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83화 (183/226)

< 72, 자라나는 새싹은. (2) >

*

이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끔뻑였다.

청추림과 일행은 그야말로 먼지 같았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그랬다.

묘마가 무형검을 펼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고, 악마가 창을 뽑으면 몸뚱이에 뚫을 수 있는 구멍의 최대 개수를 헤아릴 수 있을 터였다. 기껏 해야 피 냄새나 잠시 남았다가 흩어지리라.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아닌 말로 청추림이 무슨 짓을 해도 귀여워 보일 지경이 아니던가. 묘마와 악마처럼 백 살을 넘긴 노고수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굳이 문제를 만들고,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단 말이다.

[쟤 왜 저래?]

이훤은 악마 역시 묘마와 비슷한 눈빛임을 확인하고, 탈마에게 물었다. 한데 탈마 또한 저들보다 덜 할 뿐 묘한 눈빛을 내비치고 있지 않은가.

[외모가 마음에 들었나 보죠.]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격이 달랐기에 의아할 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차하면 깡그리 없애버리고 자리를 떠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하여 이훤은 사태를 관망했다.

솔직히 고정된 풍광을 지켜보는 것도 슬슬 질리던 참이었다.

“내기라니요?”

청추림이 묻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묘마가 말을 받았다.

“강호인이잖아요. 우리도 강호에 조금이나마 발을 담그고 있는데 그냥 양보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소협의 기예를 보여주신다면 기꺼이 자리를 비켜드릴 게요.”

무공을 보여 달라는 행위 자체는 충분히 무례했고, 여차하면 시빗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청추림은 경계심을 내비쳤다.

한데 그 때 묘마가 유혹하듯 비녀를 내밀었다.

“무례한 부탁을 했으니 소협께 이걸 드리고 싶어요. 저쪽의 소저께 참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청추림과 장약란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탄성을 흘렸다.

이훤은 비녀의 출처를 알고 있었다.

탁자 아래서 탈마의 손을 거쳐 묘마에게 건너가지 않았던가. 한데 비녀는 티끌 없이 깨끗한 옥에 얇은 금을 봉황의 모양을 덧씌워놓았다. 저 정도면 고관대작이 아니라 왕부에서나 쓸 법한 장신구가 아닌가.

[저건 또 언제 훔쳤냐?]

[겸사겸사죠.]

[갑자기 관병이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탈마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저 탈마에요.]

반면 청추림은 장약란을 힐끔 본 후 침음을 내뱉었다.

장약란은 이미 옥비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내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묘마는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이어갔다.

“서로 좋은 일 때문에 나선 길인데 기분이 상하면 되나요. 흐음, 뭐가 좋을까요?”

이미 다 정해놨을 터였다.

하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밖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유정루에 왔으니 버드나무로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소협께서 여기 젓가락을 던져서 버드나무의 잎을 떨어트리시면 이긴 걸로 하는 아주! 간단한 내기에요. 어떠세요?”

청추림은 버드나무를 바라봤다.

그가 서 있는 창가와 호반을 따라 늘어진 버드나무와의 거리는 삼 장 남짓에 불과했다. 내공을 쓴다면 잎사귀 한 개는 물론이고, 비처럼 흩날리게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야말로 묘마의 말처럼 서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해결책이었다.

“잠시 일행과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하나 이곳은 강호다.

그렇기에 혹시나 속임수가 있지는 않을지 일행과 대화를 나누려는 게다.

묘마는 방긋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우리는 이 틈에 한 잔 더 하지요.”

술잔을 맞댄 사이 이훤이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묘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라나는 새싹은······.”

악마가 영혼의 동반자처럼 말을 받았다.

“돌아가면서 밟아줘야지.”

이훤은 히죽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야 저들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의 노강호라면 손자뻘인 후기지수들과 드잡이 질은 물론이고, 말을 섞는 것도 귀찮았으리라.

하나 저들은 정상이 아니지 않던가.

겉모습이 잘생긴 청년과 아리따운 여인지만, 속은 노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자세히 살펴보면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풍겼다.

- 묘마의 농염한 아름다움.

- 악마의 비틀린 잘생김.

결국 두 사람은 진짜 젊음을 마주하고 배알이 꼴린 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가문을 위해 삶을 바쳤고, 그 후에는 신마의 심득을 위해 오십 년 동안 은거 아닌 은거를 한 상태가 아니던가.

이훤은 히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좋은 말이다. 나도 나중에 써 먹어야지.”

