내지 않고, 남궁혁이 버티고 있으니 자제했을 뿐이다.
남궁혁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그냥 가지. 또 왜 앉아서 처먹고 있는 건데!’
하나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연회의 주최자였기에 모로쇠로 일관하는 건 불가능했다.
“허허, 괴마라잖소. 허허, 창천평에서 이천 명의 사마외도를 박살내려면 저 정도 호방함은 있어야지. 허허, 그렇지 않소이까? 허허, 역시 젊은 친구들의 혈기는 참으로 나 같은 자의 피를 끓게 만드는군.”
헛웃음이 끊이지 않으니 무림맹의 맹도들도 눈치를 보며 검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스륵-
청추림은 창백한 얼굴로 납검했다.
유정루에서 시비가 붙었던 자가 당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검제일 줄 어찌 알았을까. 심지어 총순찰의 얼굴을 망설임 없이 후려치는 모습에 등골이 서늘했다.
자연스럽게 입맛이 사라졌다.
청추림은 눈치를 보다가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눈이 마주친 묘마가 손을 흔들며 히죽 웃는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이 끼워져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는 듯했다.
“저, 저는 몸이 좋지 않아서 이만······.”
청추림은 갑자기 왜 그러냐는 장약란의 물음마저 귓등으로 흘린 채 연회장을 떠났다.
“그만 좀 괴롭혀라.”
악마의 말에 묘마는 젓가락을 휘돌리는 묘기를 부리며 말했다.
“나도 저 녀석한테 묘라고 새겨줄까 했지.”
하나 두 괴마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훤을 힐끔거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술을 즐기는 듯 보이나,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짜증난 것 같은데?’
‘오늘은 옆자리에 앉지 말아야겠어.’
*
이훤의 영향이었을까.
아침까지 이어질 것 같았던 연회는 삼경을 앞두고 막을 내렸다. 괴마들은 묘마의 존재로 인해 제왕전 인근의 가장 좋은 숙소를 배정받았다. 탈마는 이훤에게 말을 걸려다 미간을 좁혔다.
낯선 이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 이훤을 기다린 건 다름 아닌 추혼검제 단학이었다. 그는 이훤이 창천성을 돌파할 때 명적을 울려서 검후를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번 남궁세가의 일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해도 무방했다.
“은공!”
단학은 불과 며칠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훤에게 강호의 의미를 전해들은 후 탈각한 것처럼 당당했다.
“아! 단 형. 그 때는 고마웠어.”
“별 말씀을요. 제가 하기는 했지만, 검후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훤에게 있어서 단학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상대였다. 하나 가까이한다고 해서 손해를 볼 사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면 가까이 둘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곧장 세가를 떠난 줄 알았는데요?”
단학은 히죽 웃었다.
“은공에게 은혜를 입었기에 명적을 날렸지만, 남궁세가와의 연도 적지 않아요. 그러니 도망은 생각할 수 없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잘 풀렸더군요. 평생 남궁세가에 빚을 갚겠다고 결심까지 했거늘 은공 덕분에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이는 것으로 해결이 됐습니다.”
“다행이네요.”
“이 또한 은공의 덕이지요. 제가 은공과 형제분들에게 술을 한 잔 사고 싶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이훤은 난색을 표했다.
“지금은 할 게 있어. 내일 정오에 오겠어? 그 때 다같이 소개받고, 술 한 잔 걸치자고.”
단학은 빙긋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을 기약하며 이만 물러가지요.”
이훤은 단학에 대해 설명하며 걸음을 옮겼다.
“추혼검제 정도면 요즘 강호에서도 꽤 괜찮다고 볼 수 있겠군.”
“남궁세가와 어울리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한데 처소 앞에서 또 한 명의 불청객을 만나야 했다.
백소였다.
창천평 혈사 당시 쓰러져 있던 그녀는 천문진인의 생사를 물었다. 하나 흑의인과 홍의인을 연이어 격살했지만, 천문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찾지 못했다. 아무래도 사술의 일종에 현혹된 게 아닌가 유추할 따름이다. 하여 백소는 승전연이 열리는 오늘까지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고, 연회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이훤을 찾아온 것이다.
“아! 백 소저. 으음······.”
악마와 묘마는 이훤의 반응을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림맹의 총순찰은 물론이고, 제룡검존과 벽력창을 보았을 때에도 거침이 없던 자가 아닌가. 한데 백소를 앞에 두고 더듬거리며 시선을 피하니 의아한 건 당연했다.
한데 그건 백소도 마찬가지였다.
오음절맥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비부를 몇 차례나 건드린 관계가 아니던가. 의료 행위 중이었으니 따로 책임을 묻거나, 책임을 질 상황은 아닐 터였다.
“아! 혼자 계실 줄 알고. 아! 그렇다고 뭘 하려고 한 건 아니고요. 으음······.”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하고 찾아온 듯했다.
그러다 괴마들을 보는 순간 당황스러웠으리라.
“내일 따로 이야기 할까요?”
이훤의 말에 백소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정오에 다시 찾아올게요.”
“그래요.”
백소는 고백이라도 한 여인처럼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이훤은 그녀가 자취를 감추자, 괴마들을 향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흠! 아무 말도 하지 마.”
탈마가 입을 연 건 처소에 돌아온 후 술을 네 병이나 비운 후였다.
“진짜 이상한 놈이던데.”
묘마와 악마는 소천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게 인정하는 게 가능한가? 어차피 놈에게서는 천룡전 특유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렇다면 증거가 없을 텐데 어째서 털어놓은 거지?”
“그보다 그냥 죽여 버리지 그랬어.”
탈마는 탄식하며 눈을 끔뻑였다.
“허어, 남궁세가의 전대가주가 그런 험한 말을?”