그는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이와 같은 상황을 질리도록 마주했다. 강호는 큰일은 협의로 결정되지만, 실생활은 돈과 힘으로 움직이지 않던가. 그렇기에 강호의 후기지수들과 지겹도록 싸웠다.

통쾌함과 후련함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이제는 귀찮기만 했기에 날벌레를 쫓듯 보내려고 했던 게다. 하나 묘마와 악마는 이런 경험이 전무했다.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 기분을 풀고, 노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어떻게 노나 지켜볼까?’

생각해보니 자라나는 새싹을 잘근잘근 밟기만 했을 뿐 느긋하게 구경한 적이 없지 않던가.

이훤은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잠시 후 청추림이 돌아왔다.

“단순히 젓가락을 던져서 버드나무 잎을 떨어트리는 거라면 한 번 해보겠소.”

묘마는 손을 들고 물러섰다.

“이거 다 쓰셔도 되요. 구경만 할 게요.”

“하나면 됩니다.”

청추림은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뽑았다.

그리고 대충 방향만 살핀 후 냅다 집어던졌다.

소림의 내공은 강호에서도 순후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니 속가로 유명한 장평문의 소문주인 청추림의 내공은 또래에 비해 월등한 상태였다.

쉭!

젓가락은 쾌속하게 버드나무 쪽으로 날아갔다.

한데 가지를 맞추려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것이 아닌가.

“엇!”

청추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방향이 바뀐 게다.

그는 황망함에 자신도 모르게 장약란을 돌아봤다.

이미 옥비녀에 혹한 장약란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내비쳤다. 한데 묘마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수저통을 청추림 쪽으로 밀었다.

“금방 맞추시겠네요.”

청추림은 감사를 표한 후 심호흡을 했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는 장평문의 명예와 정인의 호감이 달렸다. 그는 암기를 던진다는 생각으로 정밀하게 조준을 했고, 이내 젓가락이 빛살처럼 날았다.

쇄애애액!

이번에도 어찌된 일인지 바람이 불었다.

내공을 담아 던진 젓가락이기에 미풍은 고려의 대상이 아닐 터였다. 하나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가지를 비껴갔다. 가지가 수염처럼 늘어졌고, 잎사귀는 빼곡했다. 그러니 대충 던져도 맞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연거푸 실패를 한 청추림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크흑! 이게 왜? 방금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장약란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청 소협.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신 것 같네요.”

묘마를 의식한 발언이었다.

하나 정작 지목당한 괴마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슬픈 생각까지 떠올려야 했다. 묘마가 무형검을 쓰는 이상 소림의 방장이라도 오지 않는 한 성사 여부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

“크흠! 제대로 해보겠소!”

청추림이 다시 나섰지만, 젓가락을 던지는 족족 실패였다.

아예 버드나무까지 가지 못하고 추락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 사이 눈치를 보던 후기지수들이 나섰다. 그들 또한 장약란에게 호감을 지닌 상태였고, 염기를 자연스레 흩뿌리는 묘마 앞에서 잘 보이고 싶었으리라.

“청 형,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군요. 제가 한 번 해보지요.”

장법과 권법을 성명절기로 쓰는 놈이 나섰다가 실패했다. 결국 암기를 중점으로 익힌 자까지 나섰지만, 유정루와 버드나무 사이에는 수문장이라도 있는 것처럼 잎사귀를 하나도 떨어트리지 못했다.

“호호호. 양보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게 되었네요.”

묘마가 애써 안타까운 표정을 짓자, 청추림과 일행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은 이내 자괴감이 되었고, 나아가 분노로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족함 없이 살아온 꼬맹이들이 아니던가.

누군가의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경험이 있을 리 없다.

청추림은 당장 욕을 퍼부을 것처럼 입매를 실룩였다.

그 때 악마가 헛기침을 하며 이목을 사로잡았다.

“크흠.”

묘마가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자신이 즐길 차례라는 의미였다. 평소에는 견원처럼 앙숙이더니 이럴 때에는 수십 년의 지기처럼 손발이 맞는다.

“내가 한 번 해볼까?”

그리고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탁자를 내리쳤다.

텅-

가볍게 내리치는 순간 수저통이 솟아올랐다.

악마는 젓가락 한 개를 엄지와 검지로 잡더니 바늘로 구멍을 뚫듯 비산하는 젓가락의 뒤를 건드렸다.

파파파파파파팟!

그 순간 스무 개에 가까운 젓가락이 마치 연결된 것처럼 꼬리를 물고 날아갔다. 버드나무의 몸통에 틀어박힌 젓가락들은 명확하게 악(岳)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기는 우리가 이긴 것 같군.”

청추림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으며 말했다.

“당신들 누구요?”

한데 허리춤을 더듬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엇! 내 검.”

검집과 검이 통째로 사라졌다.

청추림뿐 아니라 함께 했던 후기지수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안이었다. 그 순간 관도의 한 가운데에 십여 개의 병장기가 나뒹굴었다.

촤라라라락.

탈마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병장기를 보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빨리 안 가면 누가 가져가겠는 걸?”

후기지수들은 황급히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청추림은 눈을 매섭게 뜨며 괴마들을 노려봤다.

“너희들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이훤이 술잔을 들며 건배를 선창하듯 말했다.

“육대괴마다.”

청추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사술로 우리를 현혹하다니! 두고 보자.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쾅!

악마의 창이 기둥에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청추림의 귀밑머리는 그제야 펄럭이는 것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데 악마가 다시 손을 펴는 순간 기둥에 꽂혀 있던 창이 저절로 뽑히더니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청추림의 반대쪽 귀밑머리가 흩날렸다.

“나는 악마다. 언제든 나를 찾아오라.”

악마의 멋들어진 한 마디에 청추림은 진저리를 치더니 재빨리 계단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하하하하하! 재밌었다.”

“호호호호호! 오랜만에 뭔가 후련했어.”

“우리 제법 손발이 맞는 걸?”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아까 나무에는 왜 네 이름만 썼냐?”

*

남궁세가는 불과 며칠 전의 혈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정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창천성 내원에서 열린 연회에 칠공과 오기는 물론이고, 사절까지 참석했다.

남궁세가의 건재함을 무림맹에 알리고자 함이다.

남궁세가와 제검백가 중 이번 일과 관련 없는 속가, 그리고 무림맹에서 파견한 위무대의 수장들이 모였으니 연회는 시끌벅적했다.

“하하! 반갑네. 오랜만에 보는 군?”

가주인 남궁혁은 귀빈을 접대하면서도 쉼 없이 연회장의 입구를 살폈다.

‘늦지 않고 온다더니!’

괴마라고 하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제멋대로다.

‘아버지까지 미친 연놈들하고 어울리면서 이상해지신 것 같아.’

그는 한 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리고 이내 그의 두 눈은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아니! 언제 기어들어온 거야?”

이훤과 탈마는 물론이고, 악마와 청하까지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음식과 술을 탐했다. 심지어 악마와 청하는 넘어지기라도 한 듯 머리카락은 삐져나왔고, 옷은 흙먼지로 더러웠다.

남궁혁의 목소리가 조금 컸기 때문일까.

몇몇 사람들이 남궁혁의 시선을 좇았다.

그리고 장평문의 대표로 참석한 청추림은 귀신을 본 것처럼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저 자들입니다! 괴마라고 한 걸 보면 사마외도의 잔당이 분명합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설령 사마외도의 잔당이 맞는다고 해도 창천성의 내원까지 들어오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여 위무대의 중진들은 남궁혁을 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크흠. 저들은······. 저들은······.”

검후가 남궁혁의 옆에서 서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들이 이번 혈겁을 일선에서 막아준 귀인들입니다.”

“귀인이라고요? 괴마라고 하던데.”

청추림은 검후가 등장하자 주눅이 든 채 눈치를 봤다.

검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탈마와 악마, 그리고 묘마요.”

무림맹의 맹도들은 마지막 사내를 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저 자가 만매만전의 저자이자, 취선관의 관주이며, 새로이 검제라 불리는 만환검제로 괴마의 수장, 이훤이외다.”

“오오오오! 절세고수를 드디어 보게 되는군요.”

맹도들은 괴마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미 지난 몇 번의 사건을 통해 이훤의 성정과 행적이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자들만 남은 게다. 무엇보다 만매만전이 있는 한 그를 사마외도라고 공격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잠시.”

무림맹 총순찰이 맹도들을 헤치고 나섰다.

남궁세가에 도착했을 때부터 취선관주를 입에 달고 다니던 자가 아닌가.

총순찰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간 후 손을 모았다.

“취선관주를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악마와 묘마가 경계심을 거뒀다.

이훤은 총순찰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묘한 새끼네.’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지만, 적대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한데 천룡전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거늘 이상하게 거슬렸다.

“무림맹의 총순찰을 맡고 있는 주작령 태위라고 합니다.”

이훤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너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무림맹에 있던 소천뢰를 천룡전 새끼들한테 반출했지?”

갑작스런 추궁에 남궁혁은 물론이고, 무림맹의 맹도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면 태위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네. 제가 그랬습니다.”

< 72, 자라나는 새싹은.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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