“못할 거 있어?”
무림맹의 총순찰이 남궁세가의 한복판에서 가주가 주최하던 연회 도중 맞아죽는다면 무슨 일이 생기게 될 것인가. 양측 모두 섣불리 고개를 숙일 수 없을 만큼 달린 식구가 많았다. 하나 묘마는 그것을 알면서도 죽이지 않은 것을 탓했다.
“강호의 일은 늘 순리대로 풀리는 것이 아니야. 명분 찾고, 증거 찾고, 안전을 도모하다가 놓친 악인과 마졸들이 몇 명인데?”
악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날 삼문협에서 신마를 쫓을 때와 마찬가지야. 이것저것 따지다가 신마의 계획에 놀아났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지. 만약 놈을 죽여서 적의 계획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봐. 아닌 말로 우리끼리 있으면 남궁혁도 두 손 들어야지.”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이제 이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릴 뿐이다.
“잡초는 잡아당기면 뽑혀. 하지만 뿌리까지 뽑는 건 신중하게 해야 하지. 천룡전도 그래. 사도를 죽이는 건 쉬워. 하지만 놈들의 뿌리를 찾는 건 난해하지.”
“이제 몇 남지 않았지요?”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사신사도야. 아무 주작령은 그 중 한 명이겠지. 다른 사도를 위해 소천뢰를 빼돌렸을 거야. 그건 이미 알고 있었어.”
탈마가 말을 받았다.
“소천뢰가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황보세가를 의심했어요. 하나 혐의를 벗었고, 무림맹 내에서 소천뢰를 반출할 수 있는 명단을 확인했어요.”
무림맹 내원의 핵심 인사들이 드나드는 곳의 명단이라면 극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 탈마가 보았다는 말에 누구도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다섯 명. 주작령은 그 중 한 명. 그러니 아마 형님 앞에 나타났을 때에는 명분을 만들어놨을 거예요.”
“놈을 죽이면 맹도들이 달려든다. 그들까지 다 죽이면 무림맹 전체와 싸워야 해. 그건 안 돼.”
이훤이 무림맹을 무서워할 리 없다.
여차하면 소림사라도 쳐들어가서 방장의 머리에 낙서라도 할 위인이 아니던가.
“천룡은 정파인이다. 그리고 무림맹 내에 숨어 있어.”
묘마와 악마가 서로를 바라봤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흑의인을 통해 회귀를 거론하니까 노골적으로 주작령이 나타났어. 놈은 무림맹에 있어.’
탈마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그 새끼들이 하던 걸 보면 주작도 웃으면서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죠. 형님이 죽이면 천룡이 무림맹을 장악하고, 살려두면 지난 일은 사라지죠.”
악마는 혀를 차며 마뜩찮은 기분을 드러냈다.
“왠지 한 방 먹은 기분이군.”
하나 이훤의 표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밝아졌다.
“괜찮아. 이득이야.”
이렇게 된 이상 주작령을 통해 천룡의 꼬리를 잡을 계획이다. 내일 주작령과의 독대는 그걸 위한 첫 번째 계단이 될 터였다.
*
날이 밝았고, 정오(正午)가 됐다.
괴마들의 처소 앞에서 묘한 대치가 벌어졌다.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저도.”
“저도 그렇기는 한데······.”
백소는 총순찰이 낯설었다.
반면 총순찰은 묘한 눈초리로 백소를 훑었다.
그리고 중간에 낀 추혼검제 단학은 땅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연발했다.
“아니, 은공은 왜 시간을 죄다 겹치게 잡아서······.”
단학은 구시렁거렸지만, 내심 자신이 제일 먼저 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명은 생전 처음 보는 여리여리한 소녀였고, 다른 한 명은 어제 도착한 무림맹의 총순찰이 아닌가. 이미 지난밤의 드잡이 질을 전해 들었기에 내심 의관을 정제하며 딴청을 부렸다.
“백 소저부터 들어오시랍니다.”
백소는 반색했고, 총순찰은 여전히 영문 모를 미소를 유지했다. 단학은 맛있는 건 마지막에 먹는 법이라며 연원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백소는 처소로 향하던 중 슬쩍 뒤를 돌아봤다.
왜인지 모르게 초면인 주작령 태위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본 듯한데······.’
“이쪽으로.”
하나 하인의 한 마디에 잰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보다시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어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볼까?”
이훤은 대낮부터 술을 준비한 채 웃고 있었다.
백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훤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훤은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너 설마?”
“천문진인은 단순히 사부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볼까한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았지요. 그 분께서 천명이 다하여 귀천하신 게 아닌 이상 후예인 제가 뜻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괴마가 되려 했다.
“괴마라 칭하는 건 본인의 의지에 달렸지.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단순히 정마로 구분되지 않아. 그리고······.”
“네, 저는 약하지요.”
“그래, 그 이유도 있어.”
이훤의 말에 백소는 심호흡을 하더니 손을 뻗었다.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대협과의 첫 만남이 부끄러웠다는 이유가 아니라면 상관 없습니다.”
그 순간 벼루 위에 놓여 있던 붓이 저절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붓을 적시고 있던 먹이 허공에 흩뿌려진 채로 글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한마(恨魔).
‘맙소사!’
백소가 말을 이었다.
“오음절맥을 치료한 이후 저는 달라졌어요. 대협의 도움과 만매만전, 그리고 천관심결을 더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미약하나 시간이 조금만 흐른다면 폐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진짜 정상적인 강호는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하루아침에 고수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 열린 게다. 무엇보다 그녀가 한마라는 별칭을 들고 나타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결국 그는 괴마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백소는 웃었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함박웃음이다.
이훤은 어쩔 수 없이 헛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결국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군.’
< 72, 자라나는 새싹은.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